어둠이 걷히고 황금빛 햇살이 창가를 넘어 비단을 깔아놓은 듯한 침대 위로 쏟아져 내렸다. 현실의 나는 그제야 뒤척이며 눈을 떴지만, 이 완벽하게 구축된 가상현실 속에서 나의 아침은 늘 똑같았다. 지루할 정도로 정교한 천장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 이곳은 거대한 세계, ‘오리진: 잃어버린 유산’의 한 조각, ‘그랑펠 성’의 이름 없는 객실 중 하나였다.
“후으암.”
거대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부드러운 침대보가 몸을 감쌌다. 기지개를 쭉 켜고 나니 나른했던 몸에 조금씩 활기가 돌았다. 내 캐릭터, ‘잿불’은 길고 마른 체형에 늘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끔은 너무 무심해서 다른 플레이어들이 날 보고 AI 아니냐고 수군거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 세계에 뛰어든 이유는 단 하나, 내 머리를 굴릴 만한 흥미로운 사건을 찾아서였으니까.
창가로 다가가 두툼한 벨벳 커튼을 젖히자, 드넓은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새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간지럽혔고, 멀리 보이는 호수 위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래, 오늘 같은 날은 왠지 모를 예감이 들었다. 뭔가 ‘터질’ 것 같은 예감.
나는 객실에 비치된 간편한 예복으로 갈아입고 문을 나섰다. 텅 빈 복도는 고요했다. 그랑펠 성은 언제나 그랬다. 겉만 번지르르한 빈 껍데기. 몇몇 고위 랭커들이 길드 아지트로 쓰고 있긴 했지만, 그들도 대개는 던전이나 레이드에 정신이 팔려 성 안은 적막강산이었다. 나 같은 ‘잉여’가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문득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보통 이 시간에 성 안을 돌아다니는 플레이어는 나 말고 거의 없는데. 고개를 돌리자, 복도 저편에서 허둥지둥 뛰어오는 한 플레이어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길드 문양은 ‘그림자 기사단’. 이 성을 길드 아지트로 사용하는 랭커 길드 중 하나였다.
“저, 저기! 잿불님 맞으시죠?”
그는 헐떡이며 내 앞에 섰다. 잿불. 이 게임에서 나의 ID였다. 이명은 따로 없었지만, 은근히 미스터리한 소문이 따라다니는 터라 날 알아보는 이는 종종 있었다.
“무슨 일이신지.”
내 목소리는 늘 그랬듯 감정 없이 나지막했다.
“큰일 났습니다! 회, 회장님이…!”
회장님? 그림자 기사단의 길드 마스터인 ‘강철 심장’을 말하는 걸까? 그의 인상착의를 떠올리자, 덩치 큰 사내의 우악스러운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에게 무슨 일이?
“따라오십시오! 제발… 도와주세요!”
그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그의 눈은 패닉으로 가득했고, 그 감정은 가상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나는 말없이 그를 따랐다. 나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뭔가 터진 게 확실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성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서재였다. 낡은 나무 문에는 굵은 쇠사슬이 감겨 있었고, 자물쇠는 굳게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문고리에 맺혀 있는 핏자국이었다. 붉고 선명한, 아직 마르지 않은 핏자국.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내가 물었다. 주변에는 이미 그림자 기사단원 몇 명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새벽 즈음에… 길드 마스터님이 서재로 들어가셨습니다. 중요한 서류를 보신다고요. 그 후로 아무도 못 봤어요. 오늘 아침에 부길드 마스터님이 문을 열려고 했는데, 안에서 잠겨 있었다고….”
이야기를 하는 단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안에서 잠겨 있었다? 나는 쇠사슬과 자물쇠를 유심히 살폈다. 이것들은 누가 봐도 밖에서 잠근 흔적이었다.
“안에서 잠겨 있었다는 건…?”
“네! 부길드 마스터님이 먼저 오셔서 억지로 문을 열려고 했는데, 안에서 잠겨 있는 걸 확인했답니다. 그래서 다시 이렇게 쇠사슬로 잠가 놓은 거고요… 혹시 범인이 도망갈까 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서재 문을 둘러봤다. 문틈은 외부에서 침입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좁았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낡은 문틀이었지만, 파손된 흔적은 전혀 없었다.
“강철 심장님은… 안에 계신 겁니까?”
“네… 느껴집니다. 아바타의 잔영이….”
다른 단원이 말끝을 흐렸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죽으면’ 일정 시간 동안 아바타의 잔영이 그 자리에 남게 된다. 그 잔영을 통해서 ‘죽음’의 흔적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나는 시선을 들어 서재의 외벽을 훑었다. 짙은 회색의 석조 건물. 높은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창살은 녹슬어 있었다. 외부에서 침입하거나 탈출하기에는 너무 높고 튼튼했다. 게다가 그랑펠 성은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한 단원이 조심스럽게 마법 스킬을 사용해 서재 문을 부쉈다. ‘파괴의 망치’라는 스킬이 문에 정확히 명중했고, 굉음과 함께 낡은 문짝이 산산조각 났다. 안에서 밀려나오는 먼지구름과 함께, 서늘한 공기가 복도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안의 광경은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서재 한가운데, 길드 마스터 ‘강철 심장’의 거구 아바타가 쓰러져 있었다. 푸른 갑옷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그의 심장 부분에는 검은 단검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는 피를 흘린 채로, 눈을 크게 뜬 채 죽어 있었다.
“회장님…!”
그림자 기사단원들이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 광경을 무심하게 지켜봤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서재는 깔끔했다. 흩어진 책들, 필기구, 잉크병… 그 외에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창문은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고, 낡은 책장들은 벽에 완벽하게 밀착되어 있었다. 숨을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건… 밀실 살인입니다!”
누군가 외쳤다. 그의 말은 옳았다. 안에서 잠겨 있고, 밖에서 쇠사슬로 이중 잠금. 창문은 닫히고 빗장이 걸린 상태. 침입이나 탈출의 흔적은 전무했다.
“대체… 누가… 그리고 어떻게…?”
혼란스러운 속삭임이 오고 갔다. 모두가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범인은 이들 중 한 명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 밀실을 만들 수 있었을까?
나는 느릿하게 서재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밑에 밟히는 나무 조각들과 먼지들이 바스락거렸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나는 쓰러진 ‘강철 심장’의 아바타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시신은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검은 단검은 마치 불길한 존재처럼 빛을 머금고 있었다.
시선을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샹들리에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벽에는 거대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그 밑으로는 낡은 책장들이 가득했다. 먼지 쌓인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강철 심장’의 시신에 박힌 단검을 잡았다. 손잡이는 차갑고 매끄러웠다. 날카로운 칼날은 빛을 반사했다. 평범한 단검이었다. 아니, 평범해 보였다.
“잿불님, 혹시… 뭘 좀 아십니까?”
부길드 마스터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가 내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단검을 뽑았다. 게임 속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범죄 현장의 증거품을 훼손합니다. 주의하십시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검의 칼날에 묻은 피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 나는 단검의 끝을 강철 심장의 갑옷에 살짝 갖다 댔다. 그리고 갑옷의 재질을 유심히 살폈다. 견고한 금속 재질. 일반적인 단검으로는 쉽게 뚫기 어려운.
“이 단검… 평범한 물건은 아니군요.”
내가 중얼거렸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부길드 마스터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단검을 뽑았던 자리를 다시 손가락으로 훑었다. 단검이 박혔던 갑옷의 틈새. 그리고 그 주변의 미세한 균열들.
“이 갑옷은 상당한 방어력을 가진 아이템입니다. 이 정도 급의 갑옷을 일반적인 단검으로 뚫기는 쉽지 않아요. 최소한 고강화된 무기거나… 아니면 특별한 스킬이 동반되어야 하죠.”
나의 말에 단원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저 단검은… 강철 심장님이 사냥 중에 얻으셨던 고유 드롭 아이템입니다. 저주받은 단검이라는 별명이 있었지만, 저런 대미지를 줄 수 있는 무기는 아니었습니다…!”
한 단원이 외쳤다.
“저주받은 단검이라….”
나는 의미심장하게 단검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밀실. 불가능한 살인. 그리고 일반적이지 않은 무기.
강철 심장의 시신 주변 바닥을 손가락으로 쓸어보니, 희미한 먼지 자국이 손끝에 묻어났다. 하지만 이 먼지들은 평범한 먼지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아주 미세한 금속 가루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서재를 한 바퀴 돌았다. 낡은 책장들, 책상, 벽난로, 그리고 굳게 닫힌 창문.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눈으로 훑었다. 나의 뇌는 마치 고성능 컴퓨터처럼 모든 정보를 빠르게 스캔하고 분류하며, 불가능한 것들 속에서 가능한 단서를 찾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범인은 서재 안에 있었습니다.”
내가 말했다. 단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밖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창문도 마찬가지였고요.”
부길드 마스터가 반박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범인은 이 방에 들어와서, 강철 심장님을 죽이고, 그리고 이 방을 나갔습니다.”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이 트릭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나는 단검을 들고 서재 중앙에 섰다. 그리고 나의 시선은 서재의 천장, 그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문제는 이 단검과, 강철 심장님의 갑옷. 그리고… 이 서재의 구조에 있습니다.”
모두의 눈이 커졌다. 그들의 시선은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박혔다.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냉철하게 밀실 살인 사건의 그림자를 걷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답답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나는 언제나처럼 숨겨진 진실의 끈을 찾아낼 것이다. 나의 흥미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