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핏빛 달이 비추는 맹세**
세라는 숲의 심장부로 향하는 비밀 통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실버리온 제국의 정찰대가 여기까지 침범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뭇가지 사이로 붉게 물든 달빛이 스며들어, 숲의 바닥에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바람이 차가웠고, 잎사귀 스치는 소리가 심장을 조였다. 그녀는 소령 계급장이 달린 제복 대신, 어둠에 스며드는 검은 천으로 된 간소한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침내, 거대한 고목이 병풍처럼 둘러싼 작은 공터에 도착했다. 중앙에는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은 제단 같은 돌덩이가 놓여 있었다. 그 위로 붉은 달빛이 부드럽게 쏟아지고 있었다.
“카이렌?”
세라의 목소리가 숲의 고요를 조심스럽게 갈랐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푸른빛이 감도는 두 눈이 나타났다. 길고 은은한 빛을 내는 머리카락과 날렵하면서도 우아한 엘드라족 특유의 이목구비. 카이렌이었다. 그는 제단 위로 떠오른 붉은 달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숲의 정령들이 속삭이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세라.”
그의 목소리는 숲의 바람처럼 잔잔하면서도, 세라의 뼛속까지 스며드는 따뜻함을 지녔다. 그는 성큼 다가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이 순간만큼은, 제국과 에테르나 사이의 오랜 불신도, 실바누스 조약에 명시된 금단의 맹세도 모두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두 사람만의 세계였다.
“무사했군.” 세라가 그의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오늘 정찰대 순찰이 더욱 삼엄했어. 혹시라도 발각될까 봐…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카이렌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숲은 너의 발걸음을 기억하고 있다. 걱정 마라. 인간의 눈은 숲의 그림자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오늘밤은 평소와 다르다.”
세라의 푸른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무슨 일이라도?”
“숲이 노래하기를 멈췄어. 며칠 전부터, 북쪽 경계에서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인간들이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는 듯해.”
세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루카스 장군인가… 요즘 들어 ‘회색 전쟁’의 망령을 들먹이며 엘드라족과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어. 제국 의회에서도 그의 강경한 태도를 주시하고 있지만…”
“그의 행동이 단순히 과격한 발언에 그치지 않을 것 같다.” 카이렌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어제밤, 숲의 정령들이 혼란에 빠진 채 내게 속삭였다. 인간의 군대가… 움직이고 있다고.”
세라의 등골에 한기가 스쳤다. 루카스 장군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감시를 명분 삼아 지속적으로 에테르나의 경계를 침범하려 했다. 하지만 ‘움직인다’는 것은 단순한 정찰을 넘어선 의미였다.
“설마…”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선전포고도 없이?”
“숲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세라. 그들은 조약의 허점을 찾거나, 혹은 아예 조약을 깨뜨릴 명분을 만들고 싶어 하는 듯해.”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들의 금지된 사랑만큼이나, 제국과 에테르나 사이의 평화 역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파드득!
갑작스러운 새들의 비상 소리와 함께 숲 저편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군화 소리였다.
세라와 카이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동시에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너무 깊이 들어왔어.” 세라가 낮게 읊조렸다. “정찰대가 이토록 안쪽까지 들어오는 건 드문 일인데…”
카이렌은 이미 주위의 기운을 살피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옅은 초록빛 마나가 피어올랐다.
“둘이 아니다. 적어도 넷, 아니… 여섯 명 이상이다. 조직적인 수색대다.”
세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루카스 장군이 노골적으로 에테르나 심장부까지 병력을 보냈을 리는 없었다. 혹시…
‘우리 때문인가?’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누군가 자신들의 관계를 눈치챈 것일까?
“흩어져야 해.” 세라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내가 이쪽으로 유인할게. 너는…”
“안 된다.” 카이렌이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너를 혼자 보낼 순 없어. 그들은 무자비하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있다가 발각되면…” 세라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묻어났다. 실바누스 조약에 따라, 이종족 간의 교류는 반역에 준하는 죄였다. 특히 제국군의 소령과 에테르나의 수호자가 함께 있는 모습은 전쟁을 촉발시키기에 충분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제는 병사들의 거친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들은 바로 공터를 향해 오고 있었다.
카이렌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지형은 자신에게 유리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숲의 가장 짙은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세라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 민첩하게 몸을 낮췄다.
“내가 미끼가 될게.” 카이렌이 귓가에 속삭였다. “내게로 시선을 돌리면, 너는 북쪽으로 빠져나가. 그곳에는 내가 심어둔 숲의 길이 있다.”
세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어! 너마저 위험해지면 어떡해?”
“나를 믿어라. 숲이 나를 보호할 것이다. 그리고… 너를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핏빛 달빛 아래서 강렬하게 빛났다. 사랑과 결의가 뒤섞인 시선이었다.
철컥!
수색대 병사들이 공터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눈빛은 밤의 숲 속에서도 날카롭게 번득였다.
선두에 선 병사가 코를 킁킁거렸다. “이 근처에서 분명히 엘드라족의 기운이 느껴진다. 특이하게… 인간의 것과 뒤섞여 있어.”
세라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들이 자신들의 기척을 감지한 것이다.
“젠장…” 세라가 작게 욕설을 읊조렸다.
카이렌은 그녀의 손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그리고는 숲 속으로 작게 신호를 보냈다. 숲의 정령들이 움직이는 듯, 나뭇가지들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누구냐!” 병사 중 한 명이 외치며 공터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그의 손에 든 검이 핏빛 달빛을 받아 번쩍였다.
카이렌은 세라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맹세한다. 다시 만나자.”
그리고는, 세라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숲 깊은 곳으로 달려나갔다. 그의 뒤로 숲의 정령들이 뿜어내는 환영의 빛이 짧게 번쩍였다.
“저기다! 엘드라족이다!” 병사들이 일제히 카이렌이 사라진 방향으로 총구를 겨누며 쫓아갔다.
세라는 카이렌의 등 뒤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숨을 멈췄다.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맹세한다. 다시 만나자.’
그녀는 카이렌이 알려준 북쪽 숲길로 몸을 돌렸다. 한 걸음, 두 걸음… 발걸음을 떼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서 이 정보를 루카스 장군에게, 아니, 제국 의회에 전달해야 했다. 카이렌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는 없었다.
숲의 나뭇잎 사이로 붉은 달빛이 부서져 내렸다.
그때,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령 세라?”
세라의 온몸이 얼어붙었다. 등골을 타고 차가운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이 목소리는… 루카스 장군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붉은 달빛 아래, 루카스 장군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의 뒤로는 그림자처럼 두 명의 병사가 더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숲의 밤보다 더 어둡고 차가웠다.
“무슨 볼일이 있어서, 이 깊은 숲에서… 엘드라족과 밀회를 즐기고 있었나?”
그의 마지막 말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비난과 확신이 뒤섞인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았다.
세라의 손이 허리춤에 찬 단검으로 향했다. 덫이었다. 카이렌이 미끼가 되는 순간, 그들은 세라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핏빛 달이 공터 위에서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밤, 숲의 심장에서 모든 것이 드러날 위기에 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