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이… 이리아.”
루카스의 목소리는 끓어오르는 불안을 억누르려 애쓰는 듯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좁고 습한 동굴 깊숙한 곳, 낡은 털가죽 하나에 몸을 기댄 이리아는 그의 부름에도 미동도 없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푸른 비늘이 희미하게 빛났고, 그 너머의 은색 머리카락은 축축한 동굴 공기에도 불구하고 마치 서리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그녀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는 이제 더 이상 착각할 수 없는 지근거리에 이르렀다. 투박한 군화가 낙엽과 잔가지를 짓밟는 소리, 거친 숨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날카로운 철의 마찰음. 사냥꾼들이었다. 그들을 쫓는 인간 추격대.
이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깊은 밤하늘을 닮은 두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그녀의 시선은 루카스에게 닿았으나, 그 안에는 두려움 외에 다른 감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통이었다. 인간의 영역, 신성 제국의 땅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태생부터 그림자 숲의 기운을 먹고 자란 실그족인 그녀에게, 이곳의 척박한 마법 에너지와 오염된 대기는 독과 같았다. 푸른 비늘은 점차 색을 잃어가고 있었고, 피부 아래 혈관이 검게 꿈틀거렸다.
“루카스…”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숲의 정령처럼 맑았던 음색은 사라지고, 메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만 나왔다.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그 말에 루카스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는 굳게 닫힌 동굴 입구를 향해 귀를 기울였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낡은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가 멈춘 것이다. 그들이 동굴을 찾았다.
“아니, 버틸 수 있어.” 루카스는 이리아의 손을 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돼. 내가… 내가 길을 열게.”
그는 품속에서 녹슨 검을 꺼냈다. 한때 제국의 영웅으로 불리던 기사의 검은, 이제 금지된 사랑을 지키는 외로운 파수꾼의 무기가 되어 있었다. 검날 위로 흙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날카로운 칼날처럼 빛났다.
“무리야.” 이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은발이 흔들리며 창백한 얼굴을 스쳤다. “저들은 신성 기사단이야. 너 혼자서는… 그리고 내가 이렇게 약해진 상태로는…”
“그래서 내가 가는 거야.” 루카스는 이를 악물었다. “네가 회복할 시간을 벌어줄게. 숲의 심장으로 돌아가면, 너는 다시 강해질 수 있어.”
그는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차갑고 뻣뻣한 피부,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였다. “살아남아, 이리아. 반드시.”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푸른 눈동자 가득 채워진 절망과 사랑,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이별의 예감.
밖에서 누군가 외쳤다. “안에 누가 있다! 냄새가 난다!”
젠장. 루카스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이리아를 향해 마지막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 끌어올린 미소였지만, 그 안에는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 내가 신호를 보내면, 그때 도망쳐.”
말을 마친 루카스는 그대로 몸을 돌려 동굴 입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등 뒤로 이리아의 절규가 찢어지는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안 돼! 루카스! 가지 마!”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차가운 빗장을 움켜쥐는 그의 손끝에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단 한 번의 기회. 그 한 번으로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콰앙!
빗장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깥세상의 빛. 그리고 그 빛을 등지고 서 있는 기사들의 실루엣. 그들의 눈에는 번뜩이는 증오와 함께 확신이 서려 있었다.
“발견했다! 이단자 루카스! 그리고… 저 추악한 이종족을!”
선두에 선 기사가 외쳤다. 그의 검이 번쩍이며 루카스의 심장을 겨냥했다. 루카스는 피식 웃었다. 추악한 이종족? 그들의 눈에 이리아는 그렇게 보이는가. 하지만 그의 눈에는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존재였다.
“감히 내 사랑을 모욕하는 자는…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용서치 않는다!”
그의 발이 땅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녹슨 검은 찰나의 순간, 과거의 영광을 되찾은 듯 섬광을 뿜어냈다. 기사들의 방패와 갑옷에 부딪히며 쨍그랑거리는 금속음이 동굴을 뒤흔들었다. 루카스는 그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이리아가 도망칠 시간을.
세 명의 기사가 동시에 덤벼들었다. 루카스는 아슬아슬하게 칼날을 피하며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녹슨 검은 신성 기사단의 정교한 검술과 수많은 숫자에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그의 왼쪽 어깨에 칼날이 스쳤다. 뜨거운 통증이 번져왔다.
“크윽!”
피가 튀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기사들의 틈새, 동굴 밖으로 이어지는 길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리아가 탈출할 수 있도록.
“포기해라, 루카스! 이미 늦었다!”
기사단장이 거대한 양손검을 휘두르며 맹공을 퍼부었다. 루카스는 간신히 검으로 막아냈으나, 충격으로 손이 저렸다. 그는 절박하게 이리아가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동굴 안쪽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푸른빛과 은색이 뒤섞인, 숲의 기운이 응축된 듯한 강렬한 마력. 그것은 이리아에게서 뿜어져 나온 것이었다. 약해졌던 그녀의 몸이, 사랑하는 이를 지키려는 본능적인 갈망에 반응하여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기사들이 당황하여 뒤로 물러났다. 푸른 섬광은 순식간에 동굴 입구를 뒤덮었고, 그들의 시야를 가렸다. 루카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온몸의 힘을 쥐어짜 내, 기사단장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기사단장이 피하려 했으나, 이리아의 마력에 눈이 멀어 잠시 주춤했다. 그 순간, 루카스의 녹슨 검이 그의 방패를 꿰뚫었다.
“도망쳐, 이리아!” 루카스의 외침이 동굴을 가득 채웠다.
푸른 섬광이 사그라드는 동시에, 동굴 안쪽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리아가 움직인 것이다. 루카스는 안도감과 함께 깊은 절망을 느꼈다. 그녀는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기사단장은 격분한 얼굴로 방패에 박힌 검을 뽑아 던졌다. “이 개자식! 감히 날 상하게 해? 모두 놈을 잡아라! 죽여도 좋다!”
수많은 검날이 루카스를 향해 겨눠졌다.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빛났다. 저 뒤편, 그림자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 보였다. 이리아가 그 길을 따라 달리고 있으리라.
그는 마지막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허공에 검을 크게 휘둘렀다. 어둠이 짙게 깔린 동굴의 천장이, 마치 그의 운명처럼 무겁게 짓눌러왔다.
숲의 바람이, 부디 나의 연인에게 닿아주기를.
그녀의 푸른 비늘이, 다시 빛을 찾을 수 있기를.
그것이, 죽어가는 기사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멀리서, 숲의 가장자리를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차갑고도 고독한 바람 소리. 마치 모든 것을 지켜본 대지의 한숨처럼.
그리고 그 바람 속으로, 푸른 비늘의 흔적이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남겨진 것은, 핏물 든 흙바닥과 절규만이 가득한 동굴의 어둠뿐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그러나 시작될 수 없는 사랑의 비극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