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먼지가 뒤덮인 도시의 잔해 속에서, 진우는 녹슨 철골 위를 위태롭게 걸었다. 발밑에서 삐걱이는 금속음이 메마른 공기를 갈랐지만, 그는 익숙한 소음처럼 무심했다. 낡은 방독면 안으로 쿰쿰한 흙먼지 냄새가 스며들었다. 이곳은 폐허가 된 지 100년이 넘은 세계였고, 살아남은 인간들에겐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진우 오빠, 여기 정말 아무것도 없어?”
뒤따라오던 사라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들려왔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은 듯한 맑은 음색이었다. 10대 후반의 그녀는 여전히 눈빛에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그게 진우가 그녀를 데리고 다니는 유일한 이유였다. 이 끝없는 절망 속에서, 누군가는 작은 빛이라도 품고 있어야 했다.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음’이라면, 아주 많아.” 진우는 비꼬듯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부서진 상가 건물의 잔해를 훑고 있었다. 희미한 햇빛이 금이 간 유리창 너머로 간신히 새어 들어와, 먼지 속을 떠도는 작은 입자들을 비췄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쓸모 있는’ 건 찾기 힘들다는 뜻이지.”
그들은 보름째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물은 바닥났고, 비상식량도 이제 며칠 버티지 못할 양이었다. 이번 탐색이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사라는 진우 옆으로 다가와 낡은 지도를 펼쳤다. 종이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장자리가 헤져 있었다. “지도에 따르면, 이 아래에 오래된 지하철역이 있다고 되어 있어. ‘잊혀진 터널’이라고 쓰여 있네.”
“잊혀진 터널이라…” 진우는 지도를 내려다봤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예전에는 대형 쇼핑몰이었던 건물 잔해 위였다. 건물 중앙에 거대한 싱크홀이 생겨 지하로 이어지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이라면, 뭔가 있을지도.”
희박한 희망에 기댄 채, 진우와 사라는 조심스럽게 싱크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밧줄을 매고, 부서진 철근과 콘크리트 조각들을 밟으며 어둠 속으로 향했다. 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상과는 또 다른 종류의 정적이었다.
한참을 내려갔을까. 그들은 지하철 플랫폼의 잔해에 도착했다. 오래된 열차들은 녹슨 채 멈춰 서 있었고, 승강장은 검은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다. 진우는 헤드라이트를 켰다. 빛이 닿는 곳마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으음, 여긴 정말… 시간조차 멈춘 것 같네.” 사라가 몸을 움츠렸다.
진우는 플랫폼을 가로질러 터널 입구로 향했다. “시간은 멈춘 게 아니라, 우리만 빼고 모두 사라진 거지.”
터널 안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레일은 뒤틀려 있었고, 천장에서는 불분명한 액체가 뚝, 뚝 떨어졌다. 진우는 라이플을 단단히 쥐고 주위를 경계했다. 지하에는 지상과는 다른 종류의 ‘변종’들이 살고 있었다. 햇빛을 싫어하고, 소리에 민감한 것들.
얼마나 걸었을까. 터널 벽 한쪽이 다른 곳과 이질적인 모습으로 눈에 들어왔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매끈한 벽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흙과 먼지에 뒤덮여 있었지만, 진우의 헤드라이트가 비추자 은은한 금속빛을 띠었다.
“여기 좀 봐.” 진우는 사라에게 손짓했다. “벽이… 이상해.”
사라가 다가와 벽을 만져봤다. “이건… 보통 콘크리트가 아니야. 뭔가 문 같기도 하고.”
진우는 조심스럽게 벽을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희미한 문틈이 보였다. 그러나 틈새는 완벽하게 봉인되어 있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을 예상이라도 한 듯, 내부의 것을 절대 외부로 내보내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곳에…” 진우는 중얼거렸다. 그는 도구를 꺼내 틈새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쾅, 쾅, 쾅. 무거운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십여 분의 사투 끝에, 진우는 마침내 벽 한쪽을 부수는 데 성공했다.
뿌연 먼지 구름이 일었다. 먼지가 걷히자, 드러난 것은 작은 통로였다. 통로 끝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좀 더 단순한 철문이었다. 문고리를 잡고 당기자,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 안쪽은 뜻밖에도 깔끔했다. 공기는 바깥과 달리 눅눅하지 않았고, 희미하지만 상쾌한 풀 내음이 감돌았다. 오래된 연구실 같기도 하고, 개인 작업실 같기도 한 공간이었다. 벽에는 알아보기 힘든 상형문자와 알 수 없는 기호들이 새겨져 있었고, 중앙에는 커다란 돌 제단이 놓여 있었다.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어… 진짜로.” 사라는 실망한 듯 중얼거렸다.
“기다려.” 진우의 시선은 제단 한가운데, 움푹 파인 구멍에 고정되었다. 마치 무언가가 빠져나간 자리 같았다. 그 순간, 진우의 손끝에 닿은 것이 있었다. 제단 옆, 벽에 박힌 작은 석판이었다. 흙먼지를 털어내자, 석판에는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문양 한가운데에는 붉은색 광석이 박혀 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였는데,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진우는 홀린 듯 석판을 만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 그의 손가락이 광석에 닿는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정지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붉은 빛이 일순 강렬하게 폭발하며 공간을 가득 채웠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빛이었다. 진우의 몸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익숙지 않은, 그러나 낯설지 않은 힘이었다.
“오빠! 괜찮아?!” 사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진우에게는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빛이 걷히자, 진우의 시야에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돌 제단 위,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에서 작은 꽃봉오리가 솟아났다. 푸른색 잎사귀 사이로 하얀 꽃잎이 수줍게 얼굴을 내밀더니, 진우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만개했다. 얇고 여린 꽃잎은 어둠 속에서도 신비로운 빛을 뿜어냈다.
“이게… 뭐야?” 사라는 경악한 표정으로 꽃을 바라봤다. “이런 건… 본 적 없어.”
진우도 할 말을 잃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아직도 희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붉은 광석의 힘이 그의 몸을 통해 흘러나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터어어엉!
멀리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였다. 진우는 즉시 라이플을 겨누며 주위를 살폈다.
“사라, 조심해.”
사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오빠… 저게 뭐야?”
터널 쪽에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진동이 점차 강해지더니, 이내 끔찍한 울음소리가 지하 공간을 뒤흔들었다. 빛을 싫어하는 변종들이 그들이 만들어낸 빛에 이끌려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쿠구궁!
철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놈은 문밖에서 그들을 감지한 듯했다. 진우는 석판을 움켜쥐었다. 붉은 광석이 다시 한번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그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점차 강렬해졌다.
쾅! 쾅! 쾅!
문이 터져나갈 듯 요동쳤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젠장, 이제 막 희망을 찾은 건가 했는데!’
그 순간, 진우의 눈에 제단 위에서 막 피어난 하얀 꽃이 들어왔다. 순식간에 꽃이 시들더니, 모든 생기를 잃고 회색빛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그 모든 에너지가 진우가 쥐고 있는 붉은 광석으로 흘러들어가는 듯했다.
진우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붉은 광석에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강력한 빛줄기가 터널 입구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끼이이이이익!
괴물이 비명을 질렀다. 끔찍하게 뒤틀린 소리였다.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방금 전의 공격은 대체…
“오빠… 저게 뭐야? 오빠가 한 거야?” 사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우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손에 쥐어진 붉은 광석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그 기운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밖은 조용해졌다. 괴물의 비명도, 무너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터널 쪽을 살폈다. 터널 벽 한쪽이 거대한 구멍으로 변해 있었다. 괴물은 형체도 없이 사라진 듯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수많은 붉은 눈동자들이 빛나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수십 개의 눈동자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방금 그들을 공격했던 괴물과 동족들이었다. 강력한 에너지의 분출이 그들을 더 많이 이끌어낸 것이 분명했다.
“젠장…” 진우는 이를 갈았다. “튀어야 해!”
그는 사라의 손을 잡고, 방금 들어왔던 통로를 통해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낡은 철문이 닫히는 순간, 진우는 마지막으로 붉은 광석을 바라봤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대의 힘이자, 어쩌면 이 절망적인 세계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희망일지도 몰랐다. 동시에, 그것은 예상치 못한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는 미지의 존재였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 위로, 알 수 없는 고대의 문양을 지닌 붉은 광석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단순한 희망이 아닌, 새로운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불꽃처럼 위태로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