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핏물 든 그림자 아래, 첫 속삭임
어둠이 제국의 낡고 거대한 수도, 벨리우스의 골목을 집어삼키는 시간이었다. 기름 냄새와 썩은 과일 냄새가 섞인 습한 공기가 숨통을 조였다. 검은 비가 며칠째 내린 탓에 골목 바닥은 끈적한 진흙으로 변했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황궁 시계탑의 음울한 종소리는 고통받는 이들의 절망처럼 축축하게 퍼져나갔다.
진우는 그림자가 가장 짙게 드리운 허름한 선술집 뒤편 벽에 등을 기댔다. 낡은 누더기 옷은 축축하게 몸에 달라붙었지만, 그는 추위보다 날카로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의 곁에는 그와 같은 처지의 그림자들이 여러 명 있었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타오르는 불씨 같았다.
“제국 놈들이 오늘 밤도 순찰을 돌았다지.”
낮고 거친 목소리가 어둠을 찢었다. 강 노인이었다. 그의 얼굴은 깊게 파인 주름으로 가득했고, 숱 없는 백발은 비에 젖어 더욱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큼은 이 도시의 어떤 젊은이보다도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진우에게 작은 쇳덩어리를 건넸다. 녹슨 칼날이었다.
“열흘 전, 펠라 마을에서 가져온 놈들이다. 대장간 놈들이 갈고 닦긴 했다만, 녹이 슨 마음까지 닦아줄 수는 없겠지.”
진우는 쇳덩어리를 받아들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안에서 묵직하게 느껴졌다. 이것 하나로 거대한 제국에 맞설 수 있을까.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이 작은 칼날들이 없다면, 그들은 영원히 짐승처럼 살다 죽을 뿐이었다.
저 멀리, 황궁의 첨탑들이 밤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그곳은 인간의 손으로 지었다고는 믿기지 않는 거대한 암흑이었다. 까마득한 높이, 기묘하게 뒤틀린 듯한 건축 양식, 그리고 햇빛마저 삼키는 듯한 검은 돌들은 늘 진우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특히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황궁의 가장 높은 첨탑에서 푸르스름한 섬광이 번뜩이는 것을 목격한 이들이 있었다. 그 빛은 벨리우스 전역에 섬뜩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다음 날이면 언제나 광기 어린 사건들이 벌어지곤 했다.
“오늘은 소득이 없었어. 황궁 감시병들의 경계가 더욱 삼엄해졌다.”
한 젊은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제도 여섯 명이 잡혀갔다더군. 광장에서 목이 잘렸어. 제국 놈들은 우리가 그저 벌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다른 이가 덧붙였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함께 체념이 스며 있었다. 제국은 백성들을 쥐어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백성들의 영혼마저 짓밟고,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다. 지난 수백 년간, 이 거대한 제국은 온 대륙을 무릎 꿇리고, 수많은 왕국과 문명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들의 이름은 공포 그 자체였다.
진우는 차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우리는 벌레가 아니다. 놈들이 잊고 사는 모양인데, 벌레도 한데 모이면 뱀을 찢어 죽일 수 있지.”
강 노인이 혀를 찼다. “뱀? 이 제국은 뱀 정도가 아니다, 진우. 놈들은… 아니, 놈들의 뿌리는 우리가 알던 그 어떤 생명체와도 다르다. 오래전부터 전해져오는 이야기가 있지 않느냐. 제국의 시조는 깊고 어두운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무언가와 피를 섞었다고.”
진우는 강 노인을 쳐다봤다. 그런 이야기는 많았다. 제국의 황제들은 수천 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왔다는 소문도 있었고, 황궁 깊은 곳에는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끔찍한 형상의 존재가 잠들어 있다는 속삭임도 있었다. 벨리우스의 주민들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꿈속에서 검고 거대한 촉수가 도시를 휘감고, 알 수 없는 언어로 된 주문이 귓가를 맴돈다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것은 단순한 악몽이 아니었다. 밤마다 황궁 첨탑에서 번뜩이는 섬광처럼, 도시 전체를 덮치는 차가운 진실의 편린이었다.
“놈들의 힘은 단순한 군사력이나 마법이 아니라는 뜻이오, 노인장?” 진우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호기심과 함께 깊은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강 노인은 진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마치 시간을 초월한 듯 깊고 무거웠다. “녀석들은… 우리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힘을 빌려 이 모든 것을 유지하고 있다. 황궁의 그 검은 돌들은 단순히 단단한 게 아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듯, 이 도시의 모든 비명과 절규를 흡수하고 있지. 그리고 흡수된 모든 것은…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되돌아온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멀리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제국 병사들의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저놈들이다! 잡았다!”
진우와 동료들은 일제히 몸을 숙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제국 병사들이 등불을 들고 골목을 샅샅이 뒤지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그들의 눈빛은 매섭고 냉혹했다. 놈들은 무고한 이들을 잡아가는 것을 스포츠처럼 즐겼다.
“강 노인,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진우가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손에 든 쇳덩어리 칼날이 희미하게 빛나는 듯했다. “놈들은 우리를 밟아 죽일 것이다. 심연의 존재에게 제물을 바치든, 악마와 계약을 했든 상관없다. 우리는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강 노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주름진 눈가에 이채가 서렸다. “결국 때가 왔군. 좋다. 계획대로 움직여라.”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불안에 흔들리지 않았다. 차오르는 분노와 결의가 그의 심장을 가득 채웠다. “내일 밤이다. 황궁 서쪽 벽에 있는 보급창을 노린다. 놈들이 심연의 존재에게 제물을 바치든 말든, 우리 배가 고픈 건 달라지지 않는다. 일단 식량을 확보하고, 우리의 존재를 놈들에게 알릴 것이다.”
병사들의 발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등불의 흔들리는 불빛이 진우의 얼굴을 스쳤다. 그는 동료들을 돌아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자, 어둠 속으로 흩어져라. 내일 밤, 우리는 심연의 그림자에 맞서 첫 번째 불꽃을 피울 것이다.”
그림자들이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진우는 마지막으로 황궁의 거대한 검은 첨탑을 올려다봤다. 그곳에서 알 수 없는 존재가 뿜어내는 듯한 냉기가 온몸을 감쌌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냉기가 진우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마음속에 차가운 불꽃을 지폈다.
이 거대한 제국, 이 심연의 그림자에 맞서 우리는 인간의 나약한 불꽃을 피울 것이다. 그리고 그 불꽃이 언젠가 이 모든 어둠을 태워버릴 것이다. 비록 그 대가가 무엇이든 간에.
진우는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발밑에서 빗물에 젖은 진흙이 질척거렸다. 그리고 멀리서, 황궁 첨탑의 섬뜩한 종소리가 다시 한번 밤하늘을 울렸다. 마치 이 거대한 도시의 모든 이들에게, 운명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알리려는 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