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금속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낡은 조종석에 몸을 우겨넣은 카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눅눅한 습기와 기름때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도, 그의 눈은 전면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밤하늘을 등진 채 거대한 그림자처럼 서 있는 제국군 보급기지. 희미하게 깜빡이는 감시등들이 마치 거인의 눈동자처럼 섬뜩하게 느껴졌다.
“카이, 들리나? 침투 경로 확보됐다. 전방 300미터 지점, 제7감시탑 사각지대.”
무전기 너머 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차분하지만, 그 속에는 얼음장 같은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미라는 이 반란군의 두뇌였다. 폐기된 제국군 통신 장비를 엮어 만든 그녀의 통신망이 없었다면, 우리는 진작에 제국의 발톱에 찢겨 죽었을 것이다.
“확인. 시야는 양호. 다만… 저 망할 ‘강철 거인’들이 문제야.”
카이의 손가락이 조종간 위에서 가볍게 떨렸다. 창밖으로 언뜻 보이는 제국군 표준형 강철 거인의 실루엣. 저 육중한 장갑과 위압적인 포탑은, 우리 ‘야수’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살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야수’들은 말 그대로 쓰레기더미에서 부품을 긁어모으고, 버려진 잔해를 용접해서 겨우 가동시키는 기체들이었다.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 보급품은 반드시 확보해야 해. 더 이상 버틸 식량이 없어. 연료도 바닥이고.”
미라의 목소리에 일말의 흔들림이 감지됐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뜻이었다. 지난달, 제국군에 의해 아지트가 발각되면서 우리는 겨우 몸만 피신해야 했다. 남은 건 폐허가 된 보급창과 굶주린 동료들뿐. 이번 임무는 생존 그 자체와 직결되어 있었다.
“걱정 마. 늘 해오던 대로 처리할게.”
카이는 애써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 모든 상황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매번 임무에 나설 때마다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은, 그의 기체 ‘밤도깨비’의 낡은 조종석에 그를 묶어두고 있었다.
**위이잉-**
야수 특유의 엔진음이 낮게 울렸다. 조용히, 그림자처럼 보급기지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기체에 덕지덕지 붙은 녹슨 장갑들이 덜컹거렸지만, 훈련된 카이의 조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는 이 폐품 같은 기체를 제 몸처럼 다룰 수 있었다.
“전방 11시 방향, 제국군 순찰조다. 강철 거인 한 대, 지원 병력 셋.”
미라의 경고가 귓가를 스쳤다. 카이의 눈이 스크린 위로 빠르게 움직였다.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제국군 강철 거인의 둔중한 움직임. 저들은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기계였다. 예측이 가능했다.
“잠시 매복. 그림자 지역으로.”
카이는 기체를 능숙하게 나무들 사이로 숨겼다. 울퉁불퉁한 외형이 주변의 덤불과 어우러져 완벽한 위장막을 형성했다. 야수들의 장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제국군의 정교함에 비해 투박하고 거칠지만, 그만큼 지형에 대한 적응력이 높고 기습에 특화되어 있었다.
**쿠우우웅… 쿠우우웅…**
강철 거인의 발소리가 땅을 울렸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다가오는 듯한 진동이 조종석까지 전해졌다. 카이는 숨을 죽였다.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강철 거인의 육중한 다리가 마치 자신을 밟아버릴 것만 같았다. 스크린에 가깝게 다가온 제국군의 문양이 섬뜩하게 빛났다. 독수리가 발톱으로 세계를 쥐고 있는 듯한 문양. 제국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지나간다… 좋아.”
미라의 안도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카이는 조용히 기체를 움직였다. 목표 지점까지 이제 절반. 하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이 보급기지는 미로 같았다. 한 번 길을 잘못 들면, 그대로 제국군의 덫에 걸릴 수도 있었다.
“좌측으로 크게 돌아가. 경비가 약한 후방 통로를 이용해야 해.”
“알았어.”
카이는 미라의 지시에 따라 기체를 회전시켰다. 그때였다.
**삐이이이-!**
날카로운 경보음이 조종석을 가득 채웠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스크린에 붉은색 경고등이 번쩍였다.
‘탐지됨! 적 감지!’
어떻게?! 카이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완벽한 은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카이! 도망쳐! 제국군 강철 거인 셋이 너를 포위했다!”
미라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찢어졌다. 스크린에는 이미 세 대의 강철 거인이 자신을 조준하고 있는 모습이 잡혔다. 거대한 포신들이 섬뜩하게 빛났다.
젠장, 신형 탐지기인가?!
“젠장, 젠장! 빌어먹을!”
카이는 무의식적으로 조종간을 잡아당겼다. ‘밤도깨비’는 급하게 기수를 틀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콰아앙!**
섬광이 터졌다. 충격이 기체를 강타했다. 낡은 장갑이 찢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조종석이 흔들리고, 스크린이 지지직거리며 일그러졌다.
“크윽!”
카이는 비명과 함께 몸을 웅크렸다. 팔뚝에 박힌 파편들이 따끔거렸다. 고통보다 더 큰 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아니, 여기서 죽으면 동료들은…
“카이! 정신 차려! 3번 기체 다리 쪽에 균열이 보인다! 약점이야!”
미라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날카롭게 박혔다. 카이는 고통을 참고 스크린을 노려봤다. 일그러진 화면 너머로, 자신을 공격한 강철 거인의 다리 부분에 희미하게 균열이 보였다. 저건… 낡은 부품을 재활용한 흔적. 제국군도 완벽한 기체만 쓰는 건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래… 좋아!”
카이의 눈이 번뜩였다. 죽기 살기로 덤비는 쥐가 고양이를 물 수도 있다는 걸, 제국 놈들에게 보여줘야 했다. ‘밤도깨비’는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위이잉- 콰아앙!**
카이는 기체의 모든 출력을 다리 균열을 향해 쏟아부었다. ‘밤도깨비’의 주무장인 구형 플라즈마 캐논이 굉음을 내며 불을 뿜었다. 낡은 캐논은 이미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마지막 힘을 짜냈다.
**쉬이이이잉-! 콰콰쾅!**
플라즈마탄이 정확히 강철 거인의 다리 균열에 명중했다. 약점을 파고든 공격은 예상 이상의 피해를 입혔다. 금속이 찢어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강철 거인의 육중한 다리가 비틀거렸다. 거대한 기체가 균형을 잃고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명중이다! 잘했어 카이!”
미라의 희망 섞인 외침이 들렸다. 하지만 기뻐할 틈도 없었다. 남은 두 대의 강철 거인이 더욱 거세게 공격을 퍼부어왔다. 레이저 포탄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젠장, 둘 다 나를 노려!”
카이는 필사적으로 기체를 움직였다. 낡은 야수는 기합이라도 하는 듯 삐걱거렸다. 좁은 보급기지 안, 빽빽하게 들어선 컨테이너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비집고 들어갔다. 제국군 강철 거인들은 육중한 덩치 때문에 좁은 공간에서 기동하기 어려웠다. 바로 이것이 카이가 노리던 점이었다.
“미라! 후퇴 경로 있나?! 이대로는 포위될 거야!”
“지금… 통로를 검색하고 있다! 버텨줘 카이!”
스크린이 연신 붉은색 경고를 뿜어냈다. ‘밤도깨비’의 장갑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언제 기능이 정지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 카이는 이를 악물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멈추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동료들의 굶주린 눈빛, 이 제국에 짓밟힌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푸슉- 콰직!**
갑자기 ‘밤도깨비’의 한쪽 팔 부분이 무언가에 걸렸다. 강철 거인의 거대한 손이 ‘밤도깨비’의 팔을 붙잡은 것이었다.
“젠장! 잡혔어!”
육중한 힘에 기체가 들렸다. 낡은 기체는 힘없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다른 강철 거인의 포신이 자신을 향해 빠르게 조준되는 것이 보였다. 이제 끝인가.
그때였다.
“카이! 오른쪽 3시! 탈출 경로 발견!”
미라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외쳤다. 카이의 눈은 순간적으로 빛났다. 오른쪽 3시 방향, 컨테이너들이 엉망으로 쌓여 있는 사이로 겨우 기체 한 대가 빠져나갈 만한 틈이 보였다. 저곳으로!
“놓치지 않을 거야!”
카이는 있는 힘껏 조종간을 잡아당겼다. ‘밤도깨비’의 팔을 잡고 있던 강철 거인이 움찔했다. 카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모든 출력을 팔다리로 돌려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낡은 기체에서 삐걱거리는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아아앙!**
결국 잡혀 있던 팔 부분이 찢어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밤도깨비’는 강철 거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 대가는 컸다. ‘밤도깨비’의 한쪽 팔이 너덜너덜하게 뜯겨 나간 것이다. 조종석에 경고등이 미친 듯이 울렸다.
“젠장! 팔이…!”
“상관없어! 당장 빠져나와! 다른 강철 거인들이 널 향해 달려오고 있어!”
미라의 목소리는 카이를 재촉했다. 팔이 뜯겨나가면서 균형을 잡기 어려웠지만, 카이는 이를 악물고 기체를 좁은 틈새로 밀어 넣었다. 거대한 강철 거인들은 좁은 틈을 통과하지 못하고, 그저 레이저만 쏘아댈 뿐이었다.
**쉬이이잉- 콰앙!**
기체 뒤쪽에서 폭발음이 연이어 터졌지만, ‘밤도깨비’는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좁은 통로를 벗어나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예상치 못한 풍경이었다. 보급기지의 외곽, 하지만 그곳은 마치 버려진 공장 지대처럼 낡고 녹슨 건물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딩-딩-딩-!**
새로운 경고음이 조종석을 가득 채웠다. 이번에는 ‘미확인 기체 감지’라는 문구였다.
카이는 숨을 들이켰다. 저건 또 뭐야?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군의 강철 거인과는 다른, 훨씬 더 거대하고 위압적인 실루엣. 등에는 거대한 포대가 달려 있고, 육중한 다리가 마치 전차의 궤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저건… 제국군에서도 극소수만 운용한다는 전략 병기, ‘궤도 강습병’이었다.
“미라! 저건…!”
카이의 목소리가 공포에 질려 떨렸다. 보급품을 훔치러 온 침투 임무에, 저런 괴물이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젠장… 카이… 도망쳐! 저건 네가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미라의 목소리가 절규처럼 터져 나왔다. 궤도 강습병의 거대한 포대가 느리지만 확실하게 ‘밤도깨비’를 향해 조준되기 시작했다.
카이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거대한 뱀에게 홀린 작은 생쥐처럼, 공포에 사로잡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거대한 포신이 섬뜩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굉음과 함께 섬광이 세상을 집어삼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