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제1장. 망한 프리랜서 고고학자의 고군분투

“망했다.”

서울 변두리, 낡은 오피스텔의 비좁은 원룸 한구석에서 한가람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곰팡이 핀 벽지에는 큼직한 세계 지도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그 위에는 붉은색 마커로 알 수 없는 점들이 빼곡했다. 그 점들은 죄다 ‘가람이의 발굴 프로젝트(망함)’라는 비극적인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이번 달 월세도 밀렸는데….”

그녀의 눈앞에는 온갖 고문헌과 지도, 발굴 보고서들이 엉망진창으로 쌓여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리랜서 고고학자의 길을 걷겠다고 야심 차게 선언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의뢰는커녕 관심조차 받기 힘든, 한물간 전설이나 파고드는 백수 신세였다.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한가람의 시선이 머문 곳은 낡은 태블릿 화면이었다. ‘한반도 고대 문명 재발견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이름의 크라우드 펀딩 페이지. 현재 모금액은 ‘0원’이었다. 좋아요는 딱 하나, 그녀 스스로 누른 것이었다.

“젠장, 내가 이럴 줄 알고 고구마 캐기 알바도 했지.”

어제 발굴 현장에서 고구마를 캐다 온 여파로, 온몸이 쑤셨다. 고고학자의 ‘고’ 자도 꺼내기 민망한 신세였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누구도 믿지 않는, 그러나 심장이 쿵쿵 뛰는 비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다는 전설의 지하 유적, ‘비밀의 심장’이었다. 고문헌 속에서 흘러나오는 단편적인 기록과 지도 조각들을 수십 년간 쫓아온 결과, 그녀는 확신했다.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곳에 엄청난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음? 이게 뭐지?”

좌절감에 빠져 멍하니 태블릿 화면을 넘기던 중, 그녀의 눈에 낯선 이메일 하나가 들어왔다. 발신자는 ‘고미술협회 익명 제보’. 평소 스팸메일로 가득한 메일함에 이런 제목은 흔치 않았다.

[제목: 귀하의 연구에 관심을 표합니다.]
[내용: 한가람 고고학자님, 귀하의 ‘비밀의 심장’ 연구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흥미롭군요. 며칠 뒤 열릴 고미술 경매에 참고할 만한 유물이 나올 예정이니, B동 7층 보관소의 ‘초본 27번’ 자료를 확인해 보십시오. 단, 그 자료는 이미 ‘류진하’ 박사가 열람 예약한 상태입니다. 신중을 기하십시오.]

“류진하?”

한가람의 미간이 순간 찌푸려졌다. 류진하. 그 이름은 고고학계의 별이자, 그녀와는 극과 극의 인생을 사는 남자였다. 젊은 나이에 최고 명문 대학교의 최연소 교수가 되었고, 유력 재단의 후원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스타 학자. 학계에서 그의 말 한마디는 법이었고, 그의 손길이 닿는 유물은 곧 국보급으로 격상되는 기현상까지 벌어졌다. 무엇보다 그는 ‘비밀의 심장’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유사 고고학’이라며 코웃음 치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왜 ‘초본 27번’을 예약했을까?

“설마… 나랑 같은 걸 노리는 건 아니겠지?”

한가람은 류진하가 그 유적에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분명 뭔가 오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초본 27번’이 대체 무엇이기에, 익명의 제보자는 하필 그를 언급했을까? 궁금증이 그녀의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좋아, 한번 가보자! 내 밥줄이 걸린 문제라고!”

월세도 밀린 신세였지만, 잃을 것 없는 그녀에게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그녀는 며칠 만에 고물 스쿠터를 타고 고미술협회 건물로 향했다. 협회 건물은 으리으리했다. 유리와 철골로 이루어진 현대적인 건물은, 그녀의 낡은 티셔츠와 찢어진 청바지 차림과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저… 초본 27번을 열람하고 싶어서요.”

B동 7층, 고미술협회 보관소는 고요하고 엄숙했다. 쾌적한 온도와 습도 조절 시스템 속에서 수많은 고문헌과 유물들이 잠들어 있었다. 담당 직원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약하셨습니까? 초본 27번은 류진하 교수님께서 이미 오늘 열람 예약하셨습니다만.”

“아, 네! 알고 있습니다. 그전에 잠시… 혹시 제가 미리 좀 볼 수 있을까요? 아주 잠깐이면 되는데….”

한가람은 애써 싹싹한 미소를 지으며 부탁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제발, 제발.

“규정상 어렵습니다. 류 교수님은 곧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철벽이었다. 한가람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역시, 세상은 류진하 편이었다. 괜히 익명 제보를 믿고 이 비싼 교통비를 들여 온 게 후회스러웠다.

그때, 등 뒤에서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예약한 자료를 기다리는 중이신가 봅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 한가람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바로 그 남자였다. 류진하.
그는 완벽하게 재단된 고급 수트를 입고, 흐트러짐 없는 머리칼과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 있었다. 마치 방금 화보 촬영을 끝내고 온 듯 비현실적인 외모였다. 쨍한 조명 아래 그의 얼굴은 더욱 빛이 났다. 재수 없게 잘생겼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한가람은 너무 놀란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왈칵 쏟을 뻔했다. 컵을 움켜쥐다 그만 손이 미끄러졌다.

“어어…!”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그의 반짝이는 구두 위로, 그리고 완벽한 수트 바지 위로 촤아악 쏟아졌다.

순간, 보관소 안에 정적이 흘렀다. 담당 직원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고, 류진하의 완벽했던 얼굴에는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한가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망했다. 이번에는 정말 망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너무 놀라서….”

한가람은 허둥지둥 손수건을 꺼내려고 했지만, 주머니에는 손수건 대신 구겨진 영수증과 낡은 사탕 껍질만 나왔다. 그녀는 더듬더듬 휴지를 찾았다.

류진하는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의 젖은 바지를 내려다봤다. 커피는 그의 발목을 타고 흘러 구두 안에 스며들고 있었다. 이 비싼 구두에. 그리고 이 명품 수트에.

“괜찮으십니까, 교수님!” 직원이 호들갑을 떨며 달려왔다.

류진하는 고개를 들어 한가람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깊은 곳에 묘한 흥미가 스치는 듯했다.

“한가람 씨… 맞으시죠?”

그의 목소리는 낮고 위압적이었다. 한가람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니. 나름 학계의 이단아로 알려진 덕분인가? 아니면 오늘 일을 미리 보고받았나?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네, 네. 맞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세탁비는… 아니, 새 구두라도 사드릴게요!”

그녀는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 비스듬한 조소가 걸렸다.

“구두는 됐습니다. 그보다… 제가 예약한 자료를 미리 보려 했다고 들었는데.”

류진하의 시선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한가람은 움찔했다.

“그게 아니라… 저도 봐야 할 중요한 자료라서요. ‘비밀의 심장’에 대한 단서일 수도 있거든요!”

그녀는 애써 당당하게 말했다. 류진하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비밀의 심장이라… 여전히 그런 허무맹랑한 연구를 하시는군요. 전 또 다른 건 줄 알았는데.”

비웃음이었다. 한가람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 남자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녀의 열정을 조롱하고, 그녀의 연구를 무시했다.

“허무맹랑하다니요! 교수님이야말로 왜 제보받은 자료를 보러 오셨습니까? ‘초본 27번’에 ‘비밀의 심장’ 단서가 있다는 말에 오신 것 아닙니까?”

그녀는 발끈했다. 류진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순간 그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냉정함을 되찾았다.

“제보? 저는 그저 이 경매에 나올 유물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러 온 것뿐입니다. 한가람 씨처럼 ‘있지도 않은’ 전설에 매달리는 시간 낭비는 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리고 직원에게 말했다.

“초본 27번을 준비해 주십시오. 그리고… 여분의 수트를 부탁드립니다.”

그는 한가람에게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돌아서서 보관실 입구로 걸어갔다. 한가람은 그제야 직원의 눈총을 받으며 문밖으로 쫓겨나다시피 나왔다. 억울함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젠장, 저 재수 없는 인간! 꼭 내가 먼저 ‘비밀의 심장’을 찾아서 코를 납작하게 해줄 거야!”

그녀는 고미술협회 건물을 벗어나며 주먹을 꽉 쥐었다. 비록 오늘은 완벽한 패배였지만, 그녀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오히려 류진하라는 예상치 못한 라이벌의 등장은 그녀의 심장에 다시 불을 지폈다.

“초본 27번… 분명 뭔가 있을 거야.”

그녀는 익명 제보자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류진하의 마지막 표정. 그 미세한 흔들림이 그녀의 촉을 자극했다. 그는 ‘비밀의 심장’에 관심이 없는 척했지만, 분명 무언가 숨기고 있었다.

한가람은 고물 스쿠터에 올라탔다. 기름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는 이제 방향을 알았다.

“그래, 바로 여기야! 이번엔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

그녀는 낡은 태블릿에 저장된 지도 조각을 다시 한번 확대했다. 익명 제보자의 메일을 토대로, 그리고 류진하의 수상한 행동을 근거로, 그녀는 ‘초본 27번’이 가리키는 곳을 추측했다. 지도의 한 지점에 붉은색 마커로 힘주어 표시했다.

그곳은, 지도상으로는 폐쇄된 국립공원 부지이자, 구불구불한 산맥 깊숙이 숨겨진, 아무도 발길 닿지 않은 곳이었다.

그래, 이번에는 기필코 ‘비밀의 심장’을 찾아내고 말겠어! 그리고 류진하, 그 빌어먹을 재수 덩어리에게 내 실력을 보여줄 기회도 될 거야! 한가람의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그녀의 심장이,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금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달랑 2만 원이 전부였지만, 그녀는 이미 모험을 시작하고 있었다.

낡은 스쿠터의 엔진이 굉음을 내며 시동을 걸었다. 한가람은 거친 바람을 맞으며 도시를 벗어나 산속으로 향했다. 그녀의 뒤로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