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컬트 호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차가운 돌 틈새를 비집고 스며든 붉은 달빛이 고대 경기장의 한복판을 기묘하게 비췄다. 낡은 석벽에 걸린 횃불은 꺼진 지 오래였고, 오직 저 피 같은 달만이 이 지독한 결투의 증인처럼 하늘에 매달려 있었다. 경기장은 침묵했다. 아니, 침묵 속에 잠겨있던 것은 관객이 아니라, 이 무거운 공기 그 자체였다. 숨통을 조이는 듯한 긴장감이 돌바닥을 기어 다니는 그림자처럼 춤추고 있었다.

결승으로 가는 마지막 길목, 준결승의 두 번째 대결.

현우는 경기장 가장자리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 서서 손에 땀을 쥐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노인의 얼굴을 한 괴물이 있었다. 백산. 그의 이름은 이미 이 거대한 대회의 시작부터 기이한 소문과 함께 회자되었다. 그가 싸울 때마다 경기장은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 찼고, 그의 상대는 항상 육체적 상처보다 더 깊은, 설명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무너졌다.

오늘 그의 상대는 무림의 의인(義人)이라 불리는 철웅이었다. 굳건한 바위 같은 사내. 한평생 무도에 정진하며 강호를 수호했던 거목. 그의 주먹은 쇠를 부수고 바위를 가르는 힘을 지녔다고 전해졌다.

“자네는…”

철웅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공기가 그의 내면을 짐작하게 했다.

“…인간의 무공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 듯하군.”

백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비틀린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붉은 달빛을 받아 번뜩였는데, 마치 깊은 늪 바닥에서 올라온 불빛 같았다.

“어둠의 힘을 빌려 이 대회에 나선 것이라면,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철웅의 목소리가 한층 단단해졌다. 그의 전신에서 푸른 기운이 솟아올랐다. 정통 무공의 정수, 강철 같은 의지로 다져진 내공이었다. 경기장의 칙칙한 공기가 그의 기운 앞에 잠시 물러서는 듯했다.

백산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늙은이의 것처럼 쉬고 갈라졌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용서? 너희 인간들이 감히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이냐? 이 세상은… 이미 용서받을 가치조차 없는 곳인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산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꿈틀거리는 그림자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의 자세는 흐트러진 듯 보였으나, 현우의 예리한 눈에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유연함으로 다가왔다.

콰아앙!

철웅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발길질은 대지를 뒤흔들었고, 그의 주먹은 벼락처럼 백산을 향해 쇄도했다. 파공음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경기장을 갈랐다. 무형의 기운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하지만 백산은… 거기에 없었다.

철웅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을 때, 백산은 이미 그의 등 뒤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느려터진 무공이로군.”

백산의 손이 철웅의 어깨에 닿았다. 그 순간, 현우는 섬뜩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마치 백산의 손이 닿는 곳마다 생기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 실제로 철웅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푸른 기운이 삽시간에 옅어지는 것이 보였다.

철웅은 놀라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의 팔꿈치가 백산의 얼굴을 향해 꺾여 올라갔다.

챙!

기이한 소리가 났다. 뼈와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쇠붙이가 마찰하는 듯한, 날카로운 금속음이었다. 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백산은 자신의 손등으로 철웅의 팔꿈치를 막아냈다. 그의 손등 피부가 마치 굳건한 비늘처럼 단단해 보이는 것은 착시일까?

“크윽…!”

철웅의 얼굴에 고통이 스쳤다. 백산의 손은 단순한 방어가 아니었다. 흡수였다. 철웅의 기운이, 그의 힘이, 백산의 비틀린 손아귀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철웅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것은… 요술이렷다!”

철웅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주먹에서 다시 한번 강력한 내공이 터져 나왔다. 백산을 강하게 밀어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백산은 그저 차가운 미소를 지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한 발짝 더 철웅에게 다가섰다.

백산의 두 눈이 빛났다. 그 순간, 현우는 경기장 전체가 비틀리는 듯한 환각을 느꼈다. 붉은 달빛마저 일렁이며 흔들리는 것 같았다. 백산의 등 뒤에서 검고 흐릿한 형체가 피어오르는 것을 현우는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형체가 없는 연기 같으면서도, 동시에 수천의 눈을 가진 괴물의 실루엣 같기도 했다.

“진정한 힘은… 너희의 고루한 무공 따위가 아니다.”

백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한기가 현우의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 모든 절망이 응축된… 심연의 힘이다.”

검은 연기 같은 형체가 백산의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백산의 손톱이 마치 짐승의 발톱처럼 길게 자라나며 검은 빛을 띠었다. 그 손이 철웅의 심장을 향해 느리지만, 거부할 수 없는 속도로 뻗어 나갔다.

“더러운 마물! 감히 내 앞에서…!”

철웅은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그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터져 나오며 주변의 돌들을 산산조각 낼 기세였다. 온몸의 내공을 한 점에 모아, 백산을 소멸시킬 단 일격을 날리려 했다. 그는 기어코 이 사악한 존재를 이곳에서 꺾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눈에 담고 있었다.

하지만 백산은 이미 한 발 앞서 있었다.

백산의 검은 손톱이 철웅의 가슴에 닿았다. 깊이 파고들지도 않았다. 그저 표면에 스치는 듯한 접촉이었다.

순간, 철웅의 몸이 굳어버렸다. 그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던 강철 같은 의지가 사라지고, 대신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스며들었다. 그의 육신은 멀쩡했지만, 그의 영혼이 꿰뚫린 듯한 끔찍한 비명을 현우는 들었다. 비록 소리 없는 비명이었지만, 현우의 뇌리를 찢어발기는 듯한 섬뜩함이었다.

철웅의 푸른 기운이 삽시간에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내공이, 그의 삶이 백산에게 흡수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수십 년은 더 늙어버린 듯, 깊은 주름이 패였다. 그의 육체는 서서히 말라붙어 갔다.

“네놈… 도대체… 무엇이냐…”

철웅의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 그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고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죽어가는 자의 절규였다.

“나는… 심연의 목소리를 듣는 자.”

백산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철웅의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 너희의 운명을 결정할 자.”

털썩!

철웅의 거대한 육체가 무너져 내렸다. 그는 쓰러진 순간에도 눈을 감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공포와 절망이 가득했다. 그의 몸은 그대로 굳어 버린 채, 마치 수백 년 된 미라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경기장은 완벽한 침묵 속에 잠겼다. 붉은 달빛은 여전히 백산을 비추고 있었고, 그의 그림자는 기이하게도 더욱 길게 늘어져 경기장을 뒤덮는 듯했다.

현우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심장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저것은 무공이 아니었다.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저 노인이 품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의 운명을 좌우할 힘을 넘어, 세상 자체를 삼켜버릴 듯한 심연의 공포였다.

백산은 승자였다. 이제 그는 결승으로 향한다.

그리고 현우는, 그 백산을 결승에서 막아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현우는 자신의 심장을 옥죄어오는 섬뜩한 예감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저 괴물을, 과연 인간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을까?
현우의 등 뒤에서, 차가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핏빛 달 아래, 저 심연이 현우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그의 다음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