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첫 번째 단서, 그리고 재수 없는 만남

나는 차혜린. 어엿한, 아니, 어엿하다고 우기고 싶은 스물아홉 살의 백수… 아니, 프리랜서 역사 고증 전문가 지망생이다. 현 실상은? 폐관 직전의 동네 박물관에서 주 3일 파트타임으로 먼지 구덩이와 씨름하며 내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오늘도 그랬다. 낡은 진열장 속 곰팡이 핀 석기 시대 유물 모형을 닦던 중이었다. 내 꿈은 고대 문명의 잃어버린 흔적을 찾아 세상에 알리는 건데, 현실은 유물 모형의 먼지를 닦으며 한숨만 쉬는 신세라니.

“크흠, 크흠! 여사님, 오늘도 열정이 넘치시네요.”

관장님의 목소리였다. 여사님이라니. 이 박물관에서 나 말고 다른 여자가 없으니 그냥 나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닳아빠진 체크무늬 남방 차림의 박관장님은 늘 손에 식혜 캔을 들고 나타났다.

“관장님, 관장님은 제게 늘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죠. ‘열정’은 아니고 ‘생계’라고요, 이건.”

나는 마른 걸레로 낡은 토기 모형을 벅벅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에이, 젊은 친구가 벌써부터 비관적이기는. 자, 마침 잘 됐다. 오늘 택배가 하나 왔는데 말이야, 보낸 사람이 없어. 주소도 엉뚱하고. 뭘까 이거.”

관장님은 식혜 캔을 옆구리에 끼고 꾸깃한 상자를 내밀었다. 겉은 낡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나무 상자였다. 흠집투성이지만 그 자체로 오랜 세월을 견딘 듯한 깊이가 느껴졌다.

“보낸 사람이 없다고요?”

나는 상자를 받아들었다. 예상보다 묵직했다. 뚜껑에는 풀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알 수 없는 문양과,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이한 형태의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열쇠구멍은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응. 일단 너 전문 분야 아니냐? 이런 미스터리한 거. 열쇠도 없고… 억지로 열다가 망가지면 곤란하고.”

관장님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진열장 너머의 토기 모형을 흘끗 보았다. 그가 말하는 ‘전문 분야’란, 내가 가끔 박물관 자료실에 짱박혀 동네 전설이나 고문서 같은 걸 뒤적거리는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딱히 전문 분야라기보다 취미였다.

“어디 보자…”

나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특히 이 자물쇠. 어디서 봤더라? 머릿속 깊은 곳에서 희미한 기억이 스쳤다.

그때였다. 상자의 아랫면을 돌려 본 순간, 작은 종이가 한 장 떨어졌다. 낡고 바스락거리는 양피지 재질이었다. 펼쳐보니 손으로 그린 듯한 조악한 지도 한 장과, 그 밑에 고대 문자로 보이는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지도 한가운데 붉은색으로 표시된 작은 점. 그 점 아래로는 낯익은 듯 낯선 글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속삭임의 지하 도시.’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속삭임의 지하 도시? 이 이름은… 내가 몇 년 전, 지역 설화를 조사하다 우연히 발견했던 아주 희미한 기록에만 존재하던 이름이었다. 전설 속에서만 언급되던, 땅속 깊이 잠들어 있다는 미지의 도시. 그 기록은 워낙 파편적이고 허황된 내용이라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나조차도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로 치부하고 잊고 있었다.

“관장님! 이거… 이거 진짜 이상해요!”

내 목소리가 상기되어 떨렸다.

“왜 그래, 왜? 또 뭐 괴물이라도 나왔어?”

관장님은 언제나처럼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나는 흥분해서 지도를 내밀었다. “이 지도… 그리고 이 문구! ‘속삭임의 지하 도시’요! 제가 예전에 조사했던 전설 속에 나오는 그 도시 이름이에요! 이건 그냥 허풍이 아닐지도 몰라요!”

관장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속삭임? 에이, 설마. 그런 걸 누가 믿어. 옛날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겠지.”

하지만 나는 믿었다.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 상자는, 이 지도는 분명 뭔가 특별했다. 어쩌면 내 평생의 꿈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때였다. 낡은 상자 뚜껑의 자물쇠가 ‘딸깍’ 하고 가볍게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도 모르게 떨어뜨린 양피지 지도 아래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색 금속 물체가 굴러 나왔던 것이다.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묵직하고 차가운 느낌의 열쇠였다. 그 열쇠의 손잡이 부분은 정확히 아까 내가 봤던 자물쇠의 홈과 일치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집어 들고, 자물쇠에 끼워 살짝 돌렸다. 낡은 자물쇠는 아무런 저항 없이 스르륵 열렸다.

상자 안에는, 맙소사. 또 다른 상자, 아니, 좀 더 정교하게 만들어진 나무 함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함 위에는, 누군가 고의적으로 올려놓은 듯한, 검은 벨벳 파우치 하나가 놓여 있었다. 파우치를 열자, 그 안에서 빛바랜 종이 한 장과 함께, 영롱한 빛을 내는 작고 둥근 돌멩이 하나가 나왔다. 돌멩이는 차가우면서도 묘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종이에는 단 두 줄의 문장이 붓글씨로 적혀 있었다.

*“길은 감춰져 있지만, 빛이 길을 찾을 것이다.”*
*“오래된 지혜는 새로운 눈을 기다린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 모든 것이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무대 같았다. 속삭임의 지하 도시, 잃어버린 유적, 그리고 나를 이끄는 듯한 이 수상한 물건들.

나는 그날 밤,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했다. ‘속삭임의 지하 도시’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다시 끄집어내 밤새워 연구했다. 지도를 해독하고, 문자를 분석하고, 모든 조각을 맞춰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도가 가리키는 첫 번째 지점을 알아냈다. 오래 전 폐쇄된, ‘중앙 고대 연구소’의 제3 발굴 보관 시설.

다음 날 아침, 나는 잔뜩 들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박물관에 사표를… 아니, 잠깐 외근 나간다고 둘러대고 홀로 길을 나섰다. 어차피 관장님은 내가 자료실에 틀어박혀 고서적과 씨름하든, 유물 모형의 먼지를 닦든 신경 쓰지 않으실 분이었다.

낡은 버스에 몸을 싣고 한 시간여를 달린 끝에, 지도에 표시된 위치에 도착했다. 우거진 숲 속에 파묻히듯 서 있는 낡은 건물 한 채. 건물은 오래전에 버려진 듯,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창문은 깨져 있었고, 녹슨 철문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것만 같았다.

“와, 정말 이런 곳에 뭐가 있다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괜히 왔다 싶기도 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발걸음을 옮겼다.

철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은 예상대로 컴컴하고 눅눅했다. 손전등을 켜자, 거대한 먼지 구덩이와 거미줄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방에는 낡은 발굴 도구들과 먼지 쌓인 상자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공간 같았다.

나는 지도를 펼쳐 들고 건물 안을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발자국 소리가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졌다. 지도에 표시된 지점은 건물 지하에 있는 보관고 중 하나였다. 벽에 붙은 낡은 안내판을 따라 층계를 내려갔다.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가워지고 습해졌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침내, 지도에 표시된 보관고 문 앞에 섰다. 낡은 나무 문에는 굵은 쇠사슬이 감겨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쪽지 하나가 너덜거리고 있었다.

*‘함부로 들어가지 마시오. 위험.’*

식상한 경고문이었지만, 괜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려고 했다. 쇠사슬이 묵직하게 나를 가로막았다.

“젠장, 쇠사슬이라니!”

나는 손전등으로 주변을 비추며 쇠사슬을 끊을 만한 도구가 없나 찾아보았다. 물론, 내게 그런 걸 들고 다닐 준비성은 없었다. 나는 그저 역사적 발견의 꿈에 부풀어 무작정 달려온 얼치기 모험가였으니까.

그때였다.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문만 보고 있으면, 문이 저절로 열릴 줄 아나?”

화들짝 놀란 나는 몸을 움찔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짙은 회색빛 코트를 걸친 그는 늘씬한 키에, 그림자 속에서도 돋보이는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녔다. 삐딱하게 걸쳐진 안경 너머로 비치는 눈빛은 날카롭고 무심했다.

“누, 누구세요? 여긴 어떻게…?”

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이 으스스한 곳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다니.

남자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비웃듯이 말했다. “그건 내가 할 질문 같은데. 어설픈 탐험가 나리께서 여기까지 무슨 일로 행차하셨나?”

탐험가 나리라니!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투였다. 나는 불쾌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쪽이야말로 누구세요? 남의 일에 참견 마시죠!”

“남의 일?” 남자는 실소를 터뜨렸다. “여긴 분명 나의 발자국이 먼저 닿은 곳인데. 그리고… 재미있군. 그 손에 들린 것.”

그의 시선은 내가 들고 있던 양피지 지도를 향해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지도를 등 뒤로 숨겼다.

“뭘 보신다는 거죠? 아무것도 안 들었는데요!”

어설픈 변명에도 남자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자국 더 다가오며 말했다.

“‘속삭임의 지하 도시’… 그 오랜 전설을 쫓아온 건가? 꽤나 무모하군. 이 박물관 파트타임 직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모험 같은데.”

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어떻게 내 정체를 아는 거지?

“당신, 뭐야? 혹시 이 근처 박물관에서 스파이라도 보낸 거예요? 아니면… 그 소포 보낸 사람?”

나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갑자기 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묵직한 검은색 금속 열쇠가 들려 있었다. 내가 가진 열쇠와 정확히 똑같은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 열쇠보다 더 빛나고 정교해 보였다.

“이것 말인가?” 그가 말했다. “이거라면… 그 쇠사슬쯤은 쉽게 풀 수 있지.”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가진 열쇠는 분명… 내가 받았던 그 상자에서 나온 열쇠와 같은 종류였다. 아니, 설마, 저 사람이 그 열쇠를 원래 가지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 나처럼 어딘가에서 얻은 걸까?

“당신… 그 열쇠를 어디서 구했어요? 똑같아! 내가 가진 거랑!”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상황이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남자는 피식 웃더니, 열쇠를 쥔 채 쇠사슬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망설임 없이 열쇠를 쇠사슬의 잠금장치에 밀어 넣었다. ‘딸깍’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낡고 녹슨 쇠사슬이 거짓말처럼 스르륵 풀렸다.

그리고 그는 굳게 닫혀 있던 나무 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활짝 열었다.

어둠 속에서, 퀴퀴한 먼지 냄새와 함께 섬뜩한 냉기가 훅 밀려들어 왔다. 문 너머는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어둠과, 낡고 거대한 돌덩이들로 가득한 미지의 공간이었다.

“자, 어설픈 탐험가 나리.” 남자가 싸늘하게 말했다. “첫 번째 관문은 열렸다. 이제 들어가 볼까? ‘속삭임의 지하 도시’로.”

나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열어젖힌 문 너머로, 내 심장을 파고드는 전율과 함께 미지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망설일 틈도 없이, 나는 홀린 듯 그의 뒤를 따랐다. 어쩌면 이 재수 없는 남자와 함께라면, 진짜 모험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예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