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잿빛 황야의 포효**
지혁은 조종석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여명’의 둔탁한 금속음이 끊임없이 등 뒤에서 울렸다. 낡고 삐걱거리는 관절음, 불안정하게 회전하는 동력계의 마찰음. 한때 최신예 군용 기체였던 발키리급 메카닉 ‘여명’은 이제 거대한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지만, 지혁에게는 유일한 생존 도구이자 친구였다.
황폐한 대지는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끝없이 갈라진 붉은 흙,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들, 그리고 철근이 뼈대처럼 앙상하게 드러난 잿빛 빌딩 숲. 한때 문명의 심장이었던 도시들은 이제 거대한 묘지나 다름없었다. 하늘은 늘 그랬듯 흙먼지와 독성 구름으로 탁했고, 필터링된 조종석 창 너머로 보이는 태양은 병든 환자의 눈처럼 희미하고 기운 없었다. 온몸의 땀샘이 격렬하게 수분을 뿜어냈다. 에어컨은 이미 오래전에 고장 났고, 남은 전력은 오직 생명 유지 장치와 최소한의 기동에만 할당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지도에 표시된 좌표는 또 헛짓거리였군.”
지혁은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고장 난 내비게이션 화면을 주먹으로 툭 쳤다. 지지직거리는 화면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옛 시대의 자료들은 대부분 손상되었거나, 애초에 정확하지 않은 정보들로 가득했다. 그가 찾아 헤매는 것은 다름 아닌 물, 그리고 기체를 조금이나마 움직일 연료였다. 일주일째 빈손이었다. 식량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고, 저장된 물은 간신히 이틀을 버틸 양밖에 남지 않았다.
지혁은 한숨을 쉬며 조이스틱을 움직였다. 여명의 육중한 발걸음이 황야에 쿵, 쿵, 쿵 하는 규칙적인 리듬을 새겼다. 거대한 메카닉이 발을 디딜 때마다 주변의 흙먼지가 한 움큼씩 피어올랐다. 이대로라면 여명도, 그리고 지혁 자신도 끝이었다. 그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지형도에 희미하게 표시된 오래된 지하 배관 시설을 향해 기수를 돌렸다. 희망은 늘 그렇듯 아득하게 멀었다.
두 시간쯤 더 이동했을까. 여명의 동력계에서 불안정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연료 잔량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섰고, 비상 전력마저 빠르게 소진되고 있었다. 지혁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서 멈추면 죽음뿐이었다.
그때, 조종석의 센서가 미약한 진동을 감지했다. 지혁은 즉시 여명을 멈춰 세웠다. 그의 손이 능숙하게 주파수 스캐너를 조작했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속에서, 어렴풋이 기계음이 잡혔다. 멀리서 다가오는 차량의 엔진음, 그리고… 뭔가 더 크고 육중한 것의 움직임.
‘젠장, 하필 이럴 때.’
지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고장 난 레이더로는 정확한 식별이 어려웠지만, 이런 황무지에서 다른 존재를 만나는 것은 보통 좋은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약탈자 아니면 그에 준하는 위험한 집단이었다. 그는 여명을 폐허가 된 상점 건물의 잔해 뒤로 숨기고,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망원 스코프를 작동시켰다.
먼지구름 너머로, 세 대의 장갑차와 그 뒤를 따르는 중형 메카닉 한 대가 나타났다. 녹슬고 투박한 외형의 메카닉은 여명보다 작았지만, 두꺼운 장갑과 팔뚝에 장착된 기관포가 위협적이었다. 약탈자들의 상징인 붉은 해골 문양이 장갑차와 메카닉 곳곳에 그려져 있었다. ‘아크로니움’ 소속이었다. 지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들은 잔혹하기로 악명 높았다.
“이봐, 저기 뭔가 보여!” 장갑차 중 한 대에서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폐건물 뒤에 뭔가 움직였다!”
발각된 것이 분명했다. 지혁은 망설이지 않았다. 숨어봤자 소용없다. 그는 여명의 엔진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불안정한 동력계가 비명을 질렀지만, 여명은 지혁의 의지를 따라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폐허에서 뛰쳐나왔다.
“멈춰라! 거기 메카닉!” 아크로니움 메카닉의 조종사가 스피커를 통해 고함을 질렀다. “정지하지 않으면 즉시 발포한다!”
지혁은 무시했다. 오히려 여명의 스러스터를 역분사하며 전방으로 맹렬하게 돌진했다. 그의 목적은 하나였다. 적들에게 가까이 접근해서, 여명의 유일한 근접 무기인 고철로 만든 거대한 파이프를 휘두를 기회를 만드는 것. 원거리 교전은 연료가 부족한 여명에게 불리했다.
타타타탕!
기관포탄이 여명의 장갑에 빗발쳤다. 낡은 장갑이 긁히고 튕겨나가는 소리가 조종석까지 생생하게 전달됐다. 충격이 고스란히 온몸으로 전해졌다. 지혁은 이를 악물고 여명을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폐건물 잔해들을 방패 삼아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무슨 놈의 메카닉이 저리 저돌적이야? 미쳤나!”
“쏴라! 더 세게 쏴!”
장갑차의 기관총 사격과 아크로니움 메카닉의 기관포가 쉴 새 없이 불을 뿜었다. 여명의 어깨 부분 장갑이 떨어져 나가고, 팔 부분에 깊은 탄흔이 새겨졌다. 지혁은 고통을 참고 조준경을 통해 적 메카닉의 약점을 노렸다. 그들의 메카닉은 구식이었지만, 여명만큼이나 낡아 있었다. 특히 다리 부분의 동력 파이프가 외부로 노출되어 있었다.
“덤벼라, 쓰레기들!”
지혁은 절규하듯 외치며 여명의 거대한 왼팔을 휘둘렀다. 팔에 고정된 거대한 파이프가 바람을 가르며 아크로니움 메카닉의 허벅지를 강타했다. 콰앙! 쇠와 쇠가 부딪히는 끔찍한 굉음과 함께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었다. 약탈자 메카닉이 휘청거렸다. 지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명의 오른팔에 장착된 유압 해머를 내리찍었다. 콰직! 다리 부분의 장갑이 찌그러지고 동력 파이프가 파열되며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으악! 다리! 다리가 고장 났다!”
약탈자 메카닉의 조종사가 비명을 질렀다. 기체가 균형을 잃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혁은 잔여 전력을 긁어모아 여명의 스러스터를 최대 출력으로 가동했다. 굉음과 함께 여명이 약탈자 메카닉을 향해 돌진했고, 거대한 파이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다시는 남의 것을 넘보지 못하게 해주마!”
피비린내 나는 복수심이 아닌, 그저 생존을 위한 냉정한 결단이었다. 파이프가 약탈자 메카닉의 조종석을 강타하기 직전, 남은 두 대의 장갑차에서 일제히 섬광탄이 발사되었다. 펑! 펑! 시야가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다. 지혁은 반사적으로 여명의 센서 필터를 최대치로 올렸지만, 잠시 시야가 마비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젠장!”
그 짧은 순간, 약탈자 메카닉의 조종사는 기체에서 탈출했고, 장갑차들은 연막탄을 터뜨리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쓰러진 메카닉을 포기하고 도주를 선택한 것이다. 지혁은 시야가 돌아오자마자 도망치는 장갑차들을 향해 여명의 오른팔 기관포를 조준했지만,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남은 탄약이 얼마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료가 바닥이었다.
여명은 쿵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모든 동력계의 경고음이 미친 듯이 울려 퍼졌다. 조종석의 화면이 깜빡거리다 이내 암전 되었다. 지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등받이에 기댔다. 온몸의 근육이 경직된 것처럼 아파왔다. 전투는 그의 체력과 정신력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이런… 빌어먹을.”
그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여명은 움직일 수 없었다. 여기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절망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때, 암전 된 조종석 화면이 다시 지지직거리며 켜졌다. 화면에는 여명의 외부 센서가 포착한 영상이 비쳤다. 쓰러진 약탈자 메카닉의 잔해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황량한 폐허들. 그런데… 화면 한구석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이는 것을 지혁은 놓치지 않았다.
새로운 신호였다. 지혁이 이제껏 한 번도 탐지하지 못했던 주파수. 그것은 폐허 깊숙한 곳, 지표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처럼 보였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규칙적인 신호. 무엇보다, 그 신호는 마치… 누군가를 부르는 듯했다.
지혁은 느리게 손을 뻗어, 암전 직전의 화면에 표시된 좌표를 확대했다. 오래된 지형도에는 존재하지 않던, 전혀 새로운 지점. 그곳은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거대한 원형 구조물처럼 보였다.
‘이건… 뭐지?’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희망일까, 아니면 또 다른 함정일까. 지혁은 한참 동안 화면을 응시했다. 여명의 모든 전력이 끊어지기 직전, 그 희미한 빛은 마지막 불꽃처럼 선명하게 타올랐다.
그는 다시 조이스틱을 쥐었다. 비록 여명은 멈춰 섰지만, 그의 눈은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이글거렸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한 줄기 빛을 찾기 위한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을 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