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역사물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17화: 붉은 달 아래, 엇갈린 숨결

밤은 깊었고, 숲은 모든 소리를 삼킨 채 잠들어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이도진은 조금도 한기를 느끼지 못했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고, 귓가에는 오직 한 음절의 이름만이 울렸다. 아이라.

수풀이 우거진 깊은 골짜기, 깎아지른 절벽 아래 숨겨진 작은 동굴 입구. 습기와 이끼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이곳은 그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요새였다. 동굴 안쪽,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야화(夜花)의 은은한 빛이 아이라의 실루엣을 부드럽게 감쌌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도진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녀의 살결은 언제나 서늘하면서도, 닿는 순간 온몸을 태울 듯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늦었잖아, 도진.”

목소리는 숲의 바람처럼 나지막했지만, 그 속에는 걱정과 애정이 뒤섞여 있었다. 아이라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희미하게 띠었고, 그 시선은 도진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숨결족, 숲의 심장과 함께 태어나 숲의 모든 생명과 호흡하는 존재들. 그들에게 인간은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욕망과 파괴를 품은 미지의 존재였다. 하지만 아이라는 달랐다. 그녀는 도진에게 숲의 모든 비밀을 가르쳐주었고, 도진은 그녀에게 인간 세상의 복잡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미안하다. 감시가 더 심해졌어. 숲 초입부터 사냥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도진은 낮게 읊조렸다. 그의 손이 아이라의 허리를 감쌌고, 이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가느다란 몸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떨림은 그녀 또한 얼마나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지 깨닫게 했다. 인간과 숨결족 사이의 오랜 불신과 증오. 그 경계를 넘어선 사랑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숨결족에게는 정화(淨化)라는 이름의 처절한 심판이, 인간에게는 찢어발겨지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었다.

“알아. 숲이 불안에 떨고 있어. 인간들의 그림자가 너무 깊이 드리워지고 있어.”

아이라의 손이 도진의 어깨에 놓였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멀리서 다가오는 폭풍을 감지하는 듯,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냐?”

도진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긴장이 스몄다. 그는 아이라의 초월적인 감각을 믿었다. 그녀의 핏줄에는 숲의 영혼이 흐르고 있었으니.

“숲의 경계가… 깨졌어. 며칠 전, 우리 아이 하나가 사냥꾼들에게 붙잡혔어. 피 냄새가 아직도 숲 곳곳에 배어 있어.”

도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숨결족의 아이를 사냥? 그것은 전면전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인간들은 숨결족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그들의 신비로운 힘을 탐하고 있었다. 아이라의 종족은 인간의 영역에 발을 들이지 않았고, 인간 또한 숲의 깊은 곳으로는 들어오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그 불문율은 조금씩 깨지고 있었다. 희귀 약재나 영물(靈物)을 찾겠다며 숲을 침범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그들의 발길은 금지된 영역에까지 닿기 시작했다.

“이곳도 안전하지 않을지도 몰라. 숲이 아우성치고 있어. 인간들의 분노가, 욕망이 숲을 더럽히고 있어.”

아이라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그녀는 숲의 비명 소리를 듣는 듯, 귀 기울였다.

그 순간이었다.

바람 한 점 없던 동굴 입구에서, 나뭇가지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 나뭇가지를 밟고 선 것처럼, 불규칙하고도 묵직한 소음. 도진의 온몸이 굳어버렸다. 인간이라면 감지하기 어려운 소리였다. 그저 바람 소리라고 치부할 만한 미약한 울림. 하지만 아이라는 아니었다. 그녀의 눈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푸른빛이 더욱 선명하게 타올랐다.

“누가 오고 있어. 인간의 냄새야.”

아이라의 속삭임이 도진의 귓가에 닿았다. 차갑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들이 이곳을 찾아냈단 말인가? 불과 며칠 전, 그들의 은신처가 발각될 뻔한 위기가 있었기에 도진은 더욱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아무도 이곳을 몰라.”

도진은 애써 부정했지만,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자, 희미하지만 역한 피비린내가 동굴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숲의 사냥꾼들. 그들은 숨결족을 사냥하는 데 특화된 이들이었다. 인간의 탐욕에 눈이 멀어, 금지된 숲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자들.

“한 명이 아니야. 둘… 아니, 셋!”

아이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의 손이 도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의 체온이 급격히 낮아지는 것을 느꼈다. 공포가 아니라, 숲의 기운을 받아들이며 준비하는 움직임이었다.

동굴 입구, 어둠 속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작은 돌멩이가 굴러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낮게 깔리는 사냥꾼들의 목소리.

“여기인 것 같은데… 비린내가 강해. 그 짐승 새끼들 냄새 말이야.”
“그래. 며칠 전 놓쳤던 그 암컷이 분명 여기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야.”

짐승 새끼들. 그들은 숨결족을 그렇게 불렀다. 도진의 눈빛이 분노로 일렁였다. 아이라의 표정은 차분했지만, 눈동자에는 깊은 슬픔과 함께 싸늘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내가 미끼가 될게. 도진, 넌 이 반대편 통로로 나가. 이곳은… 길을 알아야만 빠져나갈 수 있어. 내가 시간을 벌게.”

아이라가 빠르게 속삭였다. 그녀의 손이 도진의 손을 놓으려 했다. 그 움직임에 도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끼가 되겠다니? 죽으려고?

“안 돼! 같이 가야 해!”

도진은 아이라의 손을 더욱 강하게 붙잡았다. 하지만 아이라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결정을 내린 듯했다.

“우리가 함께 잡히면… 둘 다 죽어. 나는 숲의 아이. 숲은 나를 품을 것이고, 나는 또 다른 형태로 숲으로 돌아갈 뿐이야. 하지만 너는… 인간이다. 너의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 너무나 큰 고통이 될 거야.”

아이라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그녀의 말은 이성적이었지만, 도진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함께 도망쳐야 했다. 이곳에서 끝낼 수는 없었다. 그들의 사랑은 이토록 허무하게 막을 내릴 수 없었다.

동굴 입구에서 발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횃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리고, 그림자가 동굴 안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곧 그들의 눈에 동굴 내부가 드러날 터였다.

“제발…!”

도진이 애원했지만, 아이라는 이미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몸을 틀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물처럼 유연했고, 바람처럼 빨랐다.

“다음에 만나면… 더 이상 숨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만나자.”

그녀의 속삭임은 마지막 작별 인사처럼 들렸다. 그리고 아이라는 도진의 손을 뿌리치고 동굴 깊숙한 곳,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의 뒷모습은 그림자처럼 사라져 갔다.

“아이라!”

도진의 절규가 동굴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동굴 입구에 사냥꾼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들의 눈빛은 탐욕과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어이, 여기 안에 누가 있는 것 같지 않나? 피 냄새도 강하고, 이 신선한 인간 냄새는 또 뭐지?”

사냥꾼 중 하나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횃불을 높이 든 그의 시선이 도진이 숨어 있는 어둠 속으로 향했다. 도진은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이를 악물었다. 아이라가 몸을 던진 방향은 사냥꾼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을 내던진 것이다.

이대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아이라를 두고.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말이, 다음에 만나면 더 이상 숨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만나자는 그 말이, 도진의 뇌리를 강타했다. 아이라는 그에게 살라고 말했다. 그의 생명이 그녀의 희망이라고.

도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손이 허리춤의 단검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지금 당장 나가서 저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는 숨결족이 아니었다. 그의 몸은 그들의 칼날에 스치면 쉽게 베이는 연약한 살덩어리일 뿐이었다.

“이곳은 생각보다 넓은데? 뭔가 깊숙이 더 있는 것 같아.”

다른 사냥꾼이 중얼거렸다. 그들의 시선이 동굴 안쪽으로 향했다. 아이라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도진은 숨을 죽였다. 그의 눈앞에는 오직 두 가지 길만 놓여 있었다. 아이라를 따라 죽음을 향해 달려가거나, 그녀의 마지막 바람대로 살아남아 언젠가 그녀와 재회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그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이라의 마지막 눈빛이, 그 결연하고도 슬픈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숲의 심장이 울부짖었다.
붉은 달이 숲의 가지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피처럼 붉게 타오르는 달빛이 동굴 어귀까지 스며들었다.
그는 선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대가는, 너무나도 가혹할 터였다.

***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