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12화: 흔들리는 찻잔, 흔들리는 심장

한유라의 자취 인생 5년, 그중 지난 3개월은 생지옥이었다. 아니, 물리적 생지옥이 아니라 정신적 생지옥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착각인 줄 알았다. 샤워하다 갑자기 선반 위 샴푸 통이 툭 떨어진다거나, 밤늦게 작업하다 불을 끄면 스탠드 조명이 제멋대로 한 번 더 깜빡이는 식이었다. 하지만 점차 그 빈도가 잦아지고 강도도 세졌다.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내 오피스텔, 203호에는 뭔가 있다.

“아, 진짜 좀 적당히 해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유라는 식탁에 엎드려 방금 전 벌어진 사건을 곱씹었다. 오후 3시, 간신히 눈을 비비며 일어난 그녀는 늦은 아침 겸 이른 점심으로 냉동 피자를 데워 먹으려 했다. 오븐에 피자를 넣고 기다리는데, 거실 탁자 위에 뒀던 차가운 탄산음료 캔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굴러떨어진 것이다. 그냥 굴러떨어진 게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툭 친 것처럼, 딱 그만큼의 힘으로.

“설마… 탄산음료를 먹고 싶었나?”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리는데, 이번엔 냉장고 문이 ‘덜컹’ 하고 흔들렸다. 유라의 어깨가 움찔했다.

“야! 거기까진 너무하잖아! 그거 비싼 거야!”

유라는 벌떡 일어나 냉장고로 달려갔다. 굳게 닫힌 문은 멀쩡했다. 안에 뭐가 있나 들여다보니, 유통기한이 임박한 유기농 주스 한 병이 마치 “나 마셔줘!”라고 외치는 듯 서 있었다.

“미쳤어, 한유라. 미쳤다고.”

스스로에게 질책하며 이마를 짚었다. 스트레스성 환청, 환각. 그렇게 믿기로 했다. 마감은 코앞인데, 작업은 눈곱만큼도 안 되고, 이제는 집까지 미쳐 돌아가니 제정신일 리 없었다.

그날 저녁, 유라는 최대한 평온하게 일상생활을 하려 애썼다.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채, 새롭게 시작한 웹소설 삽화를 그렸다. 평소 같으면 그림에 몰입해 시간 가는 줄 몰랐을 텐데, 오늘은 자꾸 등 뒤가 서늘했다. 마치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섬뜩한 느낌.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귀신이 나한테 뭘 하겠어. 일찍 죽으면 쉬고 좋지 뭐!’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붓 툴을 움직였다. 그때였다. 모니터 옆에 뒀던 무선 마우스가 스르륵 움직이더니, 갑자기 화면 위에 열려 있던 포토샵 파일이 저절로 저장되었다.

“………?!”

유라는 헤드폰을 벗어 던졌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마우스는 분명 자신의 손을 떠나 있었고, 포토샵 단축키를 누른 적도 없었다. 공포심보다 짜증이 치밀었다.

“야! 이 미친 유령 새끼야! 너 내 작업 건드리면 죽어! 진짜 죽여버릴 거야!”

유라는 벌떡 일어나 허리에 손을 얹었다. 아무도 없는 거실을 향해 소리쳤다. 화를 내는 동시에 ‘내가 지금 혼자 뭐 하는 짓이지’라는 현타가 밀려왔다.

‘미쳤나 봐. 진짜 미쳤어.’

그때, 현관문 잠금장치에서 ‘띠리링’ 하는 벨소리가 울렸다.
이 시간에 누가? 택배는 벌써 왔고, 배달 음식도 안 시켰는데.
유라는 잔뜩 경계하며 현관 앞으로 다가갔다. 비디오폰 화면을 보니, 웬 남자가 서 있었다. 잘생겼지만 왠지 모르게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얼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누구세요?”
유라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화면 속 남자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202호입니다. 혹시 방금 소리 지르셨습니까?”

아, 202호 남자. 김지훈. 며칠 전 복도에서 딱 한 번 마주쳤던, 그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였다. 유라는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저… 그게…”
“혹시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 해서요. 고성방가가 심각한 소음이라.”
그의 목소리는 딱딱하고 사무적이었다. 마치 AI가 말하는 것 같았다.

“아뇨!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잠시 혼잣말을 좀 세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유라는 문을 열어줄 생각도 않고 변명부터 늘어놓았다.

“혼잣말이요.”
그는 어쩐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미친 유령 새끼’는 혼잣말의 일부였습니까?”

유라의 얼굴은 삶은 문어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망했다. 옆집에까지 다 들렸을 줄이야. 그럼 아까 탄산음료가 떨어지고 냉장고 문이 흔들릴 때도 다 들렸다는 건가?

“그… 그건 그냥 제가 쓰는 유행어 같은 건데요!”
“유행어요.” 그가 미묘하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상한 유행어네요.”

“죄송합니다! 다신 안 그럴게요! 시끄럽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유라는 문고리를 꽉 쥐고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화면 속 지훈은 팔짱을 끼고 유라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불안하신 건가요?” 그가 불쑥 물었다.

“네? 뭐가요?” 유라는 고개를 들었다.

“요즘 203호에서 이상한 소리가 자주 들립니다. 쿵, 덜그럭, 삐걱… 심지어 지난주엔 비명 소리도.”
그의 말에 유라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비명 소리? 난 비명을 지른 적 없는데? 설마… 그게 내 비명이 아니라…

“제가 지른 비명은 없었는데요?” 유라가 반사적으로 말했다.

“그럼 다른 비명이었나 보군요.” 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면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에 사람이 놀라서 지르는 비명이었던가.”

유라는 말문이 막혔다. 이 남자는 대체… 관찰력이 뛰어난 건지, 오지라퍼인 건지.
“별일 아닙니다. 그냥 제가 물건을 좀 험하게 쓰는 편이라…”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유라의 뒤편 주방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쨍그랑!’
유라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현관문 너머 지훈의 눈빛도 흔들렸다.

“방금 그 소리는… 물건을 험하게 쓰는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지훈의 목소리에 더 이상 사무적인 딱딱함은 없었다. 대신 미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저… 저기요…” 유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 들린 걸 거예요.”

지훈은 한숨을 쉬었다. “문 열어보시죠. 제가 들어가서 확인해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유라는 질색했다. 모르는 남자에게 집 안을 보여줄 순 없었다. 게다가 지금 이 집 꼴이…

“괜찮다고 하기에는, 당신 얼굴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 같네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디오폰 화면이 ‘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꺼졌다.
유라는 혼비백산했다. 화면이 꺼진 게 아니라, 전원이 아예 나간 것처럼 먹통이 되었다.

“김지훈 씨! 김지훈 씨?!” 유라가 다급하게 이름을 불렀다.
현관문 너머에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적막. 그리고 유라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귀청을 때렸다.
주방에서 아까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반짝이며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설마… 설마…’
공포심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그때, 밖에서 ‘쾅!’ 하고 큰 소리가 들렸다.
유라는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문을 열어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김지훈 씨? 김지훈 씨 괜찮으세요?!”
유라는 거의 비명에 가깝게 소리쳤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문 너머 복도에서, 정체 모를 ‘긁는 소리’가 ‘드드득, 드드득’ 하고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날카로운 손톱이 벽을 긁는 듯한 소리.
그 소리는 점점 유라의 현관문 쪽으로 다가왔다.

유라는 벽에 몸을 바싹 붙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김지훈 씨… 제발… 제발 어디 가지 마요…’

소리는 현관문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덜그럭’ 하는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아래로 천천히 꺾이는 것이 보였다.
문이… 열리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