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도시의 그림자
숨이 턱 막히는 침묵이었다.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잿빛 도시는 이제 거대한 무덤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높이 솟아올랐던 건물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한때는 활기 넘쳤을 거리 위로는 모래와 먼지, 그리고 정체 모를 잔해들이 두텁게 쌓여 있었다. 태양은 늘 그랬듯 탁한 회색 구름 뒤에 숨어 제 빛을 온전히 뿜어내지 못했다. 영원한 황혼, 그게 이 세계의 이름이었다.
지혁은 낡은 방진 마스크 너머로 거친 숨을 내쉬었다. 발밑에서 부서지는 잔해들이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유일한 동반자였다. 척박한 땅에서 자라난 이름 모를 잡초들이 콘크리트 틈새를 비집고 고개를 내밀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생명력이라기보다는 이 거대한 죽음의 풍경에 대한 초라한 반항처럼 느껴졌다. 손에 든 탐지기는 지직거리는 소리를 냈고, 작은 화면에는 미약한 에너지 신호가 깜빡였다. 목표는 저 멀리, 가장 높이 솟아있는 건물 잔해 아래에 있을 터였다.
“젠장, 이런 날씨에 여기까지 와야 한다니.”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마스크 속에서 둔탁하게 울렸다. 며칠 전부터 기지 난방 시스템의 주요 전지 모듈이 이상 징후를 보였다. 이대로 가다간 혹독한 동절기를 버티지 못할 것이 뻔했다. 한때는 무수히 많았을 예비 부품들은 이제 전설처럼 희귀해졌고, 지혁은 고물상에서 들은 미약한 소문 하나를 좇아 며칠 밤낮을 걸어 이 폐허가 된 도시 외곽까지 온 것이었다.
길을 막아선 거대한 잔해 더미를 피해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녹슨 철골과 깨진 유리 조각들이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었지만, 그의 몸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피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들 사이를 지나는 건 늘 심장을 조이는 일이었다. 저 위에서 떨어진 파편 하나에 목숨이 끊어질 수도 있고, 어둠 속에 숨어있던 변이체가 덮쳐올 수도 있었다. 이곳은 언제나 죽음이 도사리는 곳이었다.
골목 끝에 다다르자, 어슴푸레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는 통로가 나타났다. 오래된 지하 주차장 입구였다. 탐지기의 신호가 강해졌다. “그래, 여기였군.” 지혁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총을 고쳐 잡았다. 탄창에는 겨우 열 발의 탄환이 남아있었다. 무모한 짓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축축하고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하 주차장은 빛 한 점 들지 않아 암흑 그 자체였다. 그의 헬멧 라이트가 켜지고, 한 줌의 빛이 어둠을 갈랐다. 녹슨 자동차 잔해들이 기괴한 형태로 널려 있었고, 바닥에는 정체 모를 액체가 고여 반짝였다. 천장에서는 뚝, 뚝,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혁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은 끊임없이 주위를 살폈다. 주차장 기둥 사이사이, 버려진 차들 아래, 어둠 속에 도사리는 모든 그림자들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이때, 탐지기가 미친 듯이 삐비빅 소리를 냈다. 가장 강한 신호였다.
“이런, 저건가.”
녹슨 대형 트럭 뒤편이었다. 라이트를 비추자 먼지 쌓인 상자들이 보였고, 그 중 하나가 확연히 눈에 띄었다. 군용으로 보이는 두꺼운 금속 케이스. 그 안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지혁은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드디어 찾았다!
총을 다시 등에 메고, 그는 상자로 다가갔다. 녹슨 잠금장치를 해제하려던 순간, 귀에 익숙한 진동이 느껴졌다. 바닥에서부터 울리는 미세한 진동. 그는 본능적으로 멈췄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 썩은 살점과 금속이 뒤섞인 듯한 끔찍한 악취였다.
그의 등골로 차가운 전율이 흘렀다. 이건… 변이체의 냄새였다.
지혁은 즉시 몸을 숨겼다. 트럭 뒤편, 가장 두꺼운 기둥 뒤로 바짝 붙었다. 헬멧 라이트를 끄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귀는 모든 소리에 집중했다. 진동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 어떤 짐승보다 교활하고, 끈질기며, 잔인한 놈들. 이 폐허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들의 그림자조차 피해야 했다.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질질 끌리는 듯한 소리. 불규칙적이고 둔탁한 발걸음이 천천히 다가왔다. 변이체였다. 분명했다. 그것도 덩치가 꽤 나가는 놈인 것 같았다. 지혁은 등에 메고 있던 총을 조심스럽게 뽑아 들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딸깍, 하는 미세한 소리가 어둠 속에서 크게 울리는 듯했다.
이때, 발소리가 멈췄다. 숨 막히는 정적. 놈이 냄새를 맡은 건가? 아니면 소리를 들은 건가? 지혁은 숨조차 쉬지 않았다. 피부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끼이이익-!
금속 긁는 소리가 귓가를 찢었다. 헬멧 라이트가 꺼진 상태였지만, 지혁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윤곽을 볼 수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트럭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흉측한 팔, 삐죽삐죽 솟아난 뼈들이 뒤엉킨 몸뚱이, 그리고 번들거리는 눈. 사냥꾼 변이체였다. 놈은 트럭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냄새를 맡는 듯했다.
지혁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놈의 시선이 마치 칼날처럼 자신의 은신처를 꿰뚫는 것 같았다. 놈은 분명 지혁이 상자 쪽에 다가갔던 흔적을 발견했을 것이다. 놈의 목표는… 아마도 저 상자였다. 이 상자가 변이체에게도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시간이 멈춘 듯했다. 숨조차 쉴 수 없는 긴장감 속에서, 지혁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놈은 지혁을 알고 있었다. 이 트럭 주변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갑자기 사냥꾼 변이체가 거대한 발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으르렁거렸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트럭을 향해 달려들었다. 케이스를 파괴하려는 듯, 아니면 그 안에 무엇이든 꺼내려 하는 듯.
“크윽!”
지혁은 순간적인 판단을 내렸다. 지금이다. 놈이 상자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그는 숨어있던 기둥 뒤에서 뛰쳐나왔다. 거의 동시에 총을 겨눴다.
탕! 탕! 탕!
세 발의 탄환이 어둠을 갈랐다. 총성은 지하 주차장 전체를 뒤흔들었고, 사냥꾼 변이체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휘청거렸다. 정확히 놈의 팔과 다리를 맞췄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움직임을 둔화시켰다.
놈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지혁을 향해 돌아서며 거친 포효를 내질렀다. 번들거리는 눈빛은 분노로 가득했다. 지혁은 놈이 다시 달려들기 전에 재빨리 상자로 향했다.
녹슨 잠금장치를 강제로 뜯어냈다. 끼이이익! 거친 소리와 함께 케이스가 열렸다. 내부에는 단단히 고정된 전지 모듈이 보였다. 푸른 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찾았다!”
지혁은 모듈을 재빨리 뽑아들었다. 손에 쥐자마자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과 차가운 감촉. 이걸 가져가야 했다. 반드시.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사냥꾼 변이체가 거대한 몸을 이끌고 다시 달려오고 있었다. 상처에서 검붉은 액체를 흘리면서도 그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지혁은 모듈을 품에 안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왔던 길을 되짚어 지하 주차장 입구로 향했다.
등 뒤에서 놈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발톱이 바닥을 긁으며 따라오는 소리. 살의에 찬 으르렁거림. 지혁은 오직 살아야 한다는 본능에 따라 달리고 또 달렸다. 좁은 통로를 벗어나 폐허가 된 도시의 거리로 다시 나왔다. 탁한 회색빛 하늘이 보였고, 차가운 바람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젠장, 젠장!”
그는 숨을 헐떡이며 뒤를 돌아봤다. 사냥꾼 변이체는 이미 주차장 입구까지 나와 있었다. 놈은 그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끈질기게 추격했다. 지혁은 몸을 돌려 황급히 좁은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복잡한 건물 잔해들이 얽힌 미로 속으로 파고들면 놈을 따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골목의 끝은 막다른 벽이었다. 지혁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무너진 건물 사이로 겨우 몸 하나가 빠져나갈 만한 틈새였다. 그는 주저 없이 몸을 던졌다. 찢어진 옷자락이 벽에 스쳤고, 날카로운 잔해에 살점이 긁혔지만 그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턱!
겨우 몸을 빼낸 순간, 뒤에서 거대한 충격음이 들렸다. 사냥꾼 변이체가 막다른 벽에 부딪힌 소리였다. 놈의 분노에 찬 포효가 폐허 속을 뒤흔들었다. 지혁은 그 소리를 뒤로하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놈에게서 벗어났지만, 그의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손에 든 모듈은 희망처럼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모듈이 대체 왜 변이체의 감시 아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이 폐허 속에서 그들 외에 또 다른 움직임이 감지된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어둠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곧 밤이었다. 지혁은 다시 한번 모듈을 움켜쥐었다. 살아남기 위한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