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핏빛 노을, 사냥꾼의 밤

카이는 낡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녹슨 칼자루를 꽉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다. 후각을 찌르는 퀴퀴한 흙먼지 냄새, 그리고 저 너머에서 불어오는 역한 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그는 고개를 들어 지평선을 훑었다. 핏빛 노을이 으스러진 건물 잔해들 위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치 세상의 마지막 피가 땅에 뿌려진 것만 같았다.

“젠장, 예상보다 늦어졌어.”

카이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목구멍이 바싹 마른 탓이었다. 며칠째 물 한 모금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막처럼 변해버린 이 절멸의 황야에서 물은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귀했다.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레나가 낡은 배낭을 고쳐 메는 소리였다. 그녀는 카이보다 훨씬 어렸지만, 그 눈빛만큼은 이 황야의 나이테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스무 해 남짓한 삶 중 절반 이상을 폐허 속에서 보냈을 테지.

“저 거대한 벽 그림자 안에 들어가면 좀 나을까요, 카이 오빠?”

레나는 저 멀리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구조물을 가리켰다. ‘재앙의 핵’이라고 불리는 구역의 경계였다. 고대 문명의 유산이자, 동시에 모든 것을 집어삼킨 저주의 근원. 그 거대한 장벽 아래에는 비교적 바람이 덜 불었고, 밤의 그림자가 더 깊게 드리웠다. 위험은 항상 그림자 속에 도사리고 있었지만, 어둠은 때로 가장 안락한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완전히 깔리기 전에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해. 밖은… 오늘은 사냥꾼들에게 너무 좋은 밤이 될 거야.”

그의 말에 레나는 덜컥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손이 허리에 찬 단검의 손잡이를 무의식적으로 더듬었다. 레나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한 야수들이 아니었다. 황야의 사냥꾼들은 짐승보다 교활하고, 짐승보다 잔인했다. 그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먹이로 삼았다. 심지어 동족까지도.

“오늘따라 이상해요. 공기가 너무 무거워요.” 레나가 속삭였다. “너무 조용하기도 하고요.”

카이는 레나의 말에 동의했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평소라면 멀리서 들려오는 기형 짐승들의 울부짖음이나, 폐허 속을 떠도는 바람의 비명 같은 것이라도 있었을 텐데. 오늘은 마치 세상이 숨죽인 채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이런 고요함은 종종 폭풍 전야의 신호였다.

그들이 낡은 건물 잔해 사이를 뚫고 나아가고 있을 때였다. 으스러진 콘크리트 조각 위로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스쳤다. 카이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의 손에 쥐인 칼이 저절로 겨눠졌다.

“레나, 뒤!”

카이의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레나의 등 뒤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검고 거친 털을 가진 짐승, ‘그림자 발톱’이었다. 그 이름처럼 발톱은 그림자를 찢을 듯 날카로웠고, 움직임은 눈으로 쫓기 힘들 만큼 빨랐다. 놈은 레나의 배낭을 노리고 덮쳐들었다.

레나는 황급히 몸을 돌려 단검을 휘둘렀지만, 그림자 발톱은 그 움직임을 비웃듯 몸을 꺾어 피했다. 놈의 날카로운 발톱이 레나의 어깨를 스쳤다. 얇은 천이 찢어지고, 작지만 선명한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크윽!”

“레나!”

카이는 망설임 없이 그림자 발톱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칼이 그림자 발톱의 옆구리를 깊숙이 갈랐다. 놈은 짧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잠시 멈칫했을 뿐, 이내 더 격렬하게 카이에게 달려들었다.

놈은 혼자가 아니었다.

사방에서 쉬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 발톱의 무리였다. 최소 서너 마리 이상. 그들은 노을이 드리운 폐허의 그림자 속에서 완벽하게 위장하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카이와 레나는 포위당했다.

“젠장, 매복이었잖아!” 카이가 이를 악물었다. 등에 난 상처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지만, 지금은 그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놈들은 분명 자신들을 꽤 오랫동안 추적해왔을 것이다. 이 고요함은 놈들이 숨죽인 채 기다리는 고요함이었다.

“카이 오빠, 너무 많아요!” 레나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녀는 작은 몸으로 카이의 등 뒤에 바싹 붙어, 맹수들의 눈빛에 맞서고 있었다. 상처 난 어깨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보였다.

카이는 눈앞의 놈을 발로 차내며 소리쳤다. “한 방향으로 돌파한다! 나를 따라와, 절대 떨어지지 마!”

그는 가장 약해 보이는 방향, 즉 가장 개체 수가 적어 보이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낡은 칼날이 번뜩이며 그림자 발톱 한 마리의 목을 갈랐다.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놈들은 개의치 않았다. 마치 피 냄새에 더 흥분한 듯, 더욱 거세게 달려들었다.

레나는 카이의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랐다. 그녀의 단검은 작았지만 정확했고, 재빠른 움직임으로 카이가 놓치는 사각의 그림자 발톱들을 쳐냈다. 끔찍한 비명 소리가 폐허에 울려 퍼졌다. 놈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지만, 그들의 체력 또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거의 다 왔어, 레나! 저기 재앙의 핵 벽까지!” 카이가 외쳤다.

그들의 눈앞에 거대한 장벽의 그림자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 아래에는 폐허가 된 도시의 흔적이 있었다. 파편처럼 흩어진 건물 잔해들이 뾰족한 이빨처럼 솟아 있었다. 그곳에 숨을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그림자 발톱 한 마리가 끈질기게 카이의 발목을 물고 늘어졌다. 카이는 이를 갈며 칼을 휘둘러 놈을 쳐냈다. 그 반동으로 휘청거린 사이, 그의 발이 으스러진 잔해에 걸려 넘어졌다.

“카이 오빠!”

레나가 달려들었지만, 다른 그림자 발톱들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이에게 덮쳐들었다. 한 마리의 날카로운 발톱이 카이의 얼굴로 향했다. 그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피했지만,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뺨을 깊게 할퀴었다. 뜨거운 피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젠장…!”

그때였다.

어디선가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림자 발톱 무리 중 가장 크고 사나워 보이던 한 마리가 갑자기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놈의 등에는 알 수 없는 쇠로 된 뾰족한 무언가가 박혀 있었다.

카이는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그들이 사용하지 않는 방식의 무기였다. 이 황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사방이 다시 고요해졌다. 남아있던 그림자 발톱들이 경계하는 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레나가 황급히 카이에게 달려와 부축했다. “카이 오빠, 괜찮아요? 누가…?”

카이는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의 시선은 쓰러진 그림자 발톱의 등에 박힌 쇠 조각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화살촉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화살촉이 아니었다. 푸른빛이 희미하게 감도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광택을 띠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림자 발톱 무리보다 더 위험한 무언가가 근처에 있었다.

“레나… 당장 몸을 숨겨. 빨리.” 카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위협적이었다.

레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카이를 바라보았다. “누가 우릴 도와준 거 아니에요?”

“도움이 아닐 수도 있어.” 카이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노을의 붉은 그림자가 서렸다.

“이건… 사냥이야.”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핏빛 노을은 완전히 사라지고, 암흑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재앙의 핵 장벽의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을 완전히 덮쳤다. 그 그림자 속에서, 알 수 없는 존재의 차가운 시선이 그들을 꿰뚫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이제 사냥꾼이 아닌, 사냥감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