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녹슨 도시의 밤
숨이 턱 막혔다. 하루 종일 먼지와 서류에 시달린 폐가 켁켁거렸다. 퇴근길 지하철 안은 땀 냄새와 피로가 뒤섞인 공기로 가득했다. 이진우는 겨우 빈자리를 찾아 몸을 구겨 넣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낡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야경은, 매일 보는 익숙한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거대한 기계 도시의 부속품처럼, 모두가 일정한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모습이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오늘은 그냥 라면이나 끓여 먹고 자야겠다.’
진우는 축 처진 어깨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현재의 팍팍한 삶이 뒤엉켜 머릿속을 헤집었다. 이대로 괜찮을까? 이대로 살다 보면 언젠가는 괜찮아질까? 그 흔한 질문에 답할 기운조차 없었다.
그때였다. 쿵! 하고 열차가 급정거했다. 관성 때문에 몸이 앞으로 크게 쏠렸다가 다시 뒤로 젖혀졌다. 승객들의 불만 섞인 탄식과 함께, 곧이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잠시 전방에 이상 발생으로 열차가 지연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익숙한 사고였다. 또 고장인가 싶어 진우는 무심코 창밖을 내다봤다. 터널의 어둠 속. 그 순간, 눈을 찌르는 섬광이 번쩍였다. 마치 수십 개의 플래시가 동시에 터진 것처럼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다.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이명과 함께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뭐… 뭐야?!”
누군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열차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창밖을 보려 했다. 섬광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기이한 현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터널의 벽면이 마치 낡은 그림처럼 일렁였다. 공간이 휘어지고, 색깔이 뒤틀렸다. 멀미가 치솟았다.
“젠장…!”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온몸의 세포가 미친 듯이 찢겨나가는 고통이 밀려왔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의식이 멀어졌다. 마지막으로 스친 생각은, ‘이대로 죽는 건가…?’ 하는 허무함이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꺼풀이 무거웠다. 몸을 짓누르는 고통은 사라졌지만, 대신 온몸의 근육이 경직된 듯 뻣뻣했다. 느릿하게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시뻘건 하늘이었다. 쨍한 주황색에 가까운, 비현실적인 색깔. 눈을 비볐다. 꿈인가? 환각인가?
몸을 일으켰다.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낡고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이었다. 자신이 누워있던 곳은 무너진 건물 잔해 위였다. 퀴퀴하고 건조한 흙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목이 타들어갈 듯이 말랐다.
주위를 둘러봤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경악 그 자체였다.
높게 솟아있던 빌딩들은 앙상한 뼈대만 남긴 채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고, 아스팔트 도로는 거대한 지진이라도 겪은 듯 쩍쩍 갈라져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잡초들이 질기게 솟아나 있었다. 녹슨 철근과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한강은 탁한 뻘물로 변해 있었다. 모든 것이 황폐하고, 죽어 있었다.
‘이게… 뭐야?’
진우는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자신이 분명 지하철 안에 있었다는 사실은 선명한데, 눈앞의 이 풍경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지하철… 터널….”
중얼거리며 주변을 수색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녹슨 채 뒤집어진 지하철 차량의 잔해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 잔해는 자신이 타고 있던 열차와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훨씬 오래되고 낡은, 거의 고철 덩어리였다. 주변에는 더 이상 다른 승객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분명한 현실이었다.
문득, 차가운 공기가 그의 뺨을 스쳤다. 따뜻했던 서울의 봄밤 공기가 아니었다. 피부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냉기. 그리고 시뻘건 하늘 저편에서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 이 모든 것이 마치 거대한 조작된 세트장 같았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지금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직감.
‘물… 물을 찾아야 해.’
갈증이 너무나 심했다. 입술이 바싹 말라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주변에 건물을 찾아 움직였다. 무너진 편의점의 흔적을 발견했다. 간판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지만, 어렴풋이 ’24시’라는 글자가 보였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잔해 속으로 발을 들였다.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상품 진열대는 뒤틀린 철근과 함께 뒹굴고 있었다. 바닥에는 깨진 유리 파편과 썩어버린 내용물들이 널려 있었다.
“젠장… 아무것도 없어.”
수십 번, 수백 번 뒤지고 또 뒤졌다. 손톱 밑에 흙먼지가 박히고, 손바닥은 날카로운 파편에 긁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절박함만이 그를 움직였다. 하지만 모든 것은 부패했거나, 이미 다른 누군가에 의해 가져가진 뒤였다.
허탈하게 주저앉았다. 희미한 냄새가 진우의 코를 스쳤다. 썩은 음식 냄새에 뒤섞인… 비린내.
진우는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흩어진 낡은 옷가지들 사이로, 이상한 형태의 뼈 조각들이 보였다.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갈비뼈, 그리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길고 날카로운 이빨이 박힌 두개골. 마치 동물의 것 같았지만, 그 크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게… 뭐야….”
소름이 돋았다. 이곳은 단순히 황폐해진 곳이 아니었다. 어떤 생물이 살아남아, 혹은 새롭게 생겨나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살아남아야 한다. 돌아갈 방법은 나중 문제다. 일단, 이곳에서 오늘 밤을 버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두려움 속에서도 진우는 강렬한 생존 본능을 느꼈다.
다시 일어섰다. 몸을 웅크린 채, 무너진 건물들 사이로 시선을 던졌다. 저 멀리, 비교적 온전해 보이는 고층 건물의 윤곽이 보였다. 혹시 저곳에는…
그때, 진우의 발밑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채였다. 흙먼지에 반쯤 묻혀있던 낡은 배낭이었다. 투박한 재질에 얼룩덜룩한 흔적이 가득했다. 누군가 급하게 버리고 간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배낭을 들어 올렸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진우는 숨을 죽인 채 조심스럽게 배낭의 지퍼를 열었다. 안에는 먼지로 뒤덮인 플라스틱 물병 하나와, 낡은 천 조각에 싸인 작은 칼 한 자루, 그리고 찌그러진 금속제 통 하나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빛바랜 종이뭉치가 있었다. 종이의 한 모서리에는 거칠게 그려진 지도가 얼핏 보였다. 그것은 이 황폐해진 도시의 지도로 보였다. 동시에, 무언가를 경고하는 듯한 붉은 글씨가 눈에 띄었다.
‘절대… 홀로 움직이지 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