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재와 침묵의 땅
메마른 바람이 낡은 철골 구조물 사이를 휘감아 돌며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토해냈다. 한때는 웅장했을 도시의 잔해, 잿빛 먼지가 뒤덮인 건물들은 마치 거대한 해골처럼 앙상하게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 위로 부유하는 재는, 이곳이 한때 생명으로 들끓던 푸른 별이었다는 사실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안은 익숙한 침묵 속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닳아빠진 부츠 밑창이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 위를 사각거리며 긁었다. 어깨에는 투박하게 꿰맨 배낭이 얹혀 있었고, 그의 오른손은 늘 허리춤에 찬 녹슨 단검의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이곳에서 단검은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온몸의 수분이 증발하는 듯한 갈증이 목구멍을 긁었다. 며칠째 물다운 물은 마셔보지 못했다. 그나마 어제 발견한 웅덩이의 흙탕물은 희망의 마지막 조각이었으나, 그것조차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이안은 흐릿해지는 시야를 애써 바로잡으며 폐허의 틈새를 살폈다. 목표는 단 하나, 마실 수 있는 물. 혹은 그것과 교환할 만한 가치 있는 것.
“젠장, 정말 아무것도 없군.”
나지막한 혼잣말이 침묵을 깨고 메아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건조한 공기가 폐부를 찢는 것 같았다. 햇빛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그 열기조차 생명력을 빼앗는 차가운 위협처럼 느껴졌다. 태양은 이 대지를 축복하는 대신, 그저 끝없는 고통의 증인처럼 하늘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낡은 고층 건물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곳에 이르러 이안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한때는 번화했을 로비였을 공간은 이제 온갖 잔해와 흙먼지로 가득했다. 천장은 무너져 내렸고, 뒤틀린 철골들이 기괴한 예술품처럼 얽혀 있었다. 저 안쪽 깊숙한 곳에 남아있는 건물이 있을 수도 있다는 희미한 희망이 그를 이끌었다. 혹은, 다른 생존자들의 흔적이 있을지도. 하지만 그 희망은 동시에 더 큰 위험을 의미하기도 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건물의 입구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흙먼지 위에 드문드문 찍힌 발자국. 인간의 것은 아니었다. 굵고 날카로운 세 개의 발가락이 선명한 그것은, 이 폐허에서 가장 흔하고도 치명적인 위협인 ‘쉬버’의 흔적이었다.
쉬버는 대재앙 이후 나타난 변이 생물이었다. 날카로운 발톱과 칼날 같은 이빨, 그리고 경이로운 속도로 움직이는 육식성 괴물. 놈들은 물과 먹이를 찾아 폐허를 배회했고, 인간 또한 그들의 사냥감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쉬버의 울음소리는 마치 금속이 긁히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였고, 그 소리는 죽음의 전조였다.
이안은 숨을 죽였다. 발자국은 꽤 신선했다. 놈이 이곳에 그리 오래 머무르지 않았거나, 아니면 지금도 안쪽에 있을 수 있었다. 단검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물이 필요했다. 너무나 간절하게.
조심스럽게 건물 내부로 발을 들였다. 빛이 닿지 않는 안쪽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깨진 유리 파편이 밟히는 소리조차 주변의 침묵을 찢을까 두려웠다. 습관적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썩은 냄새, 먼지 냄새, 그리고 희미하게 풍기는 비릿한 피 냄새. 경고음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젠장…!”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두 개의 붉은 눈. 이안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쉬버였다. 놈은 웅크리고 있다가 먹잇감을 덮치듯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폐허를 뒤흔들었고, 이안은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던졌다.
쉬버의 발톱이 이안이 서 있던 자리를 찢고 지나갔다. 콘크리트 바닥에 깊은 자국이 새겨졌다. 놈의 등은 뼈가 도드라져 있었고, 비늘처럼 거친 피부는 잿빛과 검은색이 뒤섞여 있었다. 굶주림에 미친 듯 날뛰는 괴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크윽!”
이안은 빠르게 자세를 잡고 단검을 치켜들었다. 쉬버는 기민하게 몸을 돌려 다시 달려들었다. 놈의 움직임은 예측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안 또한 수없이 많은 쉬버와 마주했던 경험이 있었다. 놈들의 패턴, 놈들의 약점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쉬버가 다시 한번 발톱을 휘둘렀다. 이안은 몸을 숙여 공격을 피하며 놈의 옆구리를 향해 단검을 찔러 넣었다.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깊숙이 박혔다. 놈의 거친 비명소리가 더욱 커졌다.
쉬버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이안을 후려쳤다. 날카로운 꼬리가 이안의 팔을 스쳤다. 낡은 상의가 찢겨 나갔고, 살갗이 베여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쓰라린 통증이 전신을 엄습했지만, 이안은 단검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깊숙이 찔러 넣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괴물의 숨통을 끊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죽을 터였다.
쉬버는 발버둥치며 이안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콘크리트 벽에 등이 부딪히며 뼈가 울리는 고통이 찾아왔다. 놈의 턱이 그의 어깨를 물어뜯으려 달려들었다. 이안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뒤로 젖히며 피했다. 놈의 이빨이 그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단검을 위로, 아래로, 쉬버의 몸을 헤집었다. 놈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점차 잦아들었다. 거대한 몸뚱이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축 늘어진 몸뚱이 아래로 검붉은 피가 흥건하게 번져나갔다. 이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단검을 뽑아 들고, 놈의 숨통이 완전히 끊어졌는지 확인했다.
“하아… 하아…”
안도의 한숨과 함께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폐허 속에서, 그는 간신히 살아남았다. 팔에서 흐르는 피를 거친 천으로 대충 닦아냈다. 쉬버의 시체는 혐오스러웠지만, 동시에 한동안 먹을 것을 구했다는 안도감을 주기도 했다. 이 척박한 세상에서 놈의 고기는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식량이었다. 맛은 지독했지만.
하지만 물은 여전히 문제였다. 이안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폐허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쉬버를 잡았으니, 다른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건물은 놀랍도록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지하 주차장이었을 공간은 천장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멀쩡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안은 기적 같은 것을 발견했다.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 옆, 깨진 벽돌 더미 아래에서 희미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다시 한번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희망과 절망의 끝을 오가는 경험은 그를 지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간절한 욕망을 더욱 불태웠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벽돌을 치워냈다. 그리고 그 아래, 갈라진 틈새 사이로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지는 작은 웅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맑지는 않았지만, 생명줄과도 같은 물이었다. 웅덩이 바닥에는 녹슨 철판 조각이 깔려 있어 흙탕물이 섞이는 것을 막아주고 있었다.
이안은 망설임 없이 바닥에 엎드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차갑고 비릿한 맛이었지만, 그 어떤 감로수보다 달콤했다. 오랜 갈증이 해소되는 순간, 온몸의 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듯한 환희가 밀려왔다. 몇 번이고 물을 마신 후, 이안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빈 물통을 채웠다.
이 정도라면 며칠은 버틸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이 물줄기가 계속되는 한, 그는 이 주변에서 더 오래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쉬버의 사체를 수습해 어깨에 짊어졌다. 놈의 고기는 역겨운 냄새를 풍겼지만, 그의 생존을 책임질 중요한 자원이었다.
새로운 희망을 안고 폐허를 빠져나왔을 때, 붉게 물든 노을이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고 있었다. 잿빛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실루엣처럼 서 있는 건물들은 더욱 음산해 보였다.
이안은 채워진 물통과 어깨에 짊어진 쉬버의 사체, 그리고 팔에 남은 상처를 느끼며 폐허의 끝자락에 섰다. 살아남았다. 오늘도. 하지만 내일은? 내일의 태양은 또 어떤 시련을 가져다줄 것인가.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 그는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빛은 지쳐 있었지만, 그 속에는 결코 꺼지지 않을 생존의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그는 다시 한번 내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어디로 갈지, 무엇을 만나게 될지 모른 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