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슬립 (시간여행)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균열

김현우는 오늘따라 유난히 퇴근길 지하철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매일 땀과 피로에 절어 비틀거리던 익숙한 풍경인데, 굳이 말하자면, 그의 눈에 비친 사람들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지쳐 보였다. 혹은, 그저 그 자신이 유난히 더 지쳐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삼십 대 중반. 평범한 직장인. 특별할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월급. 이 삶이 과연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그저 ‘버텨내고 있다’고 해야 하는 건지 종종 헷갈릴 때가 있었다.

지하철 문이 ‘삑’ 소리를 내며 닫히자, 현우는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었다. 꽉 막힌 듯 답답한 공기가 폐부를 짓눌렀다. 오늘따라 유난히 목이 말랐다. 뻑뻑한 눈을 감고 이어폰을 꽂았다. 경쾌한 인디 밴드의 음악이 귀로 흘러들어왔지만, 현우의 마음속 텁텁함을 씻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다음 역은, 신림, 신림역입니다.”

기계적인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고개를 들자 창밖의 어둠 속에 자신과 똑같이 지쳐 보이는 얼굴들이 비쳤다. 저들도 이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무언가를 잃어가며 버티고 있겠지. 어쩌면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전동차가 굉음을 내며 심하게 흔들렸다. 쿵!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진동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승객들의 비명과 함께 전등이 깜빡거리더니 이내 푸른 불꽃을 튀기며 완전히 꺼졌다. 순식간에 암흑이 찾아왔다. 퀴퀴한 쇠 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공포에 질린 외침이 뒤섞였다.

“무슨 일이야?”
“정전인가?”
“살려줘!”

현우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벽에 부딪혔다. 쿵! 머리에 강한 충격이 왔다. 이마가 찢어졌는지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이윽고 전동차는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찢을 듯 울렸다. 몸이 공중에 뜨는 듯한 기분,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착각. 빛도, 소리도, 감각도 모두 사라진 무저갱 속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의식은 거기서 끊겼다.

***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현우는 힘겹게 눈을 떴다.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천장이 아니었다. 거친 흙바닥. 코를 찌르는 퀘퀘한 냄새. 땀과 흙먼지, 그리고 알 수 없는 탄내가 뒤섞여 역했다.
‘…꿈인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의 근육이 돌덩이처럼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어지러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떴다.
이곳은 어디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경악스러웠다. 진흙과 나무로 대충 지어진 오두막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담장 대신 엉성한 나뭇가지들이 얽혀 있었고, 그 사이로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름한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눈빛은 깊은 절망과 피로에 잠겨 있었다.
도로는커녕 제대로 된 길조차 없었다. 발밑은 온통 마른 흙과 자갈투성이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것은 자동차 경적 소리가 아니라, 닭이 홰를 치는 소리, 개 짖는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낮은 신음 소리였다.

현우는 혼란에 빠졌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봤다. 익숙한 청바지와 티셔츠. 손목에는 얼마 전 산 스마트워치가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이곳과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설마… 영화 촬영장인가? 내가 여기 왜 있지?’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지하철, 정전, 흔들림, 그리고 추락하는 듯한 느낌. 거기까지였다.

그때, 저 멀리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엎드려라! 대륜 제국의 병사들이 지나간다!”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진흙길 위로 육중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사람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허둥지둥 오두막 안으로 숨거나, 길바닥에 엎드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현우는 숨을 죽인 채 몸을 가누고, 감히 숨지도 않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렸다.
두려움에 떨며 엎드린 이들 사이로, 한 어린 소녀가 흙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낡은 삼베옷을 입은 소녀는 앙상한 팔로 작은 바구니를 품에 꼭 안고 있었다. 바구니 안에는 겨우 감자 서너 개가 들어 있는 듯했다. 소녀의 눈은 사슴처럼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 작은 손은 바구니를 놓지 않으려 필사적이었다.

이윽고, 네댓 명의 병사들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그들의 모습은 현우의 눈을 의심케 했다. 번쩍이는 철제 갑옷, 허리춤에 찬 길고 날카로운 검. 그들이 휘두르는 채찍은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끝은 뾰족한 쇠붙이로 장식되어 있었다. 위압적인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병사들의 갑옷에는 사자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현우는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분명 자신의 기억 속에는 없는 문양이었다.

“일어나라, 게으른 것들아! 황제 폐하의 세금을 바칠 시간이다!”
선두에 선 병사가 채찍을 허공에 휘두르며 고함쳤다. ‘피슉!’ 하는 소리와 함께 매서운 바람이 일었다.
“너희 같은 벌레들이 감히 황제의 명을 어길 셈이냐?”
마을 사람 중 한 노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손으로 바구니를 내밀었다. 바구니 안에는 말라 비틀어진 곡식 몇 알이 전부였다.
“죄송합니다, 장군님. 올해는 가뭄이 너무 심하여… 더 이상 바칠 것이 없습니다.”
노인의 목소리는 덜덜 떨렸다.

병사는 노인의 바구니를 발로 걷어찼다. 곡식 알갱이들이 흙바닥에 흩뿌려졌다.
“이 늙은이가 감히! 이것으로 황제 폐하께 세금을 바치라고?”
병사는 노인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들어 올렸다.
“먹을 것이 없다면, 너희의 목숨으로라도 바쳐야 할 것이다! 그것이 대륜 제국의 법이다!”
그리고는 쥐고 있던 채찍을 노인의 등에 사정없이 내리쳤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노인의 등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노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현우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광경은 잔인하고 비현실적이었다. 이건 드라마도, 영화도 아니었다. 펄떡이는 노인의 몸, 흙바닥에 뿌려진 붉은 피, 그리고 고통에 일그러진 마을 사람들의 얼굴. 이 모든 것이 생생한 현실이었다.
그 순간, 아까 바구니를 품에 안고 있던 소녀의 흐느낌이 그의 귓가를 찔렀다. 병사 하나가 소녀에게 다가가 발로 바구니를 차버렸다. 소녀의 감자들이 흙탕물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소녀는 절규하며 감자를 주우려 했지만, 병사의 발이 그 작고 더러운 감자들을 짓밟았다.
“이런 쓰레기 같은 것들을 바칠 셈이냐? 배고프면 풀뿌리나 뜯어먹고 죽어라!”

현우는 분노로 몸이 떨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폭력과 비인간적인 행위들. 이 시대착오적인 야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이봐요! 당신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현우에게 향했다.
현우는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그는 낯선 옷을 입고, 낯선 언어를 쓰고 있을 이들에게 갑자기 끼어든 이방인이었다.

병사들은 잠시 현우의 기이한 옷차림과 당황한 표정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내 비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또 뭐야? 미치광이인가? 감히 대륜 제국의 병사들에게 명령이라도 내릴 셈이냐?”
한 병사가 검집으로 현우의 옆구리를 거칠게 찔렀다.
“크윽!”
현우는 신음하며 무릎을 꿇었다. 날카로운 고통이 온몸을 휘감았다.
병사는 현우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현우의 눈에 소녀와 노인의 절망적인 시선이 들어왔다. 그들의 눈은 현우에게 ‘대항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했다.
“네놈은 어느 마을의 벌레냐? 감히 제국의 법도를 무시하고 백성들을 선동하려 드느냐!”

현우는 숨을 헐떡이며 병사의 얼굴을 노려봤다.
‘대륜 제국… 이곳은 대체…?’
현우의 머릿속은 혼돈으로 가득했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선명했다. 이곳은 그가 살던 세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곳의 사람들은 고통받고 있었다. 거대한 힘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었다.

병사는 현우를 바닥에 내던졌다. 현우의 몸이 흙바닥에 뒹굴었다.
“두고 보자. 이 반란의 씨앗 같은 놈. 다음 순찰 때 네놈의 목을 가져갈 테니.”
병사들은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들은 황량한 마을을 뒤로하고 다시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병사들이 떠나고 난 뒤에도, 마을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한참 후에야 몇몇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노인은 여전히 쓰러져 있었고, 소녀는 짓밟힌 감자 앞에서 울고 있었다.
현우는 피투성이가 된 노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텅 비어버린 마을 사람들의 눈을 마주쳤다.
‘이게… 정말 현실이라고?’
그는 손을 뻗어 자신의 스마트워치를 만져봤다. 여전히 깜빡이는 작은 불빛.
이곳은 분명, 그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거대한 제국의 압제 아래 신음하는 수많은 민초들의 현실이 펼쳐져 있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무력감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현우의 내면을 뒤흔들었다.
‘이대로는 안 돼.’
그는 굳게 주먹을 쥐었다. 자신은 누구인지, 이곳은 어디인지,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이곳에서 눈을 떴고, 이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작지만 강렬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균열은 이미 시작되었다.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간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