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증기 속 맹세
강철 심장 도시, 테라.
거대한 톱니바퀴와 증기의 도시.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들은 낡은 황동색 외벽 아래 시커먼 증기를 쉼 없이 뿜어냈다. 거리마다 증기 마차가 삐걱이며 지나갔고, 시민들의 옷깃에는 검은 그을음이 언제나 배어 있었다. 이 모든 움직임의 중심에는, 도시 전체를 거대한 시계처럼 움직이는 ‘중앙 동력탑’이 굳건히 서 있었다. 새벽의 푸른빛이 희미하게 도시를 감쌀 때, 그 동력탑의 그림자 아래 자리한 허름한 골목 끝의 한 작업실에서, 강율은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닦아냈다.
작업실은 난잡했다. 온갖 도구와 설계도면, 기름때 묻은 부품들이 뒤죽박죽 쌓여 있었지만, 강율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완벽한 질서로 보였다. 그의 시선은 방 한가운데 자리한, 아직 미완성인 거대한 기계에 고정되어 있었다. 황동과 구리, 강철이 정교하게 엮인 복잡한 구조물. 중앙에는 에테르 흐름을 증폭시키는 핵심 장치가 섬뜩한 푸른빛을 희미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돼.”
그는 중얼거렸다. 지난 5년, 청춘과 영혼을 바쳐 매달린 그의 모든 것이 이 ‘에테르 증폭 엔진’에 담겨 있었다. 이 엔진이 완성되면, 테라의 모든 증기 기관은 과거의 유물이 될 터였다. 더 깨끗하고, 더 강력하며, 무한한 동력을 약속하는 혁명. 사람들은 강율을 괴짜라고 불렀지만, 그의 친구 하준만은 달랐다.
때마침 작업실 문이 삐걱이며 열리고, 하준이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말끔한 차림에, 싱글거리는 미소. 그의 손에는 갓 구운 빵과 따뜻한 커피가 들려 있었다.
“아니, 이 새벽까지 또 밤을 새운 거야? 이러다 과로사하겠네, 강율.”
하준이 커피잔을 건네며 말했다. 강율은 피곤에 절은 얼굴로 웃었다.
“거의 다 왔어, 하준. 오늘 밤이 될 것 같아. 마지막 조정을 끝냈어. 이제 에테르 흐름을 안정화시키는 장치만 연결하면 돼.”
하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드디어? 우리가 해낸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기쁨과 흥분이 섞여 있었다. 강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해낸 거야. 이 엔진이 완성되면, 우리 둘의 이름은 테라의 역사에 영원히 새겨질 거야. 약속했잖아, 하준. 함께 세상을 바꾸자고.”
하준은 강율의 어깨를 툭 치며 활짝 웃었다. “그럼! 당연하지! 세상이 달라지는 걸 지켜보자고. 좋아, 이젠 쉬어. 마지막 작업은 내가 보조할 테니, 자네는 잠시 눈이라도 붙여.”
강율은 하준의 제안에 고맙게 생각했다. 하준은 항상 세심하게 강율을 챙겼다. 그의 사업 수완 덕분에 연구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복잡한 대외 업무도 도맡아 처리했다. 강율은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것도 하준의 덕분이었다.
“고맙다, 하준. 정말 믿을 수 있는 건 너뿐이야.”
강율은 그렇게 말하며 작업실 구석의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 하준은 강율의 등을 토닥여주고는 엔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강율은 그의 따뜻한 손길과 웅성거리는 엔진 소리에 금세 잠이 들었다.
***
얼마나 잠들었을까. 섬뜩한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강율은 눈을 번쩍 떴다. 작업실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공기 중에 뭔가 달라진 기운이 흘렀다. 엔진 소리는 멈춰 있었고, 대신 금속이 부딪히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준…?”
강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하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엔진 앞에 서서, 손에 들린 커다란 공구로 무언가를 뜯어내고 있었다. 강율은 이상한 예감에 심장이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하준, 뭘 하는 거야? 아직 완성되지 않았잖아.”
강율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준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강율이 알던 친근한 미소 대신, 차갑게 비웃는 듯한 표정이 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엔진의 가장 중요한 핵심 부품, 에테르 증폭 코어가 들려 있었다. 푸른빛을 잃고 칙칙하게 빛나는 코어가 강율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완성이라니, 강율. 자네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나?”
하준의 목소리는 섬뜩하리만큼 냉정했다. 강율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 하준, 설마…”
“설마라니. 이 엔진은 이제 내 것이야. 자네는 그저… 훌륭한 도구였을 뿐이지.”
하준은 강율을 비웃듯 코어를 한 손에 든 채, 다른 손으로 작업실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강율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의 평생을 담은 설계도면과 연구 일지가 갈기갈기 찢겨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엔진 주위에는 강율이 미처 보지 못했던 다른 손때 묻은 공구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누군가가 엔진을 해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하준, 우리가 함께 만든 거잖아! 우리의 꿈이잖아!”
강율은 비틀거리며 하준에게 다가갔다. 절망과 분노가 뒤섞여 그의 목소리를 쥐어짰다.
“꿈? 하하하! 꿈은 좋지. 하지만 현실은 달라. 강율, 자네는 너무 순진해. 이 세상은 자네처럼 천재적인 재능만으로는 굴러가지 않아. 비즈니스와 정치가 필요하다고.”
하준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낯선 악마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나는 자네의 기술을 이용했을 뿐이야. 이 엔진의 특허는 이미 내 이름으로 등록되었지. 자네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야. 아니, 오히려… 자네의 과오로 이 핵심 부품이 사라졌다고 보고될 거야. 자네는 한순간에 기술 유출범으로 몰릴 수도 있겠군.”
하준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강율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믿을 수 없었다. 지난 5년간, 함께 웃고 울었던 친구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네가…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하준!”
강율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하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하준은 가볍게 몸을 피했고, 그 순간 작업실 문이 다시 열리며 건장한 경비병 두 명이 들이닥쳤다.
“이봐, 강율 씨. 지금 당장 이 불법 시설에서 나오시오. 그리고 이 기술 유출 건에 대해선 조사를 받아야 할 겁니다.”
경비병들이 거친 손길로 강율의 어깨를 붙잡았다. 강율은 발버둥 쳤지만,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하준은 코어를 든 채 씨익 웃으며 경비병들을 향해 손짓했다.
“이런, 강율 씨가 과로로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요. 부디 조심해서 다뤄주세요. 그래도 한때는 제 소중한 동료였으니까요.”
그는 동료라는 단어를 묘하게 강조하며 조롱하듯 말했다.
***
경비병들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강율의 눈에 작업실 한쪽 구석에 걸려 있던 낡은 사진 한 장이 들어왔다. 젊은 시절, 패기 넘치던 두 남자가 어깨동무를 하고 활짝 웃고 있는 사진. ‘함께 세상을 바꾸자!’라고 적힌 글귀가 먼지에 바래 희미해져 있었다.
강율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사람의 얼굴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준. 친구라는 가면을 쓴 채, 그의 모든 것을 짓밟아버린 배신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그의 심장 속에는 이제 차갑고 단단한 맹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기다려, 하준. 네가 빼앗아 간 모든 것, 그 이상의 고통을 돌려줄 때까지. 나는 죽지 않아.”**
잿빛 증기가 도시를 뒤덮는 새벽, 강율의 눈빛은 복수심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