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민지는 낡았지만 익숙한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다. 희미하게 복도등이 깜빡이는 틈으로 익숙한 그녀의 202호가 드러났다. 긴 하루의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다. 투박한 가죽 가방을 소파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 현관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구두를 발끝으로 정리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시원한 물 한 잔이 간절했다.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병을 꺼내는데, 무언가 쎄한 기운이 등골을 스쳤다. 착각이겠거니, 어두워서 그런 거겠지. 별 생각 없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차가운 액체가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젠장, 피곤해 죽겠네.”
중얼거림과 함께 주방 등을 껐다. 거실은 현관의 복도등 덕분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늘 보던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오늘은 그림자의 농도가 유독 짙게 느껴졌다.
욕실로 향하려던 발걸음이 멈췄다.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리모컨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민지는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퇴근하기 전 소파 위에 가지런히 두었던 것 같은데?
“설마, 내가 떨어뜨렸나?”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찾았다. 플래시를 켜 바닥을 비추며 리모컨을 주웠다. 건전지 덮개가 살짝 벌어져 있었다. 단순한 우연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시 소파에 올려놓았다.
욕실에서 세수를 마치고 나오자, 거실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겨울바람이 들이닥치며 얇은 커튼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민지는 순간 얼어붙었다. 분명, 분명 외출하기 전 창문을 굳게 닫고 나갔는데.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해서 잠금장치까지 확인하고 나섰던 기억이 생생했다.
“누가 들어왔나?”
심장이 쿵쾅거렸다. 거실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스탠드를 켜자, 희미한 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창문을 닫으려고 다가가는데, 닫힌 문틈 사이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문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뭐야?”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귀를 기울였다. 202호는 오래된 아파트였지만 방음이 꽤 잘 되는 편이었다. 옆집 소리가 이렇게 선명하게 들릴 리 없었다. 혹시 위층인가?
그때였다. 닫힌 현관문 쪽에서 ‘덜컥’ 하는 소리가 났다. 민지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방문객이 올 시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배달을 시킨 적도 없었다. 잠금장치를 분명 걸어두었는데…
천천히 현관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것 같았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순간, ‘끼이익’ 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문이 안쪽으로 스르륵 열렸다. 닫혀있던 문이 스스로 열린 것이다!
“으아악!”
민지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닫혀있던 현관문이 그녀의 눈앞에서,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열렸다. 공포가 온몸을 지배했다.
현관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두운 복도만이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민지는 보았다. 문이 열리는 순간, 안쪽 문고리가 비틀거리며 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마치 투명한 손이 그걸 돌린 것처럼.
“아니야, 내가 착각한 거야. 바람 때문에… 바람 때문일 거야!”
떨리는 손으로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 아파트에 이사 온 지 3년째였다.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안정을 찾으려 애쓰며 다시 침실로 향했다. 잠이 들기 전까지는 이 끔찍한 기분을 잊고 싶었다. 침대에 몸을 던지자, 머리맡 협탁에 놓여 있던 탁상시계가 ‘딸깍’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것도 바닥이 아니라 침대 위로.
“맙소사…”
민지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 시계는 멀쩡했다. 마치 누군가 정확히 그녀가 누운 자리로 던져 놓은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차가워진 것 같았다. 목덜미와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그때, 침대 위, 그녀의 발치에서 이불이 스르륵 움직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 아래로 파고드는 것처럼. 이불이 움찔거리더니, 아주 천천히,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끌려 내려갔다.
“누, 누구세요…?”
민지의 목소리는 파리하게 떨렸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에 그녀는 더 이상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불이 완전히 발아래로 내려가자, 침대 매트리스가 움푹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 그 자리에 앉는 것처럼.
그녀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침대 발치, 이불이 사라진 자리를 응시했다. 그리고 보았다. 매트리스 위에 선명하게 남은, 사람의 엉덩이가 앉았던 것 같은 깊은 자국.
동시에, 귓가에 차가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 *이제, 나랑 같이 있어줘.*
목소리는 뼈 속까지 스며드는 듯 차갑고, 동시에 끈적했다. 민지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저 눈동자만이 공포에 질려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아파트에, 무언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지금 그녀와 함께 침대에 앉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