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어둑한 그림자가 짙게 깔린 미궁의 심장부, 하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너져 내린 석벽 틈새로 몸을 구겨 넣었다. 몇 시간째 이어지는 추적을 겨우 따돌린 참이었다. 낡은 횃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불빛은 주변의 음습한 기운을 더욱 강조할 뿐이었다. 이곳은 ‘어둠의 심연’이라 불리는 미궁에서도 가장 깊고 위험한 구역. 평소 같으면 그림자 한 조각도 발 들이지 않을 곳이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젠장… 끝도 없잖아.”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며칠 밤낮을 헤맨 탓에 육체는 물론 정신까지 피폐해진 상태였다. 벽에 기대 주저앉은 하진의 눈에, 횃불의 흔들리는 불꽃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저 광물 조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벽면에 조각된 문양들 사이에서, 아주 미약하게, 맥동하는 듯한 빛이었다.
“뭐지?”
호기심은 위험한 상황에서도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본능이었다. 하진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다가갔다. 손으로 벽을 더듬자, 겉보기엔 매끄러웠던 석벽의 일부가 어딘가 어색하게 들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먼지 쌓인 틈새에 손가락을 넣어 힘을 주자, ‘끼이이익’ 하는 끔찍한 마찰음과 함께 석벽의 일부가 안쪽으로 밀려들어 갔다.
그 뒤에는 놀랍게도 또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바깥 미궁의 음습함과는 달리, 이곳은 압도적인 정적과 함께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을 지니고 있었다. 먼지 한 톨 없는 깨끗한 공기. 그리고 공간 중앙에 우뚝 솟은 검은색 제단.
하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곳은 어떤 지도에도, 어떤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은 미지의 장소였다. 저 제단 위에는 분명, 뭔가 있을 터였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제단 가까이 다가갔다. 제단의 표면은 마치 흑요석처럼 매끄러웠고, 그 위에 놓인 것은…
거대한 비석이었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높이. 표면에는 이 세계 그 어떤 문명에서도 본 적 없는 기묘한 문자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푸른빛과 붉은빛이 뒤섞인 오묘한 색채의 빛이 그 문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비석 자체가 거대한 심장처럼 박동하는 것 같았다.
“이게… 뭐야.”
불안감과 동시에 가슴을 조여 오는 압도적인 경외감. 하진은 홀린 듯 비석에 손을 뻗었다. 차가울 것이라 예상했던 비석의 표면은 의외로 미지근했다. 손끝이 비석의 표면에 닿는 순간, 비석에 새겨진 모든 문자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일제히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잉-!**
마치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하진의 몸은 순식간에 강력한 에너지에 휩싸였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고,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영상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까마득한 옛날, 이 세계를 뒤덮었던 거대한 마력의 흐름.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존재의 외침.
세계를 창조하고 파괴했던 절대적인 힘의 잔재.
그리고… 누군가의 절규.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송두리째 뒤바뀌는 듯한 고통과 함께 엄청난 양의 정보가 그의 의식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과거의 기억, 미래의 조짐, 알 수 없는 지식들이 뒤섞여 그의 정신을 격렬하게 흔들었다. 마치 수천 년의 세월을 한순간에 살아낸 듯한 기분이었다.
“크으으… 으윽…!”
하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신음했다.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의 손은 비석에 단단히 달라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비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점점 더 강렬해져 이제는 푸른색과 붉은색의 경계가 사라진 순수한 백색광이 되었다.
**콰아앙!**
공간을 뒤흔드는 폭발음과 함께 백색광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하진의 몸이 제단에서 튕겨져 나갔다. 등 뒤로 단단한 벽이 부딪히는 충격과 함께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하진은 축축한 냉기 속에서 눈을 떴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감각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마치 몸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샘물이 솟아나는 듯한, 혹은 강력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생경한 느낌. 그리고 아까의 폭발로 인해 무너져 내린 석벽 파편들 사이에서, 그의 손바닥이 희미하게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내… 손이?”
놀라서 손을 펴보았다. 손바닥 중앙에 아주 작은 푸른색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까 비석에서 봤던, 알 수 없는 고대 문양 중 하나였다. 이 문양이, 이제 그의 몸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그때였다.
**쉬이이이익… 크르르르…**
정적이 지배하던 공간 저편에서, 마치 잠들어 있던 거대한 짐승이 꿈틀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더 또렷해지고, 압도적인 존재감이 공간을 서서히 잠식하기 시작했다. 하진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까 그 비석의 힘을 우연히 건드린 것은, 단순히 그에게 새로운 힘을 부여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동시에, 이 미궁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깨워버린 것이다.
‘젠장… 대체 뭘 건드린 거야?’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새로운 힘의 감각과, 동시에 엄습해오는 미지의 공포. 하진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푸른빛이 희미하게 감도는 손바닥이 이제 그의 새로운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 현실은 그에게 닥쳐올 거대한 폭풍의 전조에 불과했다.
저 깊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망쳐야 했다. 아니, 도망칠 수 있을까? 하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도 모르게 발동된 고대의 힘이 가져올 거대한 파문에 맞서기 위해,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거대한 공포에 직면해야 했다.
미궁의 가장 깊은 곳, 태초의 어둠 속에서 마침내 눈을 뜬 존재가, 그를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