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언제나 죽음과 공존했다. 바깥세상은 이제 더 이상 해를 품지 않는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아파트 13층, 지훈의 작은 안식처만큼은 아직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안전지대라고 믿어왔다. 적어도, 오늘 밤 전까지는.
창문 밖은 어둠에 잠긴 도시의 실루엣이 펼쳐져 있었다. 간혹 저 멀리서 섬광이 터지거나, 정체 모를 비명이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훈은 애써 그런 소리들을 외면하며 차가 식어버린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 지독한 불면증은 그를 몇 주째 괴롭히는 고통이었다. 낡은 플라스틱 시계는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주방 쪽에서 ‘따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고개를 돌렸다. 낡은 형광등 안정기가 불안정한 소리를 내며 깜빡이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시선 앞에 놓인 낡은 태블릿 화면에 집중했다. 하지만 잠시 후, 주방등이 홀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치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젠장, 전력 상태도 불안정한 건가.”
지훈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벅터벅 주방으로 걸어가 손으로 스위치를 몇 번 눌러봤지만, 형광등은 여전히 미친 듯이 제멋대로 깜빡였다. 결국 그는 차단기를 내리는 걸 택했다. 주방은 순식간에 암흑에 잠겼다. 눅진한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한기가 그의 팔을 스쳐 지나갔다.
“뭐야, 에어컨도 안 켰는데.”
그는 팔을 문지르며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거실은 태블릿 화면이 내뿜는 푸른빛만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감각은 더욱 예민해지는 법. 지훈의 귀에 미세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긁적, 긁적.’
벽에서 나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쥐라도 있나 싶었다. 낡은 아파트였으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리는 일정하지 않았다. 규칙적으로 긁는 것이 아니라, 마치 무언가 단단한 것에 손톱을 세워 마구 긁어대는 듯했다. 그것도, 자신의 침실 벽에서.
지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구 있어요?” 그는 무심결에 소리쳤다. 목소리가 삑사리를 내며 갈라졌다. 스스로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 아파트엔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한 달 전, 아랫집에 살던 노부부는 약탈자들의 습격에 희생당했고, 윗집과 옆집은 진작에 비어 있었다. 바깥세상은 진작에 아비규환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제집에 숨어들어 벽을 긁고 있겠는가.
소리는 멎었다.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지훈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고요. 완벽한 고요가 다시 찾아왔다. 그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각목을 움켜쥐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늘 곁에 두는 것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바깥세상의 괴물들보다 지금 당장 눈앞에 없는 미지의 존재가 더 두려웠다.
‘젠장,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 들리는 건가.’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태블릿을 보려는 순간이었다.
‘삐이익… 철컥.’
냉장고 문이 열리는 소리. 그것도 아주 천천히, 마치 손으로 직접 문을 잡아당기듯이. 그리고 이내 다시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혔다.
지훈은 얼어붙었다. 이번엔 명백한 소리였다. 착각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손에 땀이 흥건한 각목을 든 채 주방을 노려봤다. 어둠 속에서 냉장고의 육중한 그림자가 보였다. 불이 꺼져 칠흑 같은 그곳에서, 과연 무엇이 그 문을 열었단 말인가.
“누… 누구세요?” 지훈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공기가 그의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치 누가 그의 바로 뒤에 서 있는 듯한 느낌.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거실 한편, 늘 같은 자리에 놓여 있던 낡은 탁상시계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유리 케이스가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흩뿌려져 있었다. 시계는 멈춰 있었다. 정확히 두 시 칠 분을 가리키며.
지훈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각목을 휘둘렀다. 텅 빈 허공을 가르는 둔탁한 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그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쥐나, 배관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아니 *무언가*가 그와 함께 이 아파트에 있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목구멍이 바싹 말라붙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은 주방에서부터 거실, 그리고 다시 침실 쪽으로 향하는 복도를 훑었다. 복도는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 끝에 있는 침실 문은 아주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아까 분명히 닫아두었었는데.
그는 침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한 발짝. 각목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복도는 한기가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쿵.’
발소리가 아니었다. 침실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지훈은 망설였다. 도망쳐야 할까? 하지만 어디로? 이 아파트는 그의 마지막 피난처였다.
“나와!” 지훈은 용기를 짜내 소리쳤다. “누구든 상관없어!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나타나!”
침실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삐걱이는 경첩 소리가 마치 비명처럼 들렸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침실 안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의 침대, 낡은 옷장, 그리고… 옷장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
그것은 옷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늘어져 바닥에 닿을 듯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벽에 걸린 옷처럼 보였지만, 지훈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옷이 아니었다. 분명 사람의 머리카락이었다. 누군가 옷장 안에 숨어,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지훈은 각목을 꽉 쥐고 침실 문 앞으로 다가섰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있었다. 손전등을 켜려 했지만, 손이 너무 떨려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은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매달려 있었다.
“누구냐고!” 지훈이 다시 한번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공포에 질려 있지 않았다. 차라리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머리카락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 았다……”
아주 나지막하고 쉬어 있는, 마치 먼지 쌓인 인형의 목소리 같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웃음소리. 사람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텅 빈 공간을 울리는 듯한 기괴한 웃음소리가 옷장 안에서 터져 나왔다.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하얀 눈동자가 지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것은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수많은,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었다. 그것들이 엉겨 붙어 마치 검은 머리카락처럼 보였던 것이다. 옷장 안은 사람이 아니라, 온몸이 기괴한 손가락으로 뒤덮인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손가락들 사이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눈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방향을 응시하며, 기괴한 웃음을 짓는 눈동자들이었다.
옷장 안의 형체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손가락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마치 벌레 떼가 기어가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옷장 문이 ‘쾅!’ 소리와 함께 닫혔다.
지훈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뒤로 나자빠졌다. 닫힌 옷장 문 뒤에서, 다시 기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더 크게, 더 명확하게 들려왔다. 마치 바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그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다리는 풀려 주저앉아 버렸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바깥세상의 괴물들은 차라리 눈에 보이는 적이었다. 하지만 이 아파트 안의 존재는…
옷장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 틈이 생겼다. 그 틈 사이로, 아까 그 수많은 손가락들이 삐져나오려 하는 것이 보였다. 마치 문틈으로 기어 나오려는 거대한 벌레처럼.
지훈은 공포에 질려 옷장 문만 응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 닫힌 옷장 문 위에서, 누군가 펜으로 그린 듯한 글씨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넌, 이제 여기서 못 나간다.]
검붉은 글씨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글씨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옷장 문이 완전히 열리며 칠흑 같은 어둠이 지훈을 집어삼킬 듯 쏟아져 나왔다. 그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그를 향해 번뜩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