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막: 망자의 성
공기 자체가 독이었다. 단순히 부패의 냄새가 숨통을 조여서만이 아니었다. 모든 호흡 속에 스며든 절망의, 무겁고 끈적한 기운 때문이었다. 한때 이천만 명의 심장이 고동치던 거대한 도시 서울은, 이제 망자들의 굶주린 아우성만이 울려 퍼지는 거대한 무덤이 되어 있었다. 앙상하게 뼈대를 드러낸 빌딩들은 황폐한 하늘을 긁었고, 한때 빛나던 아스팔트 도로는 깨진 유리와 검붉은 핏자국, 그리고 이름 모를 잔해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곳만은 여전히 옛 무림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었다. 한성 중앙에 위치한, 철옹성처럼 높이 솟은 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무림맹 총단. 이곳은 인류가 발버둥 쳐 지켜낸 마지막 희망의 보루였다. 아니, 무림인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젠장, 또 증원인가!”
총단 북쪽 벽 위에서 망루를 지키던 한 사내가 욕설을 내뱉었다. 아래에는 끝없이 밀려드는, 살과 피를 탐하는 ‘것들’의 검은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놈들은 마치 살아있는 시체들이 땅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열흘째,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맹렬한 공세가 이어지고 있었다. 성벽은 수십 번 부서지고 고쳐졌다.
이진우는 그들의 비명을 들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뒤편, 총단의 넓은 마당에서는 오늘 ‘천하제일 무술 대회’의 막이 오를 예정이었다. 망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기껏 무술 대회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총단 안쪽은 밖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무림 각 문파의 기치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수백 명의 무림 고수들이 삼삼오오 모여 검을 닦거나, 기운을 조절하며 대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절망의 그림자가 역력했지만, 동시에 무인 특유의 비장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사부님 말씀으로는, 이번 대회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하시더군요.” 옆에서 어린 문하생 하나가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새파란 소년의 손에는 작은 검이 쥐여 있었지만, 그 눈은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진우는 피식 웃었다. “희망? 웃기는 소리. 살아남는 게 희망이다, 꼬마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그는 등을 기댄 기둥에서 몸을 떼고, 눈을 가늘게 떴다. 마당 중앙에 높이 세워진 비무대(比武臺)가 보였다. 평소 같으면 축제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을 그곳은, 지금은 침묵의 장막에 휩싸여 있었다. 대신, 피비린내와 긴장감만이 팽팽하게 감돌았다.
“이제 곧 개막식이 시작된다! 모두 비무대 앞으로 집합하라!”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림맹의 맹주, 천마신군(天魔神君)이었다. 그의 주변으로는 각 문파의 장로들과 고수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한 시대의 무게가 짊어져 있었다. 이진우는 한숨을 쉬며 무리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이번 대회는 단순히 강자를 가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맹주가 공식적으로 선포했듯, 우승자는 ‘천하패권’을 쥐게 될 터였다. 멸망 직전의 세상에서, 그 패권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림맹의 모든 잔여 병력과 물자를 총괄하는 권한, 그리고 최후의 비책을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 그 비책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그것이 인류를 구할 수도, 혹은 마지막 불씨마저 꺼뜨릴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비무대 위로 맹주가 올랐다. 그의 백발은 한때 강렬한 검은 머리였음을 짐작케 했지만, 이제는 전쟁의 흔적처럼 희끗희끗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지만, 깊은 피로가 드리워져 있었다.
“무림의 용사들이여!” 맹주의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이 자리에 모인 그대들은, 망자의 물결 속에서 피어난 마지막 희망이다. 한때 우리는 태평성대를 구가했고, 무림의 도를 논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세상은 파멸의 그림자에 갇혀 있다.”
맹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저 밖의 ‘것들’은 이미 전 세계를 집어삼켰다. 우리가 지켜낸 이 한 점 땅만이 유일한 생존의 보루다. 우리는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고, 수많은 동료를 잃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었다.
“이번 천하제일 무술 대회는 단순히 최강자를 가리는 잔치가 아니다. 이 대회의 우승자에게는, 무림맹의 모든 권한과 함께,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마지막 비책을 실행할 권리가 주어진다. 그 비책은,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열쇠가 될 수도 있고, 혹은….”
맹주는 다시 말을 멈췄다. 그의 눈빛이 비장하게 빛났다.
“혹은, 인류의 마지막 역사를 장식할 최후의 선택이 될 것이다. 이것은 도박이다. 실패하면 모두 죽는다. 성공하면, 우리는 다시 새벽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장내가 술렁거렸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희망과 절망, 그리고 알 수 없는 비장함이 뒤섞인 표정들이었다. 이진우는 맹주의 말을 들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누군가의 등에 짐을 지우려는군. 그는 저 비책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필시 거대한 희생을 요구할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이제 첫 번째 대결을 시작한다!” 맹주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호북 황룡파의 ‘광풍검’ 서강(徐康) 대, 하남 흑사문 ‘독수’ 조진우(趙震宇)!”
이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진우? 나와 이름이 비슷한데. 피식 웃음이 났다. 이런 세상에 이름이 비슷한 자를 만나게 되다니. 그는 비무대 중앙으로 향하는 서강과 조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발걸음에서 비장함과 결의가 동시에 느껴졌다. 그리고 이진우는 알았다. 저 비무대 위에 오르는 순간, 승패를 떠나 모두가 한 걸음 더 깊은 나락으로 발을 들이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의 차례는 아직 멀었지만, 이진우는 이미 검집 안에서 차갑게 숨 쉬는 자신의 검, ‘고뇌(苦惱)’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