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한 도시의 심장부, 잿빛 하늘 아래 덩그러니 남은 아파트 건물은 거대한 관 같았다. 그 관의 한쪽, 12층의 작은 틈새에 지훈이 살았다. 며칠째 비가 오락가락했다. 창밖은 먹물처럼 어두웠고, 간간이 번개 불빛이 터질 때마다 녹슨 철골 구조물과 무너진 잔해가 뼈대처럼 드러났다. 그의 세상은 그 창문 너머의 죽은 도시와, 이 열 평 남짓한 공간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낡은 라디오에서는 지직거리는 노이즈만이 흘러나왔다. 배터리가 거의 다 된 모양이었다. 지훈은 한숨을 쉬며 다 떨어진 캔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한때는 세련된 디자인을 자랑했을 플라스틱 식탁은 이제 긁히고 색이 바래 누런 때가 앉아 있었다. 식수 통을 기울여 마지막 남은 물을 조심스럽게 마셨다. 혀끝에 닿는 쇠 맛이 씁쓸했다. 내일은 기필코 저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마트 잔해를 뒤지든, 버려진 상점가를 헤매든, 물을 찾아야만 했다.
그때였다. 쨍그랑.
작은 소리였지만, 비명처럼 날카롭게 지훈의 귀를 찢었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깡통 컵이 바닥으로 떨어져 구른 소리였다. 컵은 찌그러졌고, 바닥에는 물방울이 몇 개 튀어 있었다. 지훈은 멍하니 컵을 바라봤다. 그는 방금 컵을 놓았고, 손을 뗀 지 채 1분도 되지 않았다. 컵은 식탁 한가운데에, 완벽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젠장, 피곤해서 헛것이 들리나.”
지훈은 중얼거렸다. 피로가 극에 달하면 종종 이런 환각이나 환청을 겪곤 했다. 그는 쭈그리고 앉아 컵을 주워 올렸다. 찌그러진 부분을 대충 펴고 다시 식탁 위에 놓았다. 어차피 이 컵밖에 쓸 게 없었다.
밤이 깊어졌다. 지훈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봤다. 곰팡이가 검은 얼룩을 만들고, 벽지는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었다. 그는 한 손에 녹슨 식칼을 쥐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불안했다. 바닥에 떨어진 컵 때문만은 아니었다. 뭔가… 계속해서 시선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스스스스.
천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쥐가 뛰어다니는 소리 같기도 했고, 바람에 무언가 흔들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지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쥐라면 상관없었다. 이 낡은 건물에 쥐는 흔한 존재였다. 하지만 바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외부에서 들어올 바람은 없었다.
“환청이군.”
그는 애써 부정했다. 잠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했다. 그러나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 부드러운 천을 바닥에 질질 끄는 듯한 소리.
지훈은 벌떡 일어났다. 식칼을 꽉 쥐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는 숨소리마저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이제는 천장이 아니라, 침대 아래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스스스스, 스스스스. 마치 뭔가가 침대 밑을 기어 다니는 듯한.
“누구야!”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소리도 멈췄다. 지훈은 침대 아래를 내려다봤다. 먼지 쌓인 바닥만이 보였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지훈은 극심한 피로감에 시달렸다.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눈 밑은 거무튀튀했고, 얼굴은 헬쓱했다. 식수를 찾아 나서야 했지만, 왠지 문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웠다. 어둠이 걷힌 후에도 그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부엌으로 향했다. 식량 창고로 쓰는 작은 다용도실 문이 열려 있었다. 지훈은 어젯밤 분명 문을 닫았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잠금쇠까지 걸어서. 하지만 지금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낡은 경첩이 삐걱거렸다.
“젠장, 깜빡했나.”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따금 기억력이 흐릿해질 때가 있었다. 스트레스 때문일 터였다. 다용도실 안을 살폈다.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며칠 전 겨우 얻은 통조림 몇 개가 선반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안심했다.
하지만 주방을 나서려던 순간, 발밑에서 뭔가가 바스락거렸다. 지훈은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는 통조림 뚜껑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 따고 버린 듯, 날카로운 가장자리가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지훈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는 다용도실 안의 선반을 다시 쳐다봤다. 통조림은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이 뚜껑은 어디서 온 거지? 그의 머릿속에 혼란이 휘몰아쳤다. 자신이 통조림을 따서 먹었나? 아니. 그는 마지막 통조림을 먹은 게 며칠 전인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뚜껑은 버렸었다.
그의 시선이 느리게 다용도실 문으로 향했다.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놓여 있던 통조림 뚜껑.
지훈은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 아파트 안에, 자신 외에 다른 존재가 있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낡은 계단을 내려갔다. 빗물 웅덩이를 피해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이 건물은 유일한 안식처였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위협받고 있었다.
폐허가 된 거리에서 그는 반나절 내내 식수를 찾아 헤맸다. 빈 건물들을 수색하고, 빗물 웅덩이를 필터로 걸러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그 아파트로 돌아가야만 했다. 어디에도 다른 안전한 곳은 없었다.
어둠이 내린 후, 지훈은 간신히 자신의 아파트 문 앞에 도착했다. 숨을 고르며 녹슨 손잡이를 잡았다. 열쇠를 돌리려던 순간, 문이 스르륵 열렸다.
“…”
지훈은 할 말을 잃었다. 분명 문을 잠그고 나왔다. 언제나 그랬다. 그의 유일한 규칙이었다. 그런데 문은 열려 있었다. 삐걱이는 문틈으로 어둠이 흘러나왔다. 그는 손에 든 칼을 꽉 쥐었다. 망설였다. 돌아갈까? 하지만 어디로?
결국 그는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빈 거실은 싸늘했다. 묵직한 공기가 그를 짓눌렀다. 현관문을 등지고 선 지훈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때, 주방 쪽에서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소리 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주방은 난장판이었다. 식탁은 뒤집혀 있었고, 컵과 접시들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간신히 얻었던 통조림들이 짓밟혀 터져 있었고, 그 내용물이 바닥에 흥건했다.
“이런… 씨발.”
그는 주저앉을 뻔했다. 허탈감과 분노가 뒤섞였다. 며칠을 버틸 식량이 단숨에 사라졌다. 그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는 자신의 식량을 망가뜨린 이 존재를,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무너진 식탁을 일으켜 세우고, 바닥의 잔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식탁 아래에서, 낡은 수첩 하나가 발견되었다. 지훈의 수첩이었다. 몇 달 전, 식량과 물품의 목록을 정리하다가 잃어버렸던 수첩이었다. 그는 그것을 찾으려고 꽤 애를 썼었다.
수첩을 집어 들자, 찢긴 페이지들이 펄럭였다. 무언가 쓰여 있었다. 익숙한 자신의 글씨체였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지훈은 순간 숨이 막혔다. 이 문장을 쓴 기억이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식량이 줄어들고 있다. 나는 먹지 않았다.’
‘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잠갔다.’
‘밤마다 소리가 들린다. 천장 위에서, 침대 아래에서. 쥐가 아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 모든 기록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쓴 것 같았다. 하지만 글씨체는 분명 그의 것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 단 한 문장이 크게 쓰여 있었다.
‘나가! 제발 나가! 이곳은 내 것이 아니야!’
그 순간, 거실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쿵! 마치 무언가 거대한 것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지훈은 수첩을 떨어뜨렸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주방을 뛰쳐나가 거실로 향했다.
거실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낡은 소파는 찢겨서 내용물이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고, 텔레비전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들은 모두 떨어져 깨져 있었고,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빗방울이 거친 바람을 타고 안으로 들이쳤다.
“누구야! 나오란 말이야!”
지훈은 미친 사람처럼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는 사방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파괴는 누가 한 짓인가?
쿵! 쿵! 쿵!
이번에는 안방에서 소리가 났다. 규칙적이고 둔탁한 소리. 마치 누군가 무언가를 힘껏 내리치는 듯한. 지훈은 망설임 없이 안방으로 달려갔다.
안방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침대는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고, 바닥에는 낡은 옷가지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 마치 누군가 던져놓은 것처럼, 커다란 돌멩이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지훈은 돌멩이를 노려봤다. 그때, 침대 아래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스스스스.
그는 침대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마치 거미 같은 형체였다. 하지만 훨씬 거대하고, 어둡고, 불분명했다. 그것은 형체가 없는 연기 같으면서도, 분명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지훈은 식칼을 든 손을 덜덜 떨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그의 온몸을 덮쳤다. 이건 쥐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이 아파트에 깃든, 그를 미치게 만들고 있는 무언가였다.
그때, 그의 손에 쥐여 있던 식칼이 갑자기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놀란 지훈이 손을 바라봤다. 아무도 그의 손을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식칼은 분명 그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스스스스.
침대 아래의 형체가 조금 더 앞으로 기어 나왔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작은 점이 빛나는 듯했다. 마치 눈처럼.
“이곳은… 내 집이야…”
지훈은 간신히 쥐어짜듯 말했다. 목소리가 찢어졌다.
그의 말에, 침대 아래의 연기 같은 형체가 움찔했다. 그리고 방 안의 모든 물건들이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옷가지들이 춤추듯 날아다녔고, 벽의 곰팡이들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깨진 액자 조각들이 바닥에서 튀어 올랐다.
지훈은 혼비백산하여 뒷걸음질 쳤다. 공포로 굳어진 그의 시선은 침대 아래의 형체에 박혀 있었다.
그러자, 침대 아래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쉬익, 쉬익. 바람 빠지는 듯한, 하지만 분명한 속삭임.
“아니… 이곳은… 너의 것이 아니야…”
그의 목소리는 지훈의 것이었다. 지훈의 귓가에 속삭이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소름 끼치는 그의 목소리.
지훈은 비명을 지르며 안방을 뛰쳐나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의 세상은 무너져 내렸다. 그는 이 아파트에 홀로 남겨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유령 같은 존재와, 자신의 육신 속에 잠식된 기억과 싸워야 했다.
그는 현관문으로 향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바깥은 여전히 먹물처럼 어두웠고,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이 아파트에 머무를 수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미쳐버리거나, 혹은… 이 아파트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지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빗속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뒤로, 12층 아파트의 열린 문틈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 쉬익, 쉬익,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속삭이는 것 같았다.
“돌아와… 돌아와…”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였다. 떠나는 자신을 붙잡는, 섬뜩한 자신의 목소리. 지훈은 그 속삭임을 등지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비는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고, 세상은 이제 그에게 어떤 안식처도 내어주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 어둠이 자신을 완전히 삼키기 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