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정적 속의 속삭임

지훈은 묵직한 침묵 속에서 눈을 떴다. 아침이라고는 하나, 창밖은 늘 회색빛이었다. 한때 활기로 넘치던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이제 뼈대만 앙상한 유령들의 행진처럼 보였다. 부서진 창문들 사이로 스며드는 음울한 빛만이 이곳이 더 이상 인류의 보금자리가 아님을, 그저 거대한 폐허 속 한 조각일 뿐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낡은 매트리스 위에서 몸을 일으킨 지훈은, 뻣뻣한 목을 주무르며 주방으로 향했다. 플라스틱 물통 바닥에 남은 끈적한 물 몇 모금을 입에 털어 넣었다. 어젯밤 힘들게 찾아낸 건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그는 창밖을 다시 한번 응시했다. 아래층은 먼지 쌓인 자동차 잔해들로 가득했고, 그 너머로 텅 빈 상점가와 부서진 도로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지난 몇 년간, 이 풍경은 그의 유일한 일상이자 생존의 척도가 되었다.

“젠장, 오늘도 똑같네.”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마저 이 넓은 아파트 안에서 메아리쳤다. 전기는 들어올 때보다 끊기는 날이 더 많았고, 수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끊겼다. 냉장고는 거대한 장식품으로 변했고, 휴대폰은 더 이상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하는 벽돌에 불과했다. 그나마 그의 고층 아파트는 비교적 안전한 편이었다. 감히 이 높이까지 올라올 생각을 하는 자들이 드물었으니까. 혹은… 올라올 만한 기력이 남은 자가 없거나.

정오가 가까워지자, 잿빛 하늘에 드물게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은 먼지 가득한 아파트 내부를 희미하게 밝혔다. 지훈은 늘 그랬듯이 남은 식량을 점검하고, 무기를 손질하며 하루를 보냈다. 낡은 부엌칼과 몽둥이, 그리고 어디서 주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녹슨 총 한 자루. 그의 유일한 동료들이었다.

“철컥.”

소리가 들린 것은 오후 세 시쯤이었다. 주방 싱크대 아래, 수납장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지훈은 손질하던 총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아침에 물통을 꺼내면서 열어두었던 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기로는 닫지 않았는데.

‘바람인가?’

오래된 건물이니 삐걱거리는 소리는 흔했다. 바람 한 점에도 삐걱거릴 수 있었다. 지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총을 들었다. 이 도시에 바람만큼 흔한 것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소리가 들렸다.

“탁.”

이번에는 거실 벽장 쪽에서 들려왔다. 지훈은 신경질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거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아무리 낡은 건물이라도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움직일 리는 없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 있냐?”

허공에 대고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메마른 정적뿐이었다. 쥐새끼나 바퀴벌레라도 들어왔나 싶어 벽장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텅 비어 있었다. 먼지 쌓인 텅 빈 선반과 옷걸이만이 그를 맞이할 뿐이었다.

‘젠장, 내가 너무 예민해졌나.’

고립된 생활이 길어지면서 환청에 시달리는 생존자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쩌면 자신도 그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훈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문을 닫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아파트는 더욱 깊은 그림자에 잠겼다. 지훈은 창고에서 찾아낸 낡은 양초에 불을 붙였다. 그 작은 불꽃만이 그의 외로운 세상에 유일한 빛을 드리웠다.

그때였다.

“와장창!”

주방에서 끔찍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훈은 벌떡 일어났다. 칼을 움켜쥐고 주방으로 달려갔다. 촛불을 든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아침에 물을 마셨던 낡은 유리컵이었다. 싱크대 옆 선반 위에 놓여 있었던 컵이, 마치 누군가 내던진 것처럼 산산조각 나 있었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그는 소리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 아파트에는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지난 몇 년간 이곳에서 혼자였다. 침입자라면 벌써 모습을 드러냈을 터였다.

그의 눈앞에서, 깨진 유리 조각들이 ‘스르륵’하고 미끄러지더니, 아무것도 없는 바닥 위에서 ‘ㄷ’자 모양으로 뭉쳐졌다. 그 조각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천천히 ‘ㅏ’ 모양을 만들었고, 이내 ‘ㄱ’이 될듯 말듯 흔들렸다.

지훈의 손에 들린 촛불이 바람도 없이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꺼졌다.

어둠이 아파트를 집어삼켰다. 완전히 암흑 속이었다. 지훈은 숨도 쉬지 못했다. 그의 귀에는 오직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터질 듯이 울리고 있었다.

“흐읍… 흐읍…”

공포에 질린 채 뒷걸음질 치던 그의 발이 무언가에 걸렸다. 낡은 식탁 의자였다. 그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손에 쥐고 있던 칼마저 놓쳐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귀 바로 옆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_“나가….”_

차가운 기운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한 목소리였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쉰 목소리. 속삭임이 아니라, 마치 온 힘을 다해 쥐어짜낸 듯한 섬뜩한 경고였다.

지훈은 벌떡 일어섰다. 몸을 떨며 벽에 등을 기댔다. 눈을 크게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칠흑 같은 어둠과,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 그리고 방금 들었던 섬뜩한 목소리의 잔상만이 그를 옥죄어왔다.

이건 환청이 아니었다. 분명히 들었다. 이건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그에게 직접 던진 메시지였다.

아파트의 모든 것이 삐걱거리고 흔들리는 것 같았다. 벽이 울리고, 천장에서 무언가 긁는 소리가 들렸다. 가구들이 제자리를 벗어나 움직이는 듯한 둔탁한 소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지훈은 미친 듯이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손잡이를 붙잡고 미친 듯이 돌렸다. 잠겨 있었다. 그는 문을 있는 힘껏 발로 찼다. 낡은 나무 문이 삐걱거렸지만 열리지 않았다.

“젠장! 열어! 열라고!”

절규하는 그의 목소리가 다시 메아리쳤다. 그러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마치 그를 가두려는 듯이.

그때, 거실 쪽에서 다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창문이었다. 낡은 유리가 산산조각 나며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는 소리.

차가운 밤바람이 거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 바람을 타고, 마치 희미한 형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기척이 지훈을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그는 느꼈다.

등골이 오싹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지훈은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둠 속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아파트에, 그와 함께 살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그가 이 아파트에서 나가기를 원했다.

지훈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극심한 공포가 그의 정신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벽을 짚고 주저앉았다.

거실 한가운데, 깨진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 아래, 그에게 속삭였던 바로 그 ‘존재’가…

아니,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선명하게 느껴졌다. 차가운 공기와 함께, 그의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거대한 그림자.

그리고 다시, 그 쉰 목소리가 온 아파트에 울려 퍼졌다.

_“사라져…”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