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무거웠다. 그 아래, 뼈대만 남은 고층 빌딩들이 거대한 상처처럼 솟아 있었다. 붕괴된 잔해들이 쌓인 길을 강태율은 묵묵히 걸었다. 낡은 배낭은 어깨를 짓누르고, 왼손에는 녹슨 도끼 자루가 익숙하게 들려 있었다.
“오빠, 저기…….”
뒤에서 따라오던 이솔아의 목소리가 갈라진 공기를 겨우 헤치고 들려왔다. 태율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퉁명스레 대답했다.
“또 뭔가 봤냐?”
“아니, 그냥…… 저 구름이 꼭 피 같아서.”
솔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저 멀리 지평선을 덮고 있는 붉은색 띠였다. 태양이 사라진 지 오래인 이 세계에서, 하늘은 종종 아무런 이유 없이 기괴한 색으로 물들곤 했다. 태율은 한숨을 쉬었다.
“피든 뭐든, 우린 어차피 똑같은 잿빛 하늘 아래 있어. 쓸데없는 생각 말고 발밑이나 잘 봐.”
솔아는 입을 삐죽거렸지만 더 이상 토를 달지는 않았다. 이 길고 지루한 생존 여정 속에서 그녀는 태율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일주일째 먹을 것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물은 이따금 고인 빗물이나 오염되지 않은 샘물에서 얻었지만, 식량은 점점 더 귀해졌다. 걷고, 또 걷고. 끝없는 폐허 속을 헤매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오빠, 저 건물은……?”
솔아가 이번엔 꽤나 멀쩡해 보이는 콘크리트 건물을 가리켰다. 벽면에 금이 가고 유리창이 깨지긴 했지만, 다른 건물들에 비하면 온전한 편이었다. ‘세진 백화점’이라는 빛바랜 간판이 비스듬하게 걸려 있었다.
태율은 한동안 그 건물을 응시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저런 폐허 속에서 멀쩡해 보이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솔아의 마른 얼굴과 그의 뱃속에서 들려오는 허기진 소리가 이성의 경고를 지웠다.
“가자.”
짧게 말하고 태율은 백화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솔아는 희망 어린 눈으로 그를 따라붙었다.
내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음산했다. 입구를 통해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곰팡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섞여 들었다. 바닥은 깨진 유리 파편과 뜯겨나간 상품 진열대 잔해로 어지러웠다. 천장은 일부 무너져 내려, 그 틈으로 잿빛 하늘이 창문처럼 조각조각 보였다.
“누군가 털어갔던 흔적은 없어 보이네.” 솔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겠지. 이런 곳까지 발 디딜 정신 있는 놈들은 진작 죽었거나, 더 큰 걸 쫓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니까.” 태율은 주변을 경계하며 대답했다. 그의 손에 들린 도끼 자루가 땀으로 축축해졌다.
그들은 1층을 훑었다. 의류 매장, 잡화 코너, 가전제품 코너. 모든 것이 텅 비어 있었다. 상품들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사라졌거나, 썩어 문드러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식품 코너였다. 보통 지하층에 있으니,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낡은 에스컬레이터를 발견했지만, 당연히 작동하지 않았다. 태율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먼저 내려갔다. 솔아는 그의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빛은 완전히 사라지고, 플래시 불빛에 의지해야 했다.
지하 1층. 식품 코너.
그 순간, 태율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공기 자체가 달라진 것 같았다. 눅눅한 습기와 알 수 없는 철컥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플래시를 비추자, 진열대가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몇몇 통조림 캔이 진열대 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었지만, 겉보기에는 온전했다.
“오빠, 저거 봐! 통조림이야!” 솔아가 흥분해서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울려 퍼지는 것 같아 태율은 그녀를 제지했다.
“조용히 해. 뭔가 이상해.”
태율은 진열대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정말 통조림 캔이었다. 육류 통조림, 과일 통조림.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놓여 있었다.
그때였다. 진열대 뒤편,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곳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였다. 그리고 그 빛과 함께,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수백 마리의 벌레들이 동시에 날개를 비비는 것 같기도 하고, 거대한 돌덩이가 서로 엇갈리며 갈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하고 비현실적인 소리였다.
솔아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태율이 빠르게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눈은 이미 어둠 속의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빛은 일렁였다. 빛이 비치는 곳의 벽과 바닥은 흐물거리는 것 같았다. 마치 현실의 천이 찢어져 다른 차원의 기괴한 풍경이 엿보이는 듯했다. 비현실적인 각도의 그림자들이 거기서 춤을 추고 있었다.
“보지 마.” 태율이 솔아의 귀에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것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었다. 저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저것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정신은 뒤틀리고 부서질 수 있었다.
태율은 통조림 캔들을 힐끗 보았다. 그 캔들 위에도, 희미하게 빛나는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기묘한 문양들이 서서히 새겨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먼지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알 수 없는 형상의 선들이었다.
“이건… 우리가 찾던 게 아니야.” 태율은 솔아를 끌고 뒤로 물러났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어둠 속의 일렁이는 빛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정형의 소리는 이제 그의 뇌를 직접 갉아먹는 듯했다. 환청과 환상이 뒤섞였다. 찰나의 순간, 그는 거대한 눈알이 번뜩이는 심연을 보았다. 그 눈은 그들을 보지 않았다.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오빠… 오빠 왜 그래? 빨리 통조림 가져가야…!”
솔아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그녀의 눈은 통조림 캔에 고정되어 있었다. 허기가 그녀의 이성을 잠식하고 있었다.
“안 돼!” 태율이 거칠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저건 먹는 게 아니야. 저건… 미끼야!”
그 순간, 벽에서 일렁이던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진열대 위의 통조림 캔들이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캔 표면에 새겨지던 기묘한 문양들이 더욱 선명해졌고, 캔들 사이로 검고 끈적이는 액체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그 액체는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며 빛을 반사했다.
솔아는 그제야 경악에 질려 몸을 떨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통조림 캔들이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숨을 쉬는 듯 부풀어 올랐다가 쪼그라들었다.
“뛰어!”
태율은 소리쳤다. 그는 솔아의 손을 잡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낡은 에스컬레이터를 두 칸씩 뛰어 올라갔다. 뒤에서는 기괴한 소리가 더욱 커지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검은 액체의 끈적이는 소리가 발소리를 뒤쫓는 듯했다.
지상으로 빠져나오자, 그들은 황급히 백화점을 벗어났다. 밖으로 나온 순간,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태율은 솔아를 부축한 채 비틀거렸다. 둘의 얼굴은 땀과 먼지로 범벅되어 있었고,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하아… 하아… 오빠, 그게… 그게 대체… 뭐야?” 솔아가 울먹이며 물었다.
태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그 기이한 빛과 소리, 그리고 통조림 캔 위에서 꿈틀거리던 문양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분명 이 세계가 아니었다. 혹은, 이 세계가 우리가 알던 세계가 더 이상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들은 백화점에서 멀리 떨어진 곳, 무너진 버스 정류장 잔해 옆에 주저앉았다. 잿빛 하늘은 여전히 무거웠고, 저 멀리 지평선을 덮은 붉은 구름은 마치 피 묻은 상처처럼 아물지 않고 있었다.
“저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는 자들을 유혹하는 존재야.” 태율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인간의 정신을 갉아먹고, 존재 자체를 오염시키는… 그런 류의 것.”
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공포와 함께 알 수 없는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우리는… 뭘 먹고 살아야 해?”
그 질문에 태율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잿빛 구름이 걷힌 틈으로, 어딘지 모르게 비틀린 형상의 달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달은 마치 거대한 눈처럼,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그 눈동자 속에는 무한한 공허와, 인간의 모든 고통을 비웃는 듯한 차가운 무관심만이 존재했다.
세상은 점점 더 이상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살아남아야 했다.
어떻게든.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