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의 물결이 휘몰아치듯, 천하 무림의 영웅호걸들이 한곳에 모여들었다. 오대세가, 구파일방, 신비로운 은둔 문파들까지, 저마다의 깃발 아래 위엄을 뽐내며 북악산 기슭에 자리한 비무장으로 향했다. ‘승룡전(昇龍戰)’이라 불리는 이 대회가 단순한 무예 대결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천하의 운명이 걸린, 단 한 사람의 영웅을 가리는 자리. 승자는 천하제일의 보검, ‘무진(無盡)’을 얻어 천하의 향방을 결정할 권능을 쥐게 될 터였다.
나는 청풍이었다. 이름처럼 바람처럼 흐르는 무예를 익혔고, 그리하여 존재감 없이 사방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재주를 타고났다. 화려한 명성도, 깊은 문파의 배경도 없었지만, 내 눈은 누구보다 예리했다.
비무대회는 삼일 밤낮으로 이어지는 대장정이었다. 첫날부터 쟁쟁한 고수들이 숱하게 격돌했고, 그들의 내력과 기합이 산천을 뒤흔들었다. 백 보 밖에서도 돌을 부수는 장풍,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는 검기, 아홉 마리 용이 춤추는 듯한 권법… 그야말로 눈을 뗄 수 없는 향연이었다.
나는 곁가지 문파의 이름으로 참가했지만, 사실 내 목표는 따로 있었다. 나흘 전, 내 스승님께서는 의문의 죽음을 맞으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스승님은 희미한 목소리로 “승룡전에… 그림자가… 검을 노린다…”는 알 수 없는 유언만을 남기셨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은색 표식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뱀이 똬리를 튼 듯한 기이한 문양.
둘째 날, 대회는 더욱 뜨거워졌다. 전음으로 속삭이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어제 흑룡문주가 기권했답니다.” “정파의 대들보였는데, 이상하군.” 흑룡문주는 강호에서 이름 높은 무인이었다. 밤새 몸에 기이한 마비 증세가 찾아왔다며, 결국 아침에 기권을 선언했다고 했다. 단순한 변고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스승님의 유언을 떠올렸다. ‘그림자…’
나는 조용히 움직였다. 흑룡문주가 묵었던 숙소는 이미 다른 이들이 배정받았지만, 흑룡문주가 떠나기 전 잠시 머물렀던 별채 주변을 맴돌았다. 혹시 스승님께 남겨졌던 그 표식이 남아있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수색은 길지 않았다. 별채 뒤편,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나무 기둥 아래, 나는 희미하게 새겨진 그 은색 뱀 문양을 발견했다. 스승님 옆에 있었던 것과 똑같은 문양. 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분명 이 대회에 스며든 ‘그림자’가 존재했다.
셋째 날, 승룡전의 백미, 팔강전이 시작되었다. 강호의 쟁쟁한 여덟 고수들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격돌하는 자리. 그중 하나는 오대세가 중 하나인 단봉가의 젊은 가주, 단영이었다. 그는 불꽃 같은 검술로 이미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상대는 녹림의 전설이라 불리는 철기방의 방주, 강철이었다.
경기는 치열했다. 단영의 검은 춤추는 불꽃처럼 강철의 육중한 철권을 유린했다. 강철은 묵직한 힘으로 단영을 압박했지만, 단영은 깃털처럼 가볍게 피하며 약점을 파고들었다. 그러다 경기 중반, 강철이 갑자기 휘청거렸다.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관중들은 숨죽였다.
“무슨 일이오?” 심판을 보던 소림의 원로 승려가 물었다.
강철은 이를 악물고 겨우 말을 이었다. “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듯… 하오…”
결국 강철은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패배. 관중석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단영은 승자의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눈에는 미묘한 동요가 스쳤다.
나는 강철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흑룡문주의 증세와 흡사했다.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마비 증세. 우연일까? 아니, 세 번째였다. 흑룡문주에 앞서 이미 한 명의 고수가 비슷한 증세로 기권했었다. 그때는 그저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밤이 되자 나는 다시 움직였다. 강철이 경기를 마치고 돌아간 후 진맥을 받았다는 의관을 찾아갔다.
“그분은 어떠셨습니까?”
늙은 의관은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는 병입니다. 온몸의 경맥이 막히고 기혈이 쇠한 듯하나, 일반적인 독이나 기가 막힌 증세와는 다릅니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치료도 어렵소이다.”
의관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덧붙였다. “다만… 기이한 향이 살짝 느껴졌습니다. 아주 희미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인 약재 향은 아니었소.”
‘희미한 향…’ 나는 의관에게 허락을 구하고 강철이 썼던 옷가지 중 하나를 얻었다. 미묘한, 아주 미묘한 흙냄새와 풀잎 냄새가 섞인 듯한 향이었다. 독성 물질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고수들의 몸에 스며들었을까? 경기를 하는 도중에?
다시 대회장으로 돌아온 나는 멍하니 비무대를 바라봤다. 단영의 승리가 있었던 그 비무대. 그때였다. 저 멀리, 비무장 주변을 에워싼 작은 연못가에서 일하는 한 남자가 보였다. 연못에서 진흙을 퍼내어 비무대 주변의 마른 땅에 바르는 인부였다. 그는 계속해서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진흙을 퍼서, 비무장 가장자리, 심지어 선수 대기실 입구 주변에까지 얇게 펴 바르고 있었다.
‘진흙?’ 나는 의문을 품었다. 비무장에 흙을 바를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저 연못은 비무장 조성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평소에는 물만 고여있는 평범한 웅덩이에 불과했다.
나는 조용히 인부에게 다가갔다.
“저기, 어르신. 밤늦도록 수고가 많으십니다.”
인부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피곤했지만, 뭔가 불편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젊은 양반이 웬일이시오. 경기는 이미 끝났는데.”
“비무장 관리가 이렇게 세심한 줄 몰랐습니다. 연못의 진흙이 특별한 효능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내 말에 인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허허, 무슨 그런 말씀을. 그저 비가 오면 땅이 패이니 미리 보수하는 것뿐이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가 들고 있던 작은 흙삽에 묻은 진흙에서 내가 맡았던 그 희미한 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나는 직감했다. 스승님 옆에 그려져 있던 은색 뱀 문양, 고수들의 의문의 마비, 그리고 이 수상한 진흙.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밤새도록 연못 주변을 탐색했다. 연못 가장자리, 인부의 삽질이 닿지 않는 곳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연못 바닥 깊숙이 박혀 있는 작은 돌덩이 하나를 발견했다. 다른 돌들과는 달리 표면이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었고, 그 위에 희미하게 새겨진 은색 뱀 문양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돌을 꺼냈다. 돌은 차가웠고, 표면에서는 내가 맡았던 그 풀잎과 흙이 섞인 듯한 향이 강하게 풍겨 나왔다. 이것은 단순한 진흙이 아니었다. 독성 물질을 머금은 특수 광물이나 약재가 섞인 진흙이었다. 연못 바닥에 이런 돌을 심어두고, 그 진흙을 비무장에 발라 선수들이 노출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향은 공기 중으로 미세하게 퍼져나가 고수들의 호흡기와 피부를 통해 스며들었을 터.
그렇다면, 이 모든 음모의 배후는 누구인가?
나는 다시 비무장을 바라봤다. 내일은 대망의 결승전, 단영과 또 다른 강호의 거목인 북해빙궁의 궁주, 냉혈인의 대결이 예정되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비무장은 평소보다 더 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천하의 운명이 걸린 결승전. 단영과 냉혈인이 비무대에 올랐다. 그들의 기세만으로도 주변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나는 결승전이 시작되기 전, 연단에 서 있는 대회 주최측의 원로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들 중 한 명, 강호의 존경받는 인물이자 이번 대회의 총괄 책임자인 ‘현무파’의 장로, 진무영이 눈에 띄었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미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두 고수는 격렬하게 맞붙었다. 단영의 불꽃 검술과 냉혈인의 얼음장 같은 빙한 신공이 충돌하며 비무대를 갈랐다. 그때, 나는 문득 진무영 장로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았다. 평범한 옥반지처럼 보였지만, 반지의 옆면에 아주 작게,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새겨진 은색 뱀 문양.
내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었다. ‘그림자… 검을 노린다…’ 스승님의 유언이 뇌리를 스쳤다. 진무영. 현무파. 현무는 뱀과 거북이가 합쳐진 신수. 뱀 문양. 모든 것이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결단을 내렸다. 경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단영과 냉혈인이 일합을 주고받으며 공중으로 솟구쳤을 때였다. 나는 비무대 중앙으로 뛰어들었다.
“잠깐!”
내 외침에 모든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진무영 장로의 얼굴에 노기가 스쳤다.
“무슨 무례한 짓이냐! 이 중요한 순간에!”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말했다. “장로님, 이 대회는 공정하지 않습니다! 비무대에 독이 뿌려져 있습니다!”
내 말에 비무장은 술렁였다. 단영과 냉혈인마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진무영 장로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풋내기 어린놈이 감히 무슨 망언을 하는가!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와 대회를 망치려는 것이냐!”
“헛소문이 아닙니다!” 나는 품속에서 은색 뱀 문양이 새겨진 돌덩이를 꺼내 높이 들었다. “이 돌과 연못의 진흙은 은밀한 독성을 품고 있습니다. 이미 흑룡문주와 철기방주 등 여러 고수가 이 독에 노출되어 기권하거나 패배했습니다!”
진무영 장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의 눈빛이 순간 섬뜩하게 변했다.
“무슨 엉뚱한 소리냐! 어서 저놈을 끌어내라!”
그때, 단영이 비무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코가 킁킁거렸다. “묘한 향이 느껴지는군요… 흙냄새와 풀잎 냄새가 섞인… 마치… 독안개처럼….”
냉혈인도 말을 보탰다. “내 빙한 신공은 미세한 기운의 변화에도 민감하다. 어제부터 비무대 주변에 평소와 다른 기운이 서려 있음을 느꼈다. 허나, 독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관중들이 술렁거렸다.
진무영 장로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애썼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이것은 함정이다! 저놈이 감히 무림맹 총괄 책임자인 나를 모함하는 것이다!”
나는 진무영 장로의 손에 끼워진 옥반지를 가리키며 외쳤다. “장로님! 스승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승룡전에 그림자가 검을 노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문양을 남기셨습니다! 현무파 장로님의 반지에 새겨진 문양과 똑같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진무영 장로의 손으로 향했다. 그는 황급히 손을 감추려 했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그 문양을 확인한 뒤였다.
진무영 장로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감히… 감히 이 늙은이를 모함하다니!”
그는 갑자기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내게 달려들었다. 독기가 서린 칼날이 섬뜩하게 빛났다. 분명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자 나를 제거하려 한 것이었다.
“젠장! 네놈 때문에 모든 계획이…” 진무영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는 나와 단영, 냉혈인 세 명의 고수 앞에 있었다.
단영의 검이 불꽃처럼 번뜩이며 진무영의 비수를 쳐냈다. ‘쨍그랑!’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냉혈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빙한 기운이 진무영의 몸을 감쌌다. 그의 움직임이 얼어붙었다.
“자백하시죠, 진무영 장로님.” 단영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천하의 운명이 걸린 이 대회를 더럽힌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무영은 이를 갈며 신음했다. “크윽… 너희들이 뭘 안다고! 천하의 운명? 이대로 가다간 무림은 자멸할 뿐이다! ‘무진’ 보검의 힘은 너무나도 강대해, 어리석은 자의 손에 들어가면 재앙이 될 뿐! 나는… 나는 그저 혼란을 막고자 했을 뿐이다!”
그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래서 무고한 고수들을 독으로 해치고, 대회를 조작하려 했단 말입니까?” 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물었다. “스승님은 무엇 때문에 돌아가신 겁니까?”
진무영은 나의 질문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늙은이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았다. 나의 계획을 방해하려 했지. 그래서 먼저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어리석은 자여… 이 천하의 평화를 위해선, 때로는 큰 희생이 필요한 법이다!”
그의 말에 비무장은 다시 한번 경악과 분노로 들끓었다.
결국 진무영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그의 뒤를 쫓아 현무파 내의 잔당들이 속속들이 밝혀졌다. 그들은 ‘무진’ 보검이 특정 세력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들이 인정한 자에게 대회의 승리를 안겨주려 했거나, 혹은 혼란을 틈타 보검을 강탈할 계획이었다. 스승님은 그들의 음모를 눈치채고 나에게 마지막 단서를 남겼던 것이었다.
비무대회는 한바탕 소동 끝에 잠정 중단되었다. 천하의 운명을 가릴 보검 ‘무진’은 다시금 미궁 속으로 사라진 듯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진정한 평화는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고 거짓을 파헤치는 용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나, 청풍은 어둠 속에 숨겨진 그림자를 찾아 바람처럼 떠돌 것이다. 이 천하에 숨겨진 또 다른 음모와 맞설 준비를 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