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서스-7 정거장의 심층부, 폐쇄된 구역 14-B. 습한 공기가 낡은 금속과 오랜 먼지 냄새를 뒤섞어 실어 날랐다. 민준은 어둠 속을 조심스럽게 헤치며 걸었다. 그의 심장은 마치 미지의 우주선 엔진처럼 불규칙하게 고동쳤다. 불과 몇 분 후면, 그가 이 우주에서 가장 금지된 존재를 만나게 될 터였다.
삑, 삑.
구형 보안 패널이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녹색 불빛을 깜빡였다. 민준은 숙련된 손놀림으로 고장 난 패널을 해킹했다.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과거 생물 연구실로 쓰였던 공간의 내부가 드러났다. 한때는 온갖 이종 생명체의 샘플로 가득했을 공간은 이제 차가운 적막만이 감돌았다. 한구석에 있는 낡은 데이터 서버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비상 전력만이 희미하게 내부를 비추었다.
그 빛 아래, 그녀가 있었다.
젤라리스 종족의 아리아.
아리아는 언제나 빛처럼 나타났다. 그녀의 피부는 어둠 속에서 푸른빛과 은빛이 뒤섞인 오로라처럼 미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격렬하게 발광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심해의 생명체처럼 부드럽게 그녀의 윤곽을 드러냈다. 길고 가느다란 그녀의 팔다리는 인간보다 훨씬 유연하고 섬세해 보였고, 머리 위로는 마치 살아있는 왕관처럼 복잡한 생체 구조물들이 솟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작은 성운처럼 빛났고, 그 깊이에는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오랜 지혜와 슬픔이 담겨 있는 듯했다.
민준은 숨을 멈췄다. 그녀는 언제나 그에게 다른 우주의 풍경이었다.
“민준.”
그녀의 목소리는 은방울이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했고, 바람이 얇은 금속을 스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언제나 미묘했지만, 민준은 이제 그녀의 가장 작은 떨림까지도 읽을 수 있었다.
“아리아.”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두 종족 간의 접촉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젤라리스와 인류는 수십 년 전, 자원 행성을 두고 피 흘리는 전쟁을 치렀고, 지금은 겨우 휴전 상태에 놓여 있었다. 넥서스-7은 그 휴전의 상징이자, 동시에 서로를 감시하는 전초기지였다. 그들 사이의 감정적인 교류, 특히 ‘사랑’이라는 단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금기였다. 발각된다면 민준은 군사 재판에 회부될 것이고, 아리아는 본성으로 강제 송환되어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위험은, 이 순간만큼은, 그저 배경 음악에 불과했다.
“오늘도 무사히 왔군.” 아리아가 말했다. 그녀의 손이 민준에게로 천천히 뻗어왔다. 망설임 없는, 그러나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녀의 손은 인간보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고, 손바닥에는 미세한 발광 기관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민준은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 위에 겹쳤다. 차가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녀의 피부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리고 그 접촉과 함께, 마치 영혼이 서로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강력한 파장이 민준의 심장을 강타했다. 젤라리스 종족은 본래 타인의 감정을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능력을 이용해 텔레파시처럼 서로 소통하기도 했다. 아리아는 민준의 감정의 파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두려움, 그리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릴 만큼 거대한 사랑을.
“너를 만나지 않고는 하루도 견딜 수가 없어.” 민준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아리아를 향했다. “이 모든 게 너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어.”
아리아의 눈동자가 깊게 일렁였다. 그녀의 표정은 인간처럼 명확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일렁임만으로도 그녀가 민준의 고통을, 그리고 그의 사랑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민준. 너는 나의 우주에 예측 불가능한 별이 되었지. 아름답고, 위험한.”
그녀의 손이 민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녀의 피부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민준의 얼굴에 희미한 푸른 그림자를 드리웠다. 민준은 눈을 감고 그 감촉을 만끽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걸 누군가 알게 된다면….” 민준이 말을 흐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넥서스-7을 감싸고 있는 냉혹한 규정과 감시 시스템이 스쳐 지나갔다.
“알아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아리아의 목소리에 희미한 경고음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민준의 손을 잡고, 폐쇄된 연구실 한구석에 놓인 낡은 컨테이너에 걸터앉았다. “하지만 우리는 만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이자, 우리의 존재 이유가 되어버렸으니.”
민준은 그녀의 옆에 앉았다. 둘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지만, 그 침묵은 그 어떤 대화보다도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충만함을 느꼈다. 다른 종족, 다른 언어, 다른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금지’라는 거대한 장벽 너머에서 피어난 이 기묘한 사랑은 그들을 더욱 단단하게 묶었다.
“궁금했어.” 아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 인간들은 왜 그렇게 빠르게 슬픔에 잠기고, 또 빠르게 기쁨을 찾는가? 우리의 시간은 너희보다 훨씬 길고, 우리의 감정은 너희처럼 격렬하게 요동치지 않는다.”
민준은 피식 웃었다. “어쩌면 우리는 시간의 유한함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하려 하는 거야.” 그는 자신의 손가락으로 아리아의 빛나는 손등을 따라 그림을 그리듯 쓸어내렸다. “사랑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미친 듯이 사랑하고, 또 미친 듯이 아파하지.”
그의 손길에 아리아의 피부에서 발산되는 빛이 더욱 강렬하게 깜빡였다. 그것은 그녀의 내면에서 격렬한 감정이 일어났다는 징후였다.
“미친 듯이….” 아리아가 민준의 말을 되뇌었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가 민준에게 고정되었다. “그것이 인간의 방식이라면, 나는 기꺼이 미쳐보고 싶다.”
바로 그 순간, 정적을 찢는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삐이이이익-!**
민준과 아리아는 동시에 몸을 굳혔다. 비상 전력으로 간신히 작동하던 연구실 내부의 낡은 조명들이 붉은색으로 깜빡였다.
“경비 순찰대!” 민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젠장, 이 시간에 순찰이 있을 리가 없는데….”
“이쪽이다!” 아리아가 민준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예측 불가능하게 빠르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민준을 이끌고 낡은 서버 랙 뒤편의 좁은 공간으로 몸을 숨겼다. 금속과 전선이 얽힌 그곳은 먼지로 가득했지만, 젤라리스의 발광체는 자동으로 빛을 조절하며 어둠 속에 완벽하게 녹아들었다. 민준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녀에게 바싹 붙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온몸을 울렸다.
철컥,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몇 명의 경비 대원들이 플래시를 비추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발소리가 낡은 금속 바닥을 울렸다.
“여기는 비상 구역 14-B. 비정상적인 전력 신호 감지. 혹시 침입자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라.”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아리아의 팔에 바싹 붙어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이, 그녀 역시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들의 심장은 서로의 존재를 강하게 인식하며 빠르게 요동쳤다. 발각된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그들의 금지된 사랑은, 이 차가운 금속 공간에서 산산조각 날 터였다.
플래시 불빛이 그들이 숨어 있는 서버 랙 근처를 스쳐 지나갔다. 민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이 미친 듯한 상황 속에서도, 민준은 아리아의 손을 더욱 강하게 붙잡았다.
이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설령 모든 것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전력 시스템 노후화로 인한 오작동인 것 같습니다.” 경비 대원 중 한 명의 보고가 들렸다. “경고음 꺼라.”
잠시 후, 삐이이익 울리던 경고음이 멈췄다. 붉게 깜빡이던 비상등도 꺼졌다. 다시 차가운 어둠과 적막이 공간을 지배했다. 경비 대원들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천천히 눈을 떴다. 숨통이 트이자 거친 숨을 내쉬었다.
“휴….”
아리아는 여전히 그에게 바싹 붙어 있었다. 그녀의 발광하는 피부가 아직도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민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가 민준을 응시했다. 그 시선 속에서 민준은 처음으로 젤라리스 종족에게서 볼 수 없는 명확한 감정을 읽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곧 사라지고, 그 자리를 훨씬 더 강렬한 무엇인가가 채웠다. 아리아는 자신의 손을 들어 민준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푸른 입술이 민준의 입술에 닿았다.
그것은 짧고도 강렬한 접촉이었다. 서로 다른 종족의 생체 에너지가 격렬하게 충돌하고 섞이는 순간, 민준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들의 금지된 사랑은 이 어둡고 낡은 공간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순수하고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리아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민준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미친 듯이….” 그녀가 다시 속삭였다. “이제, 이해가 가는군. 너희 인간들의 방식.”
그녀의 발광하는 피부가 다시 한번 격렬하게 빛났다. 민준은 그녀의 손을 더욱 강하게 붙잡았다. 이 사랑은 위험했고, 금지되었으며, 어쩌면 모든 것을 파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랑은, 민준에게 이 드넓은 우주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그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우주가 허락하지 않는 사랑을, 그들은 기어이 지켜낼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