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슬립 (시간여행)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계절이었다. 지혁은 낡은 방한복의 깃을 바싹 끌어올리며 눈앞에 펼쳐진 회색빛 풍경을 훑었다. 한때는 스카이라인을 자랑했을 고층 빌딩들은 이제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하늘을 찌르는 흉물로 변해 있었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나가고, 외벽은 검은 얼룩과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 세상이 멸망한 지 벌써 몇 년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오빠, 저기 좀 봐.”

뒤에서 들려오는 세아의 목소리에 지혁은 고개를 돌렸다. 열두 살 남짓한 세아는 지혁보다도 더 낡아 보이는 점퍼를 입고 있었지만, 또렷한 눈빛만큼은 언제나 생기로 가득했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한때 대형 쇼핑몰이었을 법한 거대한 건물의 잔해였다. 정면 간판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찌그러져 있었지만, 철골 구조물 사이로 보이는 내부 공간은 다른 건물들에 비해 비교적 온전해 보였다.

“음… 위험할 수도 있어.”

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거대한 건물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위험한 곳일수록 아직 쓸 만한 물건들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세상이 뒤집어진 후, 가장 먼저 약탈당하고 파괴된 곳은 언제나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던 장소들이었다.

“그래도… 혹시 물이라도 있을지 모르잖아.”

세아는 희망 없는 세상에서 유일한 희망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지혁을 올려다봤다. 며칠째 마실 물이 바닥난 지혁과 세아에게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지혁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 보자. 절대로 내 손 놓지 마.”

지혁은 허리에 찬 낡은 총집에서 녹슨 권총을 꺼내 손에 쥐었다. 탄창에 남은 총알은 겨우 세 발. 마지막 보루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른 손으로 세아의 손을 꽉 잡았다.

쇼핑몰의 입구는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와 철근 더미로 막혀 있었다. 지혁은 겨우 사람 한 명이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새를 찾아냈다. 먼지와 돌멩이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마치 건물의 비명처럼 들렸다.

“콜록, 콜록… 먼지 봐.”

세아는 마른기침을 했다. 내부는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둠 그 자체였다. 지혁은 배낭에서 손전등을 꺼내 불을 켰다. 낡은 손전등의 희미한 불빛이 거대한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한때 화려한 옷과 액세서리로 가득 찼을 매장은 찢겨진 마네킹 팔다리와 부서진 진열장,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물질로 뒤덮여 있었다. 역한 곰팡이 냄새와 쇠 비린내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저기, 오빠! 저거 봐!”

세아가 지혁의 팔을 잡아끌며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손전등 빛이 닿은 곳은 쇼핑몰 한가운데 자리했던 중앙 분수대였다. 하지만 분수대는 이미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고, 바닥에는 검고 끈적한 이물질이 고여 있었다. 그 안에는 희미하게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지혁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물이 담겼던 유리병과 플라스틱 물통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몇 개를 집어 들자, 놀랍게도 그중 하나에는 아직 반쯤 물이 차 있었다.

“물이… 물이 있어!”

세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지혁은 감격에 젖어 물통의 뚜껑을 열었다.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일단 마실 수 있는 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쿵… 쿵…*

낮게 울리는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쇼핑몰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육중한 소리였다. 지혁은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세아, 빨리! 이쪽으로 와!”

지혁은 세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 뒤편에서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두 개의 붉은 눈빛. 지혁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것은… 폐허를 떠도는 약탈자 중 하나였다. 인간이 아닌, 변이된 짐승. 철갑충!

커다란 몸통은 단단한 갑각으로 뒤덮여 있었고, 여섯 개의 다리 끝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나 있었다. 크기는 곰만 했지만 움직임은 훨씬 민첩했다. 날카로운 앞발을 휘두르자 찌그러진 쇼핑카트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젠장!”

지혁은 세아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고 권총을 겨눴다. 철갑충은 굶주린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녀석의 턱에서 끈적한 침이 길게 늘어졌다.

*크르르르릉!*

포효와 함께 철갑충이 쇄도했다. 지혁은 본능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첫 번째 총알이 녀석의 갑각에 튕겨 나갔다. 흠집 하나 남기지 못했다. 철갑충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대한 몸통으로 지혁에게 달려들었다. 지혁은 세아를 안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방금 서 있던 자리에 철갑충의 발톱이 박히며 콘크리트 바닥이 부서져 나갔다.

“오빠, 어떡해?!” 세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혁은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 숨을 만한 곳도, 도망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쇼핑몰 내부는 그들을 가두는 거대한 미로 같았다. 철갑충은 한 번 먹잇감을 정하면 절대 놓치지 않는 잔혹한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혁은 예전 기억 속의 쇼핑몰을 떠올렸다.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사람들이 북적이고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곳. 지금 이곳과 너무나도 다른 풍경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던 세상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곳은 지혁이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그는 이 ‘새로운’ 세상에서 어떻게든 세아를 지켜내야 했다.

*쿵! 쿵!*

철갑충이 다시 한번 공격해왔다. 지혁은 굴러떨어진 쇠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녹슬고 묵직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녀석의 갑각은 단단했지만, 배 부분은 상대적으로 약할 거라는 것을 어릴 적 보던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었다. 물론, 저런 괴물을 다룬 다큐는 아니었지만.

“세아! 저기, 무너진 옷걸이 쪽으로 피해!”

지혁은 소리쳤다. 세아는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지혁의 말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지혁은 철갑충의 주의를 끌기 위해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녀석의 앞발을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혁을 노려봤다.

“이 빌어먹을!”

철갑충의 거대한 몸통이 지혁을 향해 돌진했다. 피할 틈도 없었다. 지혁은 팔로 얼굴을 가리며 충격을 기다렸다. 하지만 충격은 오지 않았다. 대신 녀석의 몸이 옆으로 비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이거!”

세아가 재빨리 달려와 쇼핑카트를 발로 밀어 철갑충의 옆구리에 박아 넣은 것이었다. 철갑충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잠시 휘청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지혁은 세아가 만들어 준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몸을 숙여 녀석의 거대한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녀석의 부드러운 하복부가 눈앞에 드러났다. 지혁은 망설임 없이 권총의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두 발의 총알이 녀석의 뱃가죽을 뚫고 들어갔다. 철갑충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거대한 몸뚱이가 경련하듯 떨리고, 끈적한 체액이 흘러나왔다. 녀석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주변의 진열장과 기둥을 마구잡이로 부쉈다.

지혁은 세아의 손을 잡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쇼핑몰은 철갑충의 발악으로 인해 무너져 내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들은 가까스로 입구의 틈새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헥… 헥… 오빠, 괜찮아?”

세아는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지혁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팔다리에 생긴 찰과상과 온몸을 덮친 통증이 그의 살아있음을 알려줬다.

그들은 쇼핑몰에서 꽤 멀리 떨어진 언덕 위에 자리를 잡았다.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는 쇼핑몰 건물을 내려다보며 지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가까스로 물통 몇 개를 챙겨 나올 수 있었다. 그중 하나를 세아에게 건네자, 세아는 조심스럽게 마셨다.

“하아… 살 것 같다.”

세아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니 지혁의 마음속에도 작은 온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지혁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붉고 탁한 하늘, 그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폐허의 세계.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 떨어진 날을 떠올렸다. 눈을 감았다 뜨니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시간의 벽을 넘어, 완전히 다른 시간대에 떨어져 버린 자신. 그리고 이곳에서 만나게 된 세아.

“오빠, 저기… 뭔가 움직여.”

세아의 목소리에 지혁은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검은 그림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 둘… 그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이 보였다. 약탈자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굶주려 있었다.

“젠장, 또야?”

지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는 이제 총알 한 발 남은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이 잔혹한 세상에서, 그들의 생존은 언제나 위태로운 줄타기였다.

지혁은 세아의 손을 다시 잡았다.

“가자, 세아.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어.”

그들은 다시 한번 발걸음을 재촉했다. 붉은 노을이 폐허가 된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어디가 될지,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멈출 수 없었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계속해서 나아가야만 했다. 그들의 앞에 펼쳐진 길은 끝없는 어둠과 위협으로 가득했지만, 지혁은 세아의 작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 덕분에, 아주 희미하게나마 다음 날을 기약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