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노을이 핏물처럼 번진 하늘 아래, 도시의 잔해는 묵묵히 부패하고 있었다. 지혁은 무너진 고가도로 기둥 사이에 난 좁은 틈을 비집고 나왔다. 온몸을 휘감은 먼지와 땀이 햇살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입술은 바싹 말라붙었고, 며칠째 씹은 적 없는 잇몸이 아렸다.
왼손에 든 낡은 야전삽은 무게감이 익숙했다. 녹슨 철제 삽날은 뾰족하게 갈려 유사시엔 흉기로도 쓸 수 있었다. 등에는 찢어진 배낭이 매달려 있었고, 그 안에는 며칠을 버틸 물과 식량이 조금 들어있었다. 그리고 찢어진 노트와 연필 한 자루. 그걸 왜 들고 다니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그냥 버리지 못했을 뿐이었다.
“젠장, 오늘은 아무것도 없네.”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낮았지만, 이 거대한 죽은 도시에는 그 어떤 메아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소리는 흡수되고 사라졌다. 이곳은 그렇게 정지된 곳이었다.
지혁이 발걸음을 옮긴 곳은 한때 번화했던 주택가였다. 하지만 지금은 건물들의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거나, 아예 폭삭 주저앉아 거대한 돌무덤을 이루고 있었다. 가끔 창문 없는 아파트 외벽에 붙어있는 빛바랜 포스터만이 이곳이 한때 사람들이 살던 공간이었음을 희미하게 알려줄 뿐이었다.
그는 가장 온전해 보이는 12층짜리 아파트 단지 쪽으로 향했다. 외부 구조물은 멀쩡했지만, 내부는 어떨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세계가 그렇게 변한 후로, 겉모습만으로 속을 판단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 되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하고, 조용한 것이 더 빠르게 덮쳐왔다.
아파트 단지 입구는 엉망이었다. 쓰러진 경비 초소, 부서진 차량들, 그리고 녹슨 철제 문이 반쯤 떨어져 나간 채로 흉물스럽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벽에는 알 수 없는 검붉은 자국들이 말라붙어 있었는데, 피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끈적하고 기괴한 형상이었다. 지혁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내색 없이 그대로 지나쳤다. 이런 건 너무나도 흔한 풍경이었다.
“망할, 제발 뭔가 나와라.”
그는 신발 밑에 밟히는 깨진 유리 조각들을 신경 쓰지 않으며 걸었다. 1층 현관문은 이미 떨어져 나간 지 오래였다.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곰팡이와 먼지 섞인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은 복도 끝에서 겨우 길을 알려줄 뿐이었다.
지혁은 야전삽을 고쳐 쥐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매 층마다 텅 비어있는 집들이 그림자처럼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의 문은 부서져 있거나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을 슬쩍 들여다보면 가구들이 뒤집히고 부서져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듯한 모습이었다. 어떤 집은 바닥에 정체 모를 액체가 굳어 검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7층에 다다랐을 때, 그의 발이 멈췄다. 복도 끝에서 두 번째 집. 그 집의 문이 잠겨 있었다. 나무 문에 철창이 덧대어져 있었는데, 녹이 슬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문이 잠겨 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였다. 하나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곳. 또 다른 하나는… 안에 무언가 있다는 것.
지혁은 잠시 망설였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식량이나 물, 혹은 다른 귀한 물건들이 그의 발길을 잡아끌었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아… 도박이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등에 멘 배낭에서 낡은 공구 몇 개를 꺼냈다. 스패너와 몽키스패너.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살폈다. 꽤 튼튼한 자물쇠였지만, 세월의 흔적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몽키스패너로 문고리 주변을 강하게 내려쳤다. ‘꽝, 꽝!’ 두 번. 금속이 뒤틀리고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렸다. 그는 주위를 경계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행히 근처에 다른 ‘놈들’은 없는 모양이었다.
세 번째 내려치자,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지혁은 야전삽을 들고 부서진 문을 발로 밀어 열었다.
내부는 생각보다 깨끗했다. 최소한 다른 집들처럼 폭풍이 휩쓸고 간 흔적은 없었다. 거실에는 낡았지만 멀쩡해 보이는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공기는 오래 갇혀 있었던 듯 답답했지만, 곰팡이 냄새는 덜했다.
“이런 곳이 남아있었다니.”
지혁은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았다. 신발에서 나는 ‘슥삭’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의 눈은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수상한 점은 없었다. 그는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야전삽을 손에 든 채 움직였다.
부엌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통조림 몇 개와 깨끗한 물통이 발견되었다. 물통은 비어 있었지만, 다른 곳에서 물을 정수하면 채울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대성공이었다.
다음은 안방. 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침대 위에 덮인 시트가 노랗게 변색되어 있었다. 서랍장을 뒤지자 낡은 옷가지들과 함께 작은 수첩 하나가 나왔다. 이 세계에서는 이런 기록물도 귀한 정보였다.
“이게 다 누구 거야…?”
그가 수첩을 펼쳐 들었다. 누군가 연필로 쓴 듯한 흐릿한 글씨들이 가득했다. 내용은 일기 같았다.
*…며칠째 바깥이 소란스럽다.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아 잠을 이룰 수 없다. 뉴스에서는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고, 그저 ‘안심하십시오’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창밖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이는 걸 봤다. 착각일까? 너무 지쳐서 헛것을 보는 것일지도…*
*…윗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철컥, 철컥. 마치 무언가 벽을 긁는 듯한 소리. 이웃에 사는 김 씨 아저씨는 매일 아침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는 분이셨는데, 요즘은 너무 조용하다…*
지혁은 침을 삼켰다. 일기장은 불안감과 공포로 가득했다. 마지막 장을 넘기자, 날짜가 적혀 있지 않은 한 페이지가 나왔다.
*…그들이 온다. 벽에서… 벽에서 나온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어. 내 눈이 멀어가. 검은 피가…*
글씨는 마지막으로 갈수록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휘갈겨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아래, 붉은색으로 물든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피는 아니었다. 지혁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세계가 변한 뒤, 피는 이런 색이 아니었다. 이것은… 무언가 다른 종류의 액체였다. 검붉고, 끈적하고, 미묘하게 빛나는.
그때였다.
‘슥, 슥.’
아주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 맨발로 바닥을 끄는 듯한 소리. 윗집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지혁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는 재빨리 야전삽을 고쳐 쥐고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숨소리마저 죽였다. 이 세계가 이렇게 변한 지 꽤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밤마다 그 소리에 시달렸다. ‘그것들’의 소리.
‘슥, 슥, 슥.’
소리는 점차 또렷해졌다. 마치 천천히, 아주 느리게, 누군가 발을 끌고 복도를 따라 움직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지혁은 자신이 방문을 닫지 않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복도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얼어붙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두 개의 붉은 점이 보였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 속에서 타오르는 숯불처럼, 섬뜩하고 차가운 빛이었다.
‘끼이이익.’
방문이 저절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 한 점 없는 닫힌 공간에서, 방문이 닫혔다.
그리고 그 뒤, 바로 복도에서, 아까 그 희미한 발 끄는 소리가 멈췄다.
침묵. 숨 막히는 침묵.
그의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닫힌 문 너머로, 붉은 빛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아주, 아주 천천히.
그때, 침대 위, 노란 시트 아래에서 무언가 불룩 솟아오르는 것을 지혁은 보았다. 마치 시트 아래에 누군가 숨어 있는 것처럼. 그것은 꿈틀거렸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 집의 문이 잠겨 있던 이유는…
이 집의 주인이…
‘슥…’
시트 아래에서 길고 가느다란 것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손가락이 아니었다. 뼈마디가 기형적으로 뒤틀린, 마르고 긴 무언가였다. 그것은 이불 위를 기어 다니며, 방금 지혁이 들고 있던 수첩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지혁은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기괴한 광경보다 더 끔찍한 것은, 그의 등 뒤, 닫힌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닫힌 방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붉은 빛이 더욱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 붉은 빛 사이로…
두 개의 붉은 눈이, 지혁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문 밖의 ‘그것’은 이미 문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문 안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벽에서… 벽에서 나온다는 그 일기장의 마지막 구절처럼.
지혁은 야전삽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살아야 했다. 이 기괴한 공포 속에서, 그는 매번 그랬듯이, 기어코 살아남아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이곳의 ‘그것’은 이전의 것들과 달랐다.
더 깊고, 더 오래된, 그리고… 더 잔인한 무언가가 그를 덮쳐오고 있었다.
붉은 눈빛이 서서히, 지혁의 시야를 잠식해왔다.
이젠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