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제단 아래]
**제1장. 핏빛 노을, 진영촌의 절규**
바람은 오직 먼지를 실어 날랐고, 땀은 흐르는 족족 메마른 땅에 스며들었다. 진영촌(塵影村). 그 이름처럼 그림자조차 희미해진 마을에는,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희미한 기침 소리와 밭을 갈던 늙은 소의 지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누렇게 익다 못해 까맣게 타버린 논밭 위로, 사람들의 그림자 또한 앙상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은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이글거리는 볕 아래서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고 있었다.
이진(李辰)은 밭고랑을 따라 묵묵히 낫질을 하고 있었다. 그의 팔뚝에는 굵은 힘줄이 핏줄처럼 돋아 있었고, 등줄기에는 아침부터 흘린 땀이 흥건했다. 스무 해를 갓 넘긴 나이였지만, 그의 얼굴에는 이미 오랜 고난의 흔적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그의 낫질 한 번 한 번에는 오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식솔들의 삶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때였다.
“물러서라! 비켜라!”
마을 어귀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붉은색 깃발을 앞세운 행렬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진영촌으로 들이닥쳤다. 병사들의 갑옷은 번쩍였고, 그들이 짊어진 창 끝은 햇빛에 반사되어 섬뜩하게 빛났다. 제국의 군대였다. 그들은 늘 그랬듯이, 풍년이든 흉년이든 상관없이 거둬갈 것을 명분 삼아 마을을 짓밟으러 오는 재앙과도 같았다.
농기구를 든 채 넋을 잃고 멈춰선 주민들 사이로, 이진의 눈매가 순간 날카롭게 변했다. 그는 손에 든 낫을 꽉 쥐었다. 옆에 있던 강 노인(姜老人)이 이진의 팔을 다급히 잡아끌었다.
“진아, 흥분하지 마라! 저들은 제국의 개들이다.”
강 노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오랜 세월 제국의 폭정을 견뎌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짙은 체념과 함께, 꺼지지 않는 불씨 같은 회한이 서려 있었다.
말에서 내린 제국군 장수는 기름기 도는 얼굴에 비웃음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번쩍이는 갑옷 아래로 비단옷이 살짝 드러났고, 손에는 값비싼 부채가 들려 있었다. 그는 거만하게 코웃음을 치며 마을 주민들을 둘러보았다.
“이것들이 감히… 황실의 명령을 어기고 게으름을 피우는가! 수확량이 형편없다는 보고는 이미 들었다. 허나, 제국의 법도는 변치 않는 법! 올해부터는 ‘특별 부역세’가 추가될 것이다. 황성 재건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너희 같은 벌레들이라도 보태야 하지 않겠는가!”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특별 부역세라니! 이미 허리띠를 졸라맬 대로 졸라매고, 풀뿌리조차 귀한 지경인데 또 무엇을 내놓으라는 말인가.
“장군님! 저희는 이미 곡물세와 병역세, 토지세까지 낼 것을 다 냈습니다! 이대로라면 겨울을 넘길 수조차 없습니다!”
한 아낙이 용기를 내어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장수는 그 아낙을 비웃듯이 노려보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건방진 것! 어디 감히 천것이 황실의 법도에 입을 대는가! 이 어리석은 것들. 너희의 무능함과 나태함 때문에 제국이 얼마나 큰 손해를 보고 있는지 아는가! 좋다, 그렇다면 다른 것으로 메꿔야겠지.”
그는 빙글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주변 병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당장 저 여인의 아들을 끌어내! 황실 노역장에 보내서 평생 죽을 때까지 일하게 해라! 그리고…”
장수의 시선이 차가운 칼날처럼 마을의 젊은 처녀들 쪽으로 향했다.
“마을에서 가장 예쁘장한 처자 셋을 골라내라. 황실에 공녀로 바쳐, 너희의 무례함을 속죄하게 할 것이다!”
“안 돼! 내 딸은 안 돼!”
“우리 수아를 건드리지 마라!”
순식간에 마을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병사들이 거친 손길로 젊은이들을 끌어냈고, 처녀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붙잡고 울부짖었지만, 병사들의 곤봉이 사정없이 그들의 어깨를 내리쳤다.
이진의 눈앞에서, 방금 전 자신에게 소리치던 아낙이 병사들에게 짓밟히고 있었다. 그의 친우인 덕팔의 어린 동생이 어미의 품에서 떨어져 나가 끌려가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수의 눈길이 향한 곳에 서현(瑞賢)이 있었다. 서현은 마을에서 몇 안 되는 글을 아는 이였고, 지혜로운 판단으로 마을 주민들의 작은 다툼을 중재하곤 했다. 그녀는 침착해 보이려 애썼지만, 굳게 다문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진의 심장이 끓어올랐다.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가 그의 온몸을 지배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손에 든 낫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강 노인이 그의 손목을 꺾듯이 잡았다.
“안 된다, 진아! 지금은 때가 아니다!”
강 노인의 눈빛은 이진만큼이나 타오르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억눌린 절망이 서려 있었다. 저들은 수십, 수백 명의 제국군이다. 낫 하나로 어찌 저들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진은 강 노인의 손길을 뿌리쳤다.
“이대로 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우리는 모두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장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이진을 비웃듯이 바라보았다.
“오호라? 이 미천한 시골뜨기가 감히 황실에 대항하려 드는가? 잡아서 끌고 가라! 본보기를 보여주마!”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이진은 낫을 휘둘러 덤벼드는 병사 한 명의 칼을 막아냈다. 비록 체계적인 무술을 익힌 적은 없었지만, 밭일을 통해 다져진 그의 육체는 강건했다. 그러나 수십 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는 곧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곤봉에 얻어맞고 쓰러졌다. 땅바닥에 얼굴이 처박히는 순간, 흙먼지 너머로 끌려가는 서현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진은 피가 흐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절망. 분노. 무력감.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그는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는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 * *
밤이 깊었다. 진영촌에는 잿빛 달빛만이 드리워졌고, 낮의 절규는 억눌린 흐느낌과 탄식으로 변해 마을 전체를 짓눌렀다. 제국군이 떠난 자리는 폐허와도 같았다. 부서진 가구들, 짓밟힌 밭, 그리고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들의 텅 빈 눈동자만이 남았다.
강 노인의 오두막, 불 꺼진 방 안에는 몇몇 그림자가 모여 앉아 있었다. 이진의 얼굴에는 멍이 들어 있었고, 옷은 찢겨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더 이상은… 이대로는 살 수 없습니다.”
이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낮에 느꼈던 절망 대신,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강 노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살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느냐?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애써 외면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했을 뿐이지.”
그의 손에는 낡고 녹슨 칼집이 들려 있었다. 그는 칼집을 매만지며 과거의 그림자를 더듬는 듯했다.
“그럼 어르신은 이대로 가만히 보고만 계실 겁니까? 수아가 끌려가고, 덕팔의 동생이 노예가 되는 것을… 그리고 언제 또 저들이 들이닥쳐 우리를 짓밟을지 모른다는 것을?”
이진의 목소리가 점차 격앙되었다.
그때, 오두막 문이 조용히 열리고 서현이 들어섰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끌려간 처녀들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운이 좋았을 뿐이죠.”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오늘 같은 일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제국이라는 거대한 짐승의 먹이일 뿐입니다. 영원히 착취당하고,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존재들이죠.”
서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끌려간 이들을 대신해 살아남은 죄책감과 동시에, 이 무자비한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내놓았다.
이진은 서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강 노인이 비로소 낡은 칼집에서 손을 뗐다. 그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진아. 제국의 발톱에 짓밟혀 피 흘리는 이들은 비단 진영촌뿐만이 아닐 게다. 이 땅 곳곳에서 너희처럼 고통받는 이들이 셀 수 없이 많을 터… 그들의 절규는 이미 하늘에 닿았다.”
강 노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칼을 잡아야지. 우리가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우리의 목숨을 걸고 저들에게 맞서 싸워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젠 더 이상 물러설 곳조차 없으니.”
이진은 강 노인의 눈에서 오래전부터 숨겨져 있던 뜨거운 불꽃을 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피멍 자국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지만, 그 속에 감춰진 눈빛은 결코 꺾이지 않을 강인함으로 빛났다.
서현은 말없이 이들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한밤의 어둠 속을 꿰뚫고 저 멀리 제국의 심장부를 향하는 듯했다.
진영촌의 핏빛 노을은, 이 작은 마을에 드리운 절망의 그림자이자 동시에, 거대한 제국에 맞설 반란의 첫 불씨가 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빼앗기는 존재로 남지 않을 것이다. 피와 절규로 물든 땅에서, 이제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세 사람의 눈빛이 굳건하게 맞닿았다. 그들의 심장은 같은 박자로 뛰고 있었다. 혁명의 첫걸음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