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했다. 지상은 죽은 도시의 뼈대들로 가득했고, 그 사이를 흐르는 바람은 녹슨 철과 먼지, 그리고 희미한 비린내를 실어 날랐다. 지훈은 방독면 안으로 옅게 새어 들어오는 악취에 미간을 찌푸렸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런 역겨움만큼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끝내 무뎌지지 않았다.
“오빠, 저긴 어때? 덜 무너진 것 같아.”
여동생 예진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지직거리는 잡음과 섞여 들려왔다. 지훈은 시선을 들어 예진이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거대한 빌딩 숲에서 유독 외벽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건물이었다. 유리창은 대부분 깨져나갔지만, 형태만은 어엿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여느 때처럼 폐허 속에서 보물을 찾는 하이에나처럼 움직이던 두 남매의 발걸음이 그제야 조금 빨라졌다.
“조심해. 멀쩡해 보이는 곳이 더 위험해.”
지훈은 그렇게 말하며 녹슨 철근이 삐져나온 잔해들을 피했다. 이런 곳일수록 함정이 많았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구조물, 예측할 수 없는 균열, 그리고… 다른 생존자들. 하지만 며칠째 식량도, 물도 변변치 못하게 찾아 헤맸던 터라, 이들의 절박함은 경계심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예상했던 대로 매캐한 먼지가 가득했다. 부서진 가구들의 잔해와 깨진 유리가 뒹구는 삭막한 풍경은 여느 폐허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층계를 오르며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조금씩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다른 층들은 대부분 폭격을 맞아 허물어졌지만, 이 건물은 이상하리만치 일부 층만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이쪽으로 와 봐, 오빠!”
예진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지훈은 낡은 문을 조심스레 열고 예진이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순간, 멈칫했다.
이건… 말도 안 돼.
방 안은 먼지가 쌓여 있긴 했지만, 다른 곳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온전했다. 찢어진 소파 위에는 얇은 이불이 개어져 있었고, 식탁 위에는 곰팡이가 피지 않은 캔들이 놓여 있었다. 한쪽 벽에는 물병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누가… 누가 살았던 곳 같아.”
예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정도 보존 상태는 기적에 가까웠다. 세상이 멸망한 지 십 년이 넘도록, 이런 곳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지훈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방 안을 꼼꼼히 살폈다. 누군가 살았다면, 지금은 어디에? 왜 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났을까?
하지만 눈앞의 희망은 너무나 달콤했다. 캔을 따자 녹슨 냄새 대신 익숙한 음식 냄새가 풍겨왔다. 지훈은 반사적으로 침을 삼켰다.
며칠간의 배고픔과 갈증이 한순간에 해소되자, 삭막했던 현실에도 잠시나마 온기가 도는 듯했다. 두 사람은 캔을 깨끗하게 비우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우리… 여기서 며칠만 머물러도 될까?”
예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훈은 예진의 눈빛을 보았다. 피곤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눈동자에 오랜만에 희망이 어렸다.
“그래. 그래야지.”
지훈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이곳은 너무나 완벽했다. 완벽해서 불길했다. 하지만 지훈은 감히 그 불길함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예진의 저 눈빛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 또한 이곳의 안락함을 외면할 수 없었다.
밤이 되자, 폐허가 된 도시의 적막감은 더욱 깊어졌다. 방 안의 캔들을 켰지만, 그 희미한 불빛은 오히려 그림자를 길게 드리워 공포감을 증폭시켰다. 지훈은 깨진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막으려 애썼다.
“오빠, 저기… 무슨 소리 안 들려?”
예진이 귓속말하듯 물었다.
“무슨 소리?”
지훈은 귀를 기울였다. 녹슨 철근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야, 아무것도 없어.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 들리는 거야.”
지훈은 예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예진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어둠 속을 응시했지만, 이내 지훈의 품에 기댔다.
지훈은 잠들기 전, 벽에 기대어 앉아 망연히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걸까? 아니면, 내가 듣지 못하는 걸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다음날 아침, 지훈은 먼저 일어났다. 예진은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다. 지훈은 조용히 방을 나와 주변을 탐색했다. 어쩌면 이곳에 다른 보물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는 옆방으로 향했다. 역시나 이곳도 비교적 깨끗했다. 방 한구석에는 찢어진 옷가지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오래된 서랍장 위에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여인이 서 있었다. 이곳에 살던 사람일까?
지훈은 서랍장을 열었다. 텅 비어 있는 서랍장 맨 아래 칸에서, 낡은 일기장 하나를 발견했다.
‘오늘도 혼자였다. 물은 아직 충분하지만, 식량이 바닥나고 있다. 나도 조만간 저들과 같은 운명이 될까?’
일기장 속 글씨는 흐릿하고 희미했다. 지훈은 일기장을 덮었다. 이곳이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라는 사실이 서서히 그의 목을 조여왔다.
그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빠, 뭐 해?”
예진의 목소리였다. 지훈은 깜짝 놀라 일기장을 재빨리 등 뒤로 숨겼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둘러보고 있었어.”
예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하게 웃었다.
“우리 어제 너무 잘 잤다, 그치? 오랜만에 편안하게 잔 것 같아.”
예진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지훈은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든 평화가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사실을 차마 예진에게 말할 수 없었다.
며칠이 더 흘렀다. 두 남매는 이 폐허 속 아파트에서 잠시나마 안락함을 누렸다. 식량과 물은 아직 충분했고, 다른 생존자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예진의 불안감은 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오빠, 어제 내가 물병을 저쪽에 뒀는데, 왜 이쪽으로 옮겨져 있어?”
어느 날 아침, 예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가 마시다가 놓고 온 거겠지. 잠결에 움직였나 보네.”
“그런가…?”
예진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또 다른 일이 발생했다.
“오빠, 내 나이프 어디 갔어? 침대 밑에 뒀는데 없어졌어.”
예진의 얼굴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나이프는 생존자에게는 생명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못 봤는데? 잘 찾아봐. 어디 흘렸을 수도 있잖아.”
지훈은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도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아니야! 분명히 침대 밑에 뒀어! 오빠가… 오빠가 가져간 거 아니야?”
예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지훈은 예진의 어깨를 잡았다.
“예진아, 정신 차려. 내가 왜 네 나이프를 가져가. 우리가 서로 믿지 못하면 어떻게 살아남아? 너무 오래 고립돼서 예민해진 거야.”
지훈의 말에 예진은 울먹였다.
“하지만… 하지만 누가 계속 뭔가를 옮겨놓고, 내 물건을 가져가. 난 알아! 누군가 우리 말고 또 있어!”
예진은 거의 울부짖다시피 했다. 지훈은 예진을 끌어안았다.
“아니야, 아무도 없어. 이 넓은 폐허에 우리밖에 없어. 그저 네가 너무 지쳐서 그래. 불안해서 헛것이 보이는 거야. 괜찮아. 내가 있잖아.”
지훈은 예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지훈은 잠들지 못했다. 예진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누가 계속 뭔가를 옮겨놓고… 내 물건을 가져가.’
정말 예진이 헛것을 보는 걸까?
지훈은 조용히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그때, 그의 시선이 바닥에 놓인 물병으로 향했다. 어제 분명히 세 개가 나란히 있었는데, 지금은 두 개뿐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누군가 마신 흔적이었다.
지훈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그의 손은 깨끗했다. 어제 물을 마신 것은 예진이었다. 하지만 예진은 잠들어 있다. 그렇다면…
그는 문득 며칠 전, 자신이 읽었던 낡은 일기장을 떠올렸다.
‘오늘도 혼자였다. 물은 아직 충분하지만, 식량이 바닥나고 있다. 나도 조만간 저들과 같은 운명이 될까?’
‘저들’… 일기장 속 화자는 무엇을 두려워했던 걸까?
지훈은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그는 다시 한번 방 안을 꼼꼼히 살폈다. 이번에는 평소와는 다른,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리고 소파 밑에서 작게 튀어나온 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나무 조각이었다. 예진의 나이프 손잡이와 비슷한 색깔이었다.
지훈은 조용히 소파 밑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잡힌 것은 예진의 나이프였다. 날카로운 칼날이 번뜩였다. 그리고 칼날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희미하게 묻어 있었다.
지훈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핏자국? 대체 어디에?
그는 나이프를 든 채로 예진이 잠든 곳으로 다가갔다. 예진은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다. 평화로운 잠이었다.
지훈은 나이프를 든 손을 덜덜 떨었다.
그때, 예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잠꼬대처럼,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빠… 내가 지켜줄게.”
지훈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내가 지켜줄게.
그 말은 마치 누군가 과거에 지훈에게 했던 말 같기도 했고, 동시에 예진이 지금껏 자신에게 해온 말 같기도 했다.
그는 문득 혼란스러운 기억의 파편들을 떠올렸다. 며칠 전, 자신이 잠결에 캔을 따서 먹었던 것 같은 희미한 기억. 그리고 어딘가에 칼을 휘둘렀던 것 같은 악몽.
그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던 걸까?
지훈은 혼란에 빠졌다. 예진의 나이프에서 발견된 핏자국. 그리고 예진이 자신이 물건을 옮겼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움직인 것들이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밤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움직였던 기억들.
아니, 그게 아니야.
그의 눈은 흐릿해졌다. 정말 예진의 말처럼,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걸까? 아니면…
지훈은 나이프를 든 채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손가락 끝에 말라붙은 붉은 흔적이 보였다.
그것은 핏자국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지훈은 자신의 어깨에 있는 깊은 상처가 며칠째 아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이 잠결에 낸 상처였다.
“아… 아니야…”
지훈은 헛숨을 들이켰다.
그는 예진이 헛것을 본다고 치부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정신이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고립된 공간에서, 살아남기 위한 절박함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예진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서로 믿지 못하면 어떻게 살아남아?’
그 말을 했던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예진은 계속해서 경고했다. 누군가 있다고. 하지만 지훈은 애써 외면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지금까지 예진이 느꼈던 불안감, 의심, 공포의 원인이…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예진은 여전히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떠한 악의도, 광기도 서려 있지 않았다. 그저, 지친 세상에서 잠시나마 안식에 든 가여운 소녀일 뿐이었다.
지훈은 나이프를 든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팔은 격렬하게 떨렸다.
‘내가… 내가 지켜줄게.’
예진의 잠꼬대가 다시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의 눈은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 자신이, 예진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의 정신은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나이프는 허공에서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그의 눈에, 창문 밖으로 보이는 회색빛 하늘이 들어왔다. 죽은 도시의 뼈대들 사이에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세상 속에서, 그는 홀로 서 있었다.
그는 과연, 누구로부터 예진을 지켜야 하는가.
그리고 누가, 그를 지켜줄 것인가.
나이프는 결국 허공에서 떨어져, 바닥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박혔다.
예진은 그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지훈은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의 눈에는 고인 물처럼 텅 빈 허무함만이 가득했다.
창밖의 바람 소리가, 마치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듯, 더욱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는 혼자였다. 영원히 혼자였다.
이 폐허 속에서, 무너져가는 세상 속에서, 그리고 무너져가는 자신 속에서.
그는 예진을 바라보았다. 예진의 얼굴은 너무나 평화로워 보였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며칠 전 일기장을 꺼냈던 서랍장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치 누군가 서랍장을 열고, 무언가를 꺼내는 듯한 소리였다.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아니,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걸까?
그의 텅 빈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광기가 서서히 깃들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한번, 나이프를 든 손을 뻗으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예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빠… 괜찮아?”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또렷하고, 차분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지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둠이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그 속에서, 오직 알 수 없는 침묵만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 침묵은, 그 어떤 비명보다도 섬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