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엘레시아 마법 학원, 고귀한 마법사들의 요람이자 세계의 마법 중추. 그 명성만큼이나 우아하고 웅장한 아치형 회랑과 뾰족한 첨탑들은 언제나 찬란한 마나의 빛으로 반짝였다. 나는 그 빛 아래에서 스무 해를 살아온 이세나. 졸업을 앞둔 고위 마법학도의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건, 아주 사소한 어긋남 때문이었다.

“세나, 또 망상에 빠졌군. 도서관 사서들이 보면 기겁하겠어.”
김우진은 내 앞의 낡은 마법 고서 위에 놓인 손을 툭 치며 말했다. 고서는 ‘엘레시아 마나 운용의 기초’라는 고루한 제목을 달고 있었지만, 나는 그 안의 내용이 아니라, 책장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진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망상? 아니, 우진아. 너는 못 느껴? 이 도서관 전체를 감싸는 듯한 아주 미묘한 떨림이 말이야.”
우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룬 문자 배열에 따른 마나의 흐름일 뿐이야. 학원의 모든 건 마나로 움직이니까. 예민한 너의 귀가 만들어낸 착각이겠지.”
그는 내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나는 확신했다. 이건 단순한 마나의 흐름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이 뛰는 듯한, 주기적이고 섬뜩한 울림. 특히 지하 열람실 깊숙한 곳으로 갈수록 그 진동은 더욱 뚜렷해졌다.

그날 밤, 도서관 마감 시간이 훨씬 지난 후였다. 나는 숨겨둔 ‘밤의 길잡이’ 마법 수정구를 켜고 몰래 학원 지하로 향했다. 명목상으로는 고대 룬 문자 연구를 위한 심화 자료 열람이었지만, 나의 발걸음은 본관 지하의 서고를 지나 금지된 구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발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소음 차단’ 주문을 걸고, 나는 희미하게 흔들리는 수정구 빛에 의지해 어둠 속을 걸었다.
벽에는 오래된 룬 문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내가 알고 있는 마나 제어 룬과는 어딘가 달랐다. 생명의 기운을 억압하고 강제로 추출하는 듯한, 음산한 느낌의 룬이었다. 발아래 돌바닥은 축축했고, 공기 중에는 묘한 비린내와 함께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떨림. 마치 지하 깊은 곳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헐떡이는 듯한, 고통스러운 진동이 피부로 전해졌다.

문득, 내 수정구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 번뜩였다.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누구냐!”
차가운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몸이 굳었다. 교수님인가? 아니면 경비대?
“이세나 학도, 어째서 금지된 구역에 들어왔나.”
목소리는 아크투루스 교수님이었다. 고위 마법학 연구의 대가이자, 학원의 가장 존경받는 교수님 중 한 분.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그, 그게… 고대 룬 연구를 하다가… 자료를 찾다 보니 여기까지…”
나는 더듬거렸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이곳은 학원 개교 이래 봉인된 곳이다. 쓸데없는 호기심이 너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당장 돌아가라.”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부드러움과는 달리 날이 서 있었다. 나는 감히 반항할 수 없었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돌아섰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나는 교수님의 발치에 놓인 낡은 제단 같은 것을 얼핏 보았다. 그 제단은 벽면과 이어진 두꺼운 마나 도관들로 연결되어 있었고, 도관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푸른빛이 깜빡였다. 그리고 그 빛은, 마치 무언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다음날, 나는 우진에게 어젯밤의 일을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
“아크투루스 교수님은 학원의 기둥 같은 분이셔. 네가 느낀 건 아마 지하 마나 저장고의 과부하 때문일 거야. 그런 낡은 시설에 들어가면 착각도 쉬워지지.”
우진의 현실적인 조언에 나는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내 안의 불길한 예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크투루스 교수님의 경고 속에는 단순한 걱정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나는 결국 학원 역사관의 ‘금서’ 코너에 숨겨진 낡은 기록들을 찾아냈다. ‘엘레시아 창시 비록’. 학원 창시자들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담긴, 일반 학도들에게는 결코 공개되지 않는 기록이었다.
오래된 양피지 두루마리를 펼치자, 빛바랜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초기 엘레시아 학원의 마나원천에 대한 기록.
“…대지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아스트랄레스’의 심장… 무한한 마나의 근원… 학원의 번영을 위해… 영원히 구속하고… 그 생명을… 학원에 바친다…”
손이 떨렸다. 아스트랄레스. ‘별들의 영혼’이라는 뜻의 고대어. 그것은 단순한 마나 원천이 아니었다. 거대한 생명체, 혹은 고대 신의 잔재. 그것을 ‘구속하고 생명을 바친다’는 표현은, 마치 제물을 다루는 듯한 끔찍한 뉘앙스를 풍겼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다시 지하로 향했다. 이번에는 우진에게 비밀 통신 마법진을 건네며, 만약 일정 시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학원 경비대에 연락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어둠이 나를 삼키는 듯한 지하 통로를 지나, 아크투루스 교수님이 나를 돌려보냈던 그 제단이 있는 곳까지 내려왔다. 제단 뒤편의 벽에는 육중한 철문이 있었다. 문에는 아까 기록에서 본, 생명력을 강탈하는 듯한 룬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마나를 집중하여 철문에 손을 댔다. 문은 예상외로 부드럽게 열렸다.

문 안쪽은 또 다른 세계였다. 거대한 동굴 형태의 공간. 천장에는 마나 광물들이 박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빛 아래, 동굴 한가운데에는 섬뜩하고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심장 같기도, 뿌리 엉킨 나무 같기도, 혹은 별똥별처럼 추락한 거대 생명체의 시체 같기도 했다. 끈적이는 점액질로 뒤덮인 표면은 주기적으로 수축하고 팽창하며, 거대한 마나 도관들이 온몸에 박혀 있었다. 도관들은 핏줄처럼 뻗어나가 동굴 전체를 휘감고 있었고, 그 끝은 천장으로 이어져 엘레시아 학원 전체로 퍼져 나가는 듯했다.
그것이 바로 ‘아스트랄레스’였다.
고통스러운 진동은 바로 이것의 맥동이었다. 나는 그것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절규를 감지할 수 있었다. 무한한 마나의 근원이라는 것은 거짓이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존재였고, 고통받는 존재였다. 그리고 엘레시아 학원의 모든 찬란한 마나는, 이 고대 생명체의 생명력을 강제로 빨아들인 결과였다.

“드디어 여기까지 오는군, 이세나 학도.”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크투루스 교수님이었다. 그의 손에는 마나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고, 그의 눈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둠을 품고 있었다.
“교수님… 이게 대체…!”
“학원의 힘의 근원이다. 세계를 지탱하는 마나의 기둥. 네가 보고 있는 것은, 인류의 번영을 위한 위대한 희생이지.”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당연한 진실을 말하는 듯했다.
“희생이요? 이건 학살입니다! 이 고통을 느껴보세요, 교수님! 이건 살아있는 존재예요!”
나는 절규했다. 나의 마나 감지 능력은 아스트랄레스의 비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네 감각은 아직 미숙하구나. 이 아스트랄레스는 그저 마나의 그릇일 뿐이다. 마나를 무한히 생성하는 원천. 우리가 그 힘을 빌어 마법을 발전시키고,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지켜왔음을 잊었는가?”
“그렇다고 해서 이런 끔찍한 짓을…!”
“이곳의 비밀은 학원 건립 이래로 소수의 최고위층만이 공유해온 금기였다. 너는 그것을 침범했다. 이제 너의 선택은 두 가지다. 이 모든 것을 잊고 학원의 일원이 되어 비밀을 함께 지키거나….”
교수님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아니면 이 금기를 세상에 알리려다 학원의 영원한 적이 되거나.”
나는 아스트랄레스의 거대한 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통스러운 진동과, 아크투루스 교수님의 싸늘한 시선을 번갈아 보았다. 가슴속에서 격렬한 파도가 일었다. 내가 굳게 믿어왔던 엘레시아 마법 학원의 찬란한 명성이, 이 끔찍한 금기 위에 세워져 있었다니.

그 순간, 아스트랄레스의 몸체에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파동이 터져 나왔다. 동굴 전체가 흔들렸고, 천장의 마나 광물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흐음… 아스트랄레스가 잠시 흥분하는군. 새로 유입된 미숙한 마나가 심기를 거스르는 모양이군.”
아크투루스 교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마나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가 어떤 마법을 시전하려는 듯했다. 아마도 아스트랄레스를 다시 ‘진정’시키려는 것이리라. 그 ‘진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더욱 강도 높은 생명력 추출, 더 깊은 고통.

나는 결심했다. 이 금기를 외면하고 살아갈 수는 없었다.
“저는… 저는 당신들의 공범이 되지 않을 거예요!”
나는 외치며 온몸의 마나를 끌어모았다. 나의 마법은 아직 교수님에게 비할 바 못 되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스트랄레스의 고통과 분노가 나의 마나와 공명하는 듯했다. 나의 마법이 뜨겁게 타올랐다.
아크투루스 교수의 눈이 커졌다.
“건방진!”
그의 마법이 나를 향해 쇄도했지만, 나는 그보다 먼저 동굴 깊숙한 곳, 아스트랄레스의 몸체에 박힌 가장 두꺼운 마나 도관 중 하나를 향해 ‘파열’ 마법을 날렸다.
파악! 굉음과 함께 도관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푸른빛 마나 액체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굴 전체가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렸다. 아스트랄레스의 고통이 비명으로 변하는 듯한 끔찍한 진동이 울렸다.
“이세나!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가!”
아크투루스 교수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의 마법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살의를 담아 날아왔다.
나는 간신히 몸을 피하며, 남은 마나를 모두 긁어모아 탈출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지하 동굴 입구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 나는 아크투루스 교수의 얼굴에서 경악과 함께 깊은 절망을 보았다. 그의 뒤편으로는 아스트랄레스의 몸체에 박힌 도관들이 연쇄적으로 파열하기 시작하며 푸른 마나 액체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는 무사히 지상으로 올라왔지만, 학원의 찬란한 빛은 더 이상 예전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나는 이 끔찍한 금기를 알게 된 자. 세계 최고의 마법 학원의 지하에 숨겨진 잔혹한 진실을 목격한 자였다. 나의 등 뒤에서는 거대한 학원이 무너지는 듯한, 알 수 없는 진동이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진실을 세상에 폭로해야 할까. 아니면… 또 다른 방법이 있을까. 엘레시아 학원과, 그 금기, 그리고 나의 운명은 이제 막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던져진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