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의 비무제**
**제1장: 피의 서막**
절망산맥은 그 이름만큼이나 불길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과 깊이를 알 수 없는 협곡 사이로 음습한 바람이 끊임없이 휘몰아쳤고, 기이하게 뒤틀린 고목들은 마치 살아있는 악령처럼 가지를 뻗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강현은 척박한 산길을 따라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심장이 옥죄는 듯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며칠 전, 강호 전체를 뒤흔들었던 붉은 서찰 한 장이 그의 문중에도 당도했다. 내용인즉슨, ‘나락의 비무제’에 천하의 운명을 걸고 참석하라는 지엄한 명령이었다.
이곳, 절망산맥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암운각’.
검은 먹을 뿌려놓은 듯한 하늘 아래, 기괴하게 솟아오른 거대한 암석 봉우리 한가운데에 고대 신전처럼 웅장한 누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축된 지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그곳은 인간의 손으로 지었다기엔 믿기 힘든 기운을 뿜어냈다. 누각의 검은 기와는 핏빛 햇살을 받아 번들거렸고, 사방을 둘러싼 거대한 돌기둥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문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그 글자들에서는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왔는데, 마치 살아있는 존재가 숨 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강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발밑의 흙은 이상하리만치 축축했고, 코끝에는 옅은 쇠 비린내가 맴돌았다. 죽음과 부패의 냄새는 아니었다. 마치 수만 개의 생명이 한꺼번에 피를 흘린 뒤 응어리진 듯한, 생경한 악취였다. 그는 이곳에 온 다른 무림 고수들도 같은 것을 느끼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아니, 반드시 느끼고 있어야만 했다.
암운각의 거대한 철문이 마치 거인의 입처럼 벌어져 있었다. 그 안에서는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듯했고, 묘한 정적이 그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강현이 발걸음을 옮기자, 그의 뒤를 따르던 동료 무사 하나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강 사형, 정말 이곳이 천하의 운명을 논할 장소입니까? 제 아무리 무림맹이라 해도, 이런 마도(魔道)의 기운이 서린 곳을…”
동료의 말은 채 끝나기도 전에 강현의 싸늘한 시선에 멎었다.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마도인지 아닌지, 그 누가 감히 단정할 수 있겠는가. 다만, 불길한 것은 사실이다.”
철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연무장이 펼쳐졌다. 바닥은 검붉은 대리석으로 깔려 있었고, 연무장 한가운데에는 십여 개의 거대한 횃대가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불꽃은 주변의 어둠을 완전히 걷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길고 불규칙한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기괴함을 더했다.
이미 수많은 무림 고수들이 연무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북해빙궁의 궁주부터 시작하여, 남궁세가의 가주, 소림의 방장, 무당파의 도사, 그리고 강호에 이름을 떨친 악명 높은 살수들과 각 문파의 장로들까지. 평소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조합이었다. 이들은 서로에게 날 선 시선을 던지면서도,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계심과 함께, 이곳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에 대한 의문이 뒤섞여 있었다.
강현은 익숙한 얼굴들을 찾았다. 그의 스승인 현무궁주 또한 한쪽 편에 조용히 서 있었다. 수십 년간 강호를 호령했던 그의 스승조차도, 이곳의 압도적인 기운 앞에서는 평소의 위엄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고, 굳게 다문 입술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때였다. 연무장 한가운데, 횃불조차 미치지 못하는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희미한 푸른빛이 솟아올랐다. 빛은 점차 강해지며 사람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나타난 것은, 검은 도포를 입은 한 사람이었다. 그의 얼굴은 깊은 후드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마치 영겁의 세월을 견딘 듯한 깊은 존재감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주변을 에워싼 고수들조차 그의 등장에 숨을 죽였다.
“환영한다, 강호의 영웅들이여.”
나직하고 기이한 목소리가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사람의 목소리라기엔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낡은 쇠붙이가 서로 부딪히는 듯도 했고, 땅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웅장한 종소리 같기도 했다. 동시에 수많은 이들이 속삭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섬뜩한 음성이었다.
“짐작하건대, 너희는 이곳에 왜 모였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을 것이다.” 검은 도포의 인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지만, 여전히 후드 그림자 아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균열하고 있다. 너희가 아는 세상, 무림의 질서, 인간의 삶. 그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위기에 처했다.”
웅성거림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그의 다음 말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만월이 뜨는 밤, 차원(次元)의 틈새가 완전히 열릴 것이다. 그 틈을 통해 나락의 그림자가 이 세상에 드리워질 것이며, 너희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이다. 우리가 모인 것은 그 그림자를 막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임무를 수행할 단 한 명의 무인을 가리기 위함이 바로, 이 나락의 비무제다.”
나락의 비무제. 그 이름은 강현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단순히 무림의 패자를 가리는 대회가 아니었다. 이 세상 자체의 명운이 걸린, 피로 물들 잔혹한 의식이었다.
“규칙은 간단하다.” 검은 도포의 인물은 손을 들어 연무장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연무장 벽에는 십여 개의 쇠사슬이 늘어져 있었는데, 그 끝에는 섬뜩한 형상의 도구들이 매달려 있었다. “이곳에서 피를 흘려라. 너희의 무공으로 서로를 꺾어라. 오직 가장 강한 자만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살아남은 자에게는, 나락의 그림자를 봉인할 힘이 부여될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연무장 한편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쨍그랑!’ 쇠사슬에 매달린 도구 중 하나가 갑자기 땅으로 떨어지며 파열했다. 동시에 그 자리에서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고, 강현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쓰러져 있는 한 무사의 모습이었다. 그는 명문 정파의 젊은 고수 중 한 명으로, 얼마 전까지도 강현의 시선이 머물렀던 인물이었다. 그의 목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지만,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두 눈은 공포에 질려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영혼이 송두리째 뽑힌 듯한 모습이었다.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아무런 무기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저 쇠사슬의 소리 한 번, 그리고 붉은 안개. 그런데도 그는, 죽어 있었다.
강현의 등골을 차가운 전율이 훑고 지나갔다. 이것은 단순한 대회가 아니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존재가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으며, 이미 게임은 시작되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 나락의 비무제는, 피와 공포로 물든 잔혹한 서막에 불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