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우는 오늘따라 유난히 퇴근길이 무거웠다. 꽉 막힌 도로, 에어컨마저 뜨뜨미지근한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 보면 영혼이 반쯤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겨우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발을 들이자, 그제야 살 것 같다는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좁디좁은 원룸이지만, 그래도 이 빌어먹을 도시에서 유일하게 자기 이름이 붙은 공간이었다.
축 늘어진 몸으로 대충 샤워를 마치고, 냉장고에서 며칠 전에 사다 놓은 편의점 도시락을 꺼냈다. 전자레인지에 ‘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도시락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습관처럼 방을 둘러봤다. 어제 벗어 던진 양말은 여전히 침대 발치에 널브러져 있었고, 밤새도록 봤던 웹툰의 잔해가 담긴 태블릿은 충전기에 연결되어 있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조금은 지저분한 그의 일상이었다.
도시락을 꺼내 식탁에 내려놓으려는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분명 아침에 나갈 때 닫았던 냉장고 문이 아주 살짝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미세한 틈새로 냉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내가 또 건망증이 도졌나?”
현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문을 닫았다. 이런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피곤할 때는 기억도 가물가물해지는 법이니까. 그는 애써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식탁에 앉았다. 따끈하게 데워진 도시락을 한 숟갈 뜨는 순간, 등 뒤에서 ‘딸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관문 잠금장치였다. 분명 잠겨있었을 텐데, 이제 막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였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침입자인가? 손에 든 젓가락이 덜덜 떨렸다. 숨소리마저 죽인 채 굳은 몸으로 현관문을 노려봤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잠금장치도 다시 ‘찰칵’ 소리를 내며 잠겨 있었다.
“뭐야… 착각인가?”
현우는 온몸에 돋아난 소름을 애써 무시하며 중얼거렸다. 도시락을 먹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해치우고 설거지를 했다. TV를 켜고 뉴스를 보려 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시선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분은 점점 더 찝찝해졌다. TV 소리를 높여도 귀를 파고드는 정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대로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억지로라도 평정심을 찾기 위해 침대에 앉아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마저 보지 못한 웹툰을 켜고 스크롤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탁!’
태블릿이 그의 손에서 튕겨져 나갔다. 정확히는, 누군가 손으로 후려친 것처럼 옆으로 튕겨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강화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액정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아악!”
현우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태블릿을 주우려는데, 침대 발치에 놓여있던 옷가지들이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집어 올리는 것처럼, 청바지 한 벌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휙, 하고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이게… 이게 뭐야?!”
현우의 눈이 공포에 질려 크게 뜨였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착각도, 건망증도 아니었다. 명백한 ‘무언가’였다. 그는 뒤로 기어가 벽에 등을 기댔다. 눈은 사방을 훑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움직이는 듯했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펜꽂이가 기우뚱하더니 안에 꽂혀 있던 펜들이 한두 개씩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머그컵이 탁자 위에서 미끄러져 추락했다. 식탁 의자 하나가 끼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려났다.
현우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건 마치… 영화에서나 보던 폴터가이스트 현상이었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그의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선반에 가지런히 꽂혀 있던 책들이 일제히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우당탕탕!’ 굉음과 함께 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그리고 그 먼지 속에서, 아주 잠깐, 무언가 일렁이는 듯한 형체가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아니, 감을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거실 한가운데 놓여있던 자그마한 협탁이 천천히, 아주 느리게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마치 마법처럼. 현우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협탁은 그의 눈높이까지 떠오르더니, 이내 정지했다. 그리고 그 협탁 위에서, 현우가 평소 즐겨 마시던 커피잔이 덜그럭거리며 흔들렸다.
커피잔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마치 유령의 손에 들린 것처럼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더니 컵 안에서,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물이 넘실거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찰랑, 찰랑.’
그리고 그 순간, 컵 안에서 옅은 푸른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희미한 푸른빛은 점점 짙어지더니, 이내 컵을 가득 채웠다. 커피잔은 푸른 오라에 휩싸여 마치 작은 우주를 담은 듯 빛났다.
“크으으윽…!”
현우는 공포에 질려 발버둥 쳤지만, 몸은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푸른빛은 컵 밖으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그의 작은 원룸을 가득 채웠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현우의 시야를 잠식했다.
고막을 찢을 듯한 이명과 함께, 알 수 없는 언어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그의 뇌리에 파고들었다. 마치 수천 명이 동시에 말하는 듯 혼란스럽고 기괴한 소리였다.
현우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의 정신은 한계에 달했다. 온몸의 힘이 스르륵 풀리며, 그는 푸른빛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마지막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타오르는 푸른색 불꽃이었다.
그리고 어렴풋이,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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