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3: 사라진 간판 아래**
회색빛 먼지가 발걸음을 따라 푸석하게 피어올랐다. 진우는 익숙하게 낡은 마스크를 고쳐 썼다. 쨍한 여름 햇살은 뜨겁다 못해 따가웠지만, 그 열기조차 세상의 모든 색을 바싹 말려버린 듯한 황량함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눈앞에 펼쳐진 도시의 잔해는 거대한 묘비 같았다. 뼈대만 남은 고층 빌딩들은 갈비뼈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길바닥은 깨진 아스팔트와 알 수 없는 파편들로 너덜너덜했다.
진우의 옆을 걷던 예나는 고개를 숙인 채였다. 얇은 스카프로 얼굴의 절반을 가렸지만, 축 처진 어깨에서 피로가 묻어났다. 몇 시간째 걸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시간의 개념마저 퇴색해버린 세상에서, 해가 뜨고 지는 것만이 유일한 이정표였다.
“힘들어?” 진우가 묻자 예나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아니, 괜찮아. 오빠는 안 힘들어?”
진우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익숙해져야지.”
그의 시선은 예나의 손에 들린 낡은 물통으로 향했다. 바닥에 겨우 한 모금 정도 남았을까. 식량도, 물도, 이제는 거의 바닥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이 고철과 먼지 가득한 도시 한복판에서 말라죽을지도 몰랐다. 어제 간신히 찾은 통조림 하나로 버텼지만, 그것도 이제는 그림자에 불과했다.
“저기 봐.” 진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한때 번화가였을 곳의 폐허였다. 모든 간판이 떨어져 나가거나 부서져 알아볼 수 없었지만, 유독 하나의 건물만은 원형을 제법 유지하고 있었다. 벽면에 큼지막한 글씨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세븐 데이즈 마트’.
예나의 눈이 커졌다. “마트? 설마, 거기에 아직도 뭐가 남아있을까?”
진우는 망설였다. 이런 대형 상점은 이미 수없이 많은 생존자들이 휩쓸고 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동시에, 어쩌면 모두가 간과한 구석진 곳에 무언가 남아있을 수도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아내는 건, 생존자들의 유일한 재능이었다.
“가보자. 어차피 이대로 가면… 더는 답이 없어.”
그들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트 주변은 으스스한 침묵이 감돌았다. 깨진 유리 파편이 흩어진 입구는 거대한 이빨 빠진 입처럼 벌어져 있었다. 진우는 배낭에서 녹슨 칼을 꺼내 손에 쥐었다. 날카로운 소리에 예나가 움찔했다.
“따라와. 그리고 절대로, 절대로 내 손 놓지 마.”
“응, 오빠.”
어둠과 먼지가 뒤섞인 마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썩은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희미한 금속성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천장의 조명은 모두 깨져나갔고, 군데군데 뚫린 구멍 사이로 얇은 햇빛이 스며들어 거대한 먼지 기둥을 만들었다. 바닥은 진열대 잔해와 깨진 병, 정체를 알 수 없는 쓰레기들로 가득했다.
“젠장… 여기도 역시나.” 진우는 탄식했다.
예나는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부서진 카트가 구석에 처박혀 있었고, 음료수 코너였을 법한 곳에는 텅 빈 유리병들만이 나뒹굴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쩌면 애초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헛된 희망에 매달린 대가는 더 깊은 절망뿐이었다.
그때, 예나의 눈이 한곳에 멈췄다. “오빠, 저기…!”
진우의 시선이 예나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진열대들이 처참하게 쓰러져 있는 구석, 벽에 붙어있던 작은 사무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아마도 직원들이 물품을 보관하거나 쉬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굳게 잠겼던 문이 어설프게 열려 있다는 건…
“누군가 이미 왔다 갔을 수도 있어.” 진우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서렸다.
“그래도… 확인해 봐야 하잖아.” 예나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작은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여 문으로 다가갔다. 녹슨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까 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칼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문틈으로 안을 엿보려는데, 갑자기 예나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오빠… 저거…!”
예나의 시선이 가리킨 곳은 사무실 문 아래였다. 바닥에 희미하게 찍힌 발자국. 흙먼지가 뒤덮인 마트 바닥에, 비교적 최근에 찍힌 듯한 선명한 운동화 자국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개의 발자국이 사무실 문 안쪽으로 향해 있었다.
진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 마트에 다른 생존자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방금 전까지.
“빨리, 예나. 여기서 나가야 해.” 진우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어! 지금은 나가는 게 먼저야!”
진우는 예나의 손을 꽉 잡고 돌아서려 했다. 그때, 사무실 문 안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툭*.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진우는 본능적으로 예나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소리는,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그들은 완벽한 사냥터에 들어선 것이었다.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잡은 칼자루에 땀이 흥건했다.
“숨 쉬지 마, 예나.”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사무실 문이 안쪽에서 완전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드리워진 길고 검은 그림자.
그림자는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