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세상이 뒤집혔다. 스크린에서 막 튀어나온 듯 거대한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눈앞을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삶의 마지막 조각들이 필름처럼 눈앞을 스쳤다. 서른 넘도록 이룬 것 하나 없던 인생, 아침마다 지하철에 몸을 싣고 퇴근길엔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던 반복적인 나날들. 꿈이라기엔 너무나 희미하고, 현실이라기엔 너무나 초라했던 나의 전부. 가족도, 친구도, 못다 이룬 꿈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거대한 충격. 그리고 이어지는 먹먹한 어둠.
아, 이렇게 끝이구나. 참으로, 허무한 마지막이었다.
***
싸늘한 바닥, 퀴퀴한 흙냄새, 그리고 온몸을 짓누르는 고통.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 기둥들이 복잡하게 얽혀 만든 거친 구조물. 비스듬히 새어 들어오는 햇살은 뿌옇고 흐렸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분명… 죽었을 텐데.
몸을 일으키려 애썼지만,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온몸의 관절이 녹슬어버린 기계처럼 삐걱거렸고, 뼈마디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바늘로 쑤시는 듯한 통증을 토해냈다. 겨우 상체를 세우자 비명 같은 신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크윽… 젠장.”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낯설었다. 변성기가 덜 지난 듯 앳되고 가늘었다. 머리카락은 길고 엉켜있었으며, 내 옷은… 낡아빠진 누더기나 다름없었다. 거친 삼베로 만든 회색 도포. 나는 이런 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
손을 들어 올렸다. 핏줄이 도드라진 얇은 손가락,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 거울은 없지만, 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직감이 섬광처럼 스쳤다. 이건… 병약하고 어린아이의 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혼란 속에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때였다. 낯선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마치 강제로 주입되는 것처럼, 거부할 틈도 없이 머릿속을 채웠다.
‘천우’.
‘화산파의 삼류 제자’.
‘병약한 몸, 변변찮은 무공’.
‘사부님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 패배자’.
‘매일 밤 서재에서 몰래 무협 소설을 읽던 어린아이’.
‘무림대회…’.
나는 천우였다. 동시에, 나는 천우가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이 선명한 나는, 이 모든 정보가 그저 ‘설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환생. 이세계 전생. 혹은 빙의.
내가 살아생전 심심풀이로 읽던 웹소설이나 웹툰에서나 볼 법한 황당한 일이 내게 벌어진 것이다.
이름 모를 산자락, 고색창연한 목조 건물들. 낡았지만 어딘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 이곳은… 무림이었다. 정확히는, 강호의 으뜸이라 불리는 문파 중 하나인 ‘화산파’의 하급 제자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것도, 가장 구석진 방이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문밖으로 나섰다. 퀴퀴한 흙냄새 대신 청량한 산바람이 폐부를 찔렀다. 쩌렁쩌렁 울리는 매미 소리, 짙푸른 산새들의 지저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웅장한 봉우리들이 구름과 맞닿아 있었고, 그 아래로는 기와를 얹은 건물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숨이 막힐 듯한 장관이었다.
“어이, 천우! 거기 서서 뭘 어물거려? 사형이 부르신다!”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나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건장한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는 날 못마땅한 눈으로 훑어보더니 혀를 쯧쯧 찼다.
“쯧쯧… 병든 닭처럼 골골댈 시간에 수련이라도 한 번 더 해라. 이번 무림대회가 어떤 대회인 줄은 아느냐?”
“무림대회요…?”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가 여전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멍청한 소리! 천하의 운명이 걸린 대회다! 마교 놈들의 준동이 극에 달해 강호 전체가 위기에 빠졌거늘, 이번 대회를 통해 새로운 무림맹주를 뽑고 천하의 뜻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고! 그런 대명사가 걸린 대회를 준비하는 중인데, 너처럼 늘어져 있을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이냐!”
사내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의 말은, 내 머릿속에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던 ‘설정’들을 현실로 끄집어냈다. 천하의 운명. 마교. 무림맹주.
아아, 그렇구나. 내가 빙의한 이 세계는 그저 평화로운 무림이 아니었다. 거대한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고, 그 위협에 맞서기 위한 중차대한 사건이 눈앞에 닥쳐와 있었다.
나는 겨우 정신을 수습하며 물었다.
“그래서… 제가 뭘 해야 합니까?”
사내는 기가 막힌다는 듯 나를 노려봤다.
“뭘 하긴 뭘 해! 이 사문 앞마당이라도 쓸어야지! 당장 가서 마당 쓸고, 물 길어 와! 어차피 넌 무림대회에 나갈 수도 없을 몸이니, 이런 잡무라도 해라! 이 무능한 놈 같으니!”
뒤통수에 대고 쏘아붙이는 사내의 비난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나를, 아니 ‘천우’를 무능하다고 깔봤다.
병약하고 무공도 변변찮은 삼류 제자.
그의 말대로, 내가 무림대회에 나갈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나가서도 안 될 것이다. 지금 이 몸으로는… 아마 출전했다가는 첫날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능한 놈.
그 단어가 귓가에 맴돌며 묘한 불쾌감을 안겨주었다.
그래, 전생의 나는 무능했다. 이룬 것도, 특별한 것도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천우’가 아니다. 나는 이세계에서 눈을 뜬 새로운 존재다.
이 새로운 기회, 이 새롭게 주어진 삶.
천하의 운명이 걸린 무림대회라…
내 안에서 잊고 지냈던 뜨거운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그래, 무능하다고 욕을 듣는 삶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어쩌면 이번 기회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무림대회. 천하의 운명. 무림맹주.
병약한 몸뚱이에 깃든 나는, 어쩐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에서 끓어오르는 알 수 없는 열망을 느꼈다.
“무능한 놈…”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는 더 이상 병약하게 들리지 않았다.
이 몸은 비록 약하지만… 내 안에 잠든 무언가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나는 강호의 거센 파도를 헤치고, 이 새로운 삶의 한가운데로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분명… ‘무림대회’가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나는 그 무대에 서게 될 것이다.
아니, 서야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