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둠 속의 메아리
고요는 무한했다.
수백만 광년 떨어진 항성계조차 점 하나로 수렴하는 심우주 속, 탐사선 ‘아스트라호’는 외로운 항해를 이어가고 있었다. 은빛 선체가 우주 먼지 사이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며, 오직 인류만이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엔진의 미약한 진동만이 광막한 정적을 깨뜨렸다.
함교는 희미한 비상등 아래 고요했다. 함장 강민준은 젤 패드에 기대어 유니버스 맵을 응시했다. 그는 이곳의 적막이 좋았다. 지구의 번잡함도, 정치적 암투도 닿지 않는 완벽한 고립. 그러나 그 고립이 때로는 숨 막히는 침묵으로 변모하기도 했다.
“함장님, 아무리 심우주라지만 이건 좀 너무하네요.”
항해사 박지훈의 투덜거림이 적막을 갈랐다. 그는 메인 콘솔 옆에 놓인 에너지 바를 우적우적 씹으며 시스템 로그를 훑고 있었다.
“무엇이 말인가, 박 항해사?” 민준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물었다.
“이 빌어먹을 ‘아무것도 없음’요. 보셨어요? 스캔에 잡히는 게 은하수 배경 노이즈 말고는 먼지 한 톨 없어요. 이런 곳까지 와서 이러고 있을 바엔 차라리 태양계 외곽에서 순찰이나 도는 게…”
“임무를 잊었나? 우린 미지의 영역을 탐사하고 있다.” 민준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그 미지가 언제까지 ‘아무것도 없음’으로 남아있으리라 생각하는 건가?”
바로 그때였다.
삐이이이-!
날카로운 경고음이 함교를 뒤흔들었다. 박지훈이 깜짝 놀라 에너지 바를 떨어뜨렸다.
메인 스크린에 불길한 붉은색 경고 메시지가 점멸했다.
<비정상적인 에너지 패턴 감지. 분석 불가능. 경도 3-알파-7, 위도 델타-9-베타.>
“뭐야, 이건?” 박지훈이 허둥지둥 콘솔에 매달렸다. “이런 경고음은 처음 듣는데요!”
민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즉시 수석 과학자 서 박사를 호출해! 최대 출력으로 스캔해!”
서둘러 함교로 달려온 수석 과학자 서연은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친 채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잠기운 대신 날카로운 지적 호기심이 가득했다.
“무슨 일입니까, 함장님? 이 시간까지 이런 소동은…”
“화면을 보시죠, 서 박사.” 민준이 손가락으로 메인 스크린을 가리켰다.
스크린에는 낯선 그래프와 숫자들이 빠르게 깜빡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그 패턴이 어떠한 알려진 물리 현상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서연의 눈이 순식간에 확장됐다. 그녀는 콘솔로 다가가 재빨리 데이터를 확인했다.
“이건… 비전도성 물질에서 나오는 에너지 반응입니다. 하지만 그 규모가… 소형 항성계의 에너지 출력과 맞먹어요. 게다가 패턴이 주기적이지 않고 무작위적입니다. 마치… 노이즈 같아요.”
“노이즈? 이렇게 강한 에너지 반응이?” 박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대체 뭡니까? 블랙홀입니까? 아니면 특이점?”
“블랙홀이나 특이점이라면 중력 렌즈 현상이나 시공간 왜곡이 감지되어야 합니다. 이건 그 어떤 것도 아니에요. 심지어… 공간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에서 나오는 에너지 같습니다.” 서연의 목소리에 흥분과 경외심이 섞여들었다. “함장님, 이 물체에 최대한 접근해야 합니다.”
민준은 잠시 고민했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접근은 늘 위험을 수반했다. 하지만 그의 직감은 이 발견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속삭였다. 인류가 이 광대한 우주에서 처음으로 마주할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예감.
“알겠다. 비상 프로토콜 ‘이그드라실’ 가동. 모든 승무원은 비상 대기 상태로 전환한다. 박 항해사, 궤도 이탈. 목표 지점으로 최단 시간 접근. 단,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아스트라호의 방어막은 최대 출력으로 유지한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박지훈의 목소리에 긴장감과 함께 묘한 기대감이 실렸다.
아스트라호는 방향을 틀어 미지의 에너지원을 향해 나아갔다. 수천 광년 떨어진 곳에서 별들이 희미한 점으로 빛나는 동안, 그들은 어둠 속으로 더 깊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몇 시간 뒤, 아스트라호의 정밀 스캐너가 마침내 미지의 물체의 윤곽을 포착했다.
메인 스크린에 흐릿하게 나타난 물체의 모습은 모두의 숨을 멎게 했다.
“저게… 대체 뭡니까?” 박지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은 거대했다. 아스트라호의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크기.
그리고 불가능한 형태로 존재했다.
검은색. 단순히 빛을 흡수하는 검은색이 아니었다. 마치 주변의 공간과 빛마저 빨아들이는 듯한, 우주 자체보다 더 짙은 어둠의 덩어리였다. 그 표면은 매끄러웠지만, 어떤 각도에서 보든 사방이 뾰족한 듯한 모순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육면체도, 구형도 아니었다. 기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꿈속에서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조형물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수백만 년은 족히 우주를 떠돌았을 법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흠집 하나 없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방금 만들어져 그곳에 놓인 것처럼.
“표면 온도는 절대 영도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아까 감지된 에너지 패턴이 여전히 방출되고 있어요.” 서연이 거의 최면에 걸린 듯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자체 동력원인지, 아니면 외부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민준의 손이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통신 장치로 향했다. “본부에 보고해야 한다. 이건…”
그때였다.
화면 속의 검은 물체에서 아주 미세한, 그러나 명확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표면의 가장 뾰족한 부분 중 하나에서, 마치 숨을 쉬듯 아주 희미한 푸른빛이 깜빡였다. 그리고 그 빛은 찰나의 순간, 물체의 복잡한 표면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혈관 속을 흐르는 피처럼.
“함장님, 비정상적인 전파 간섭이 감지됩니다!” 박지훈이 소리쳤다. “아스트라호의 모든 통신 채널이 막혔습니다! 외부 통신이 불가능해요!”
동시에, 함교의 희미했던 조명들이 갑자기 번쩍이더니, 일제히 꺼졌다.
전력 공급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비상등마저 깜빡이다가 완전히 소멸했다.
함교는 순식간에 완벽한 어둠 속에 잠겼다. 외부의 검은 물체보다도 더 깊은 어둠.
“젠장!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박지훈이 당황하며 콘솔을 두드렸다.
“진정해, 박 항해사! 비상 전력 가동! 수동으로라도 통신 채널을 확보해!” 민준이 침착하게 명령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도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어둠 속에서, 서연의 목소리만이 유독 또렷하게 울렸다. 그녀는 스크린이 사라진 방향, 즉 외계 유물이 존재하는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함장님… 들리세요? 뭔가… 들려요.”
“뭐가 들린다는 건가, 서 박사?”
“속삭임… 같아요. 아주 희미한… 하지만 명확한… 무언가… 부르는 소리.”
민준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오직 아스트라호의 죽은 침묵과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하지만 서연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귀에만 들리는 어떤 주파수가 그녀의 정신을 흔드는 것처럼.
갑자기, 아스트라호의 선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끼이이잉-! 하는 기계음과 함께 함교가 좌우로 기우뚱거렸다.
“함장님! 외부 방어막이 뚫렸습니다! 비상 에너지 유출! 선체 압력이 급격히 저하하고 있습니다!” 박지훈의 절규가 어둠 속에서 터져 나왔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권총에 손을 댔다.
어둠 속, 비상 전력으로 다시 점멸하기 시작한 메인 스크린에 외계 유물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검은 표면 전체가 푸른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내부에서 거대한 생명이 깨어나는 것처럼.
그리고 그 빛 사이로, 셀 수 없는 작은 선들이 복잡한 문양을 그리며 움직였다.
그 문양은… 낯설지 않았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듯한, 하지만 결코 기억할 수 없는.
가장 깊은 무의식의 저편에 아로새겨진, 태초의 기억과도 같은.
스크린 속의 빛나는 유물은 마치 거대한 눈동자처럼 아스트라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준은 느꼈다.
그것이…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이 무한한 어둠 속에서.
그것이 깨어났다.
그리고, 심연의 메아리가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