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은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등에는 온갖 잡초와 이름 모를 영초가 담긴 바구니가 축 늘어져 있었고, 발밑에는 이끼 낀 돌부리들이 시야를 가렸다. 명문 정파의 제자들처럼 비행 검을 타고 유유히 하늘을 가르는 대신, 그는 발로 직접 이 험준한 산맥을 헤쳐나가야 했다.
그의 혈맥은 턱없이 미약했고, 심지어 내공마저 다른 동문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언제쯤이면 제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차피 버려진 제자 취급인데, 굳이 이렇게 고생하며 약초를 캔다고 해서 나아질 것도 없으리라. 그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젠장, 망할 산.”
투덜거리며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발밑의 흙이 갑자기 푹 꺼졌다. 그는 비명 한 번 지를 새도 없이 허공으로 곤두박질쳤다. 바닥은 한참 아래에 있는 듯했다. 수십 길을 떨어졌을까, 몸이 바위에 부딪히는 끔찍한 고통과 함께 차가운 물속으로 처박혔다.
“커헉!”
차가운 물줄기가 온몸을 감쌌다. 간신히 수면 위로 떠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거대한 지하 동굴이었다. 천장에는 형광 이끼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빛 아래로 고요하고 신비로운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이진은 온몸을 덜덜 떨며 숨을 골랐다. 살았다. 죽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안도감도 잠시,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수 한가운데, 낡고 부서진 거대한 석탑의 잔해가 보였다. 오랜 세월 동안 물에 잠겨 있었는지, 반쯤 가라앉은 채로 고요히 서 있었다. 이진은 본능적으로 저곳에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은 기묘한 이끌림을 느꼈다.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 미지의 것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그를 사로잡았다.
몸을 이끌고 차가운 물을 헤치며 탑으로 향했다. 탑은 생각보다 훨씬 거대했다. 돌을 깎아 만든 듯한 문양들은 세월의 풍파에 마모되어 형태조차 알 수 없었다. 마치 살아있는 역사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희미한 영기의 파동이 느껴졌다. 일반적인 영기와는 달랐다. 너무나도 오래되어, 그 근원을 가늠할 수조차 없는 아득한 기운이었다.
탑의 가장 아래층, 물에 잠기지 않은 유일한 곳에는 작게 패인 공간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있었다. 이진은 실망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군. 이렇게 헛수고만 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순간, 손끝에 스치는 차가운 감각에 고개를 들었다. 벽면에 그려진, 희미하게 빛나는 문양. 손가락으로 문양을 따라 쓸어보니, 돌벽이 마치 살아있는 듯 은은한 빛을 발했다. 이진은 깜짝 놀라 손을 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희미한 영기가 벽면에 스며들고 있었다. 평소라면 쥐꼬리만 한 영기였겠지만, 이곳의 고대 기운과 만나면서 증폭되는 듯했다.
빛은 점차 강해지더니, 벽면 전체를 감쌌다. 문양들이 마치 물결처럼 일렁였다. 이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온몸의 혈맥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거대한 용의 숨결 같았다.
그리고 벽면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쉬이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돌들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단순한 빛만이 아니었다. 아득한 옛날, 모든 것을 창조하고 소멸시켰던 태초의 기운, 원초적인 힘이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웅장하게 밀려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영기나 내공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의 근원을 이루는 듯한 존재감이었다.
벽이 완전히 갈라지자,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진은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형언할 수 없는 존재가 그곳에 응축되어 있다는 것을. 마치 심연과도 같은 검은 공간, 그러나 그 안에서 우주의 모든 색이 동시에 발현되는 듯한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그의 미약한 영안으로는 감히 그 심오함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마주한 것이 평범한 보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 이건 대체…?”
이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내공은 평소보다 수십 배는 빠르게 회전했고, 혈맥은 마치 용이 꿈틀거리듯 격렬하게 춤추었다. 평생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전신을 관통하는 압도적인 힘. 그것은 두려움과 경외심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그 순간, 검은 공간 속에서 작은 빛의 구슬 하나가 솟아올라 이진에게로 다가왔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그의 주위를 맴돌다가, 이진의 이마에 닿았다.
‘콰아아앙!’
머릿속에서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쳤다. 잊힌 시간의 강물, 아득한 태고의 지식, 그리고 세계의 모든 비밀이 담긴 듯한 정보가 그의 의식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었다.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각성이었다. 수많은 상상할 수 없는 이미지와 개념들이 그의 정신을 꿰뚫었다. 태초의 세계, 무에서 유가 창조되던 순간, 우주의 질서가 정립되던 아득한 시간의 흐름…
“고대의… 힘…?” 이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혼란 속에서도, 그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자신이 발견한 것이 단순히 강력한 무공 비급이나 희귀한 영약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세계의 질서조차 뒤흔들 수 있는, 태초의 근원적인 힘이었다. 어째서 이런 힘이 이곳에 봉인되어 있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이 힘을 깨울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의 삶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점.
이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동굴 전체를 뒤흔들었다. 호수 표면이 격렬하게 일렁였고, 천장의 형광 이끼들이 잠시 빛을 잃었다가 더욱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 그러나 이진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정신은 지금, 태고의 지식과 합쳐져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고 있었다.
“…이 힘은, 나를 어디로 이끌 것인가.”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세상은 이전과 같았지만, 그를 보는 세상의 눈은 이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잊힌 고대의 힘이 그의 안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이 힘은, 분명 이진의 나약했던 운명을 영원히 바꿔놓을 터였다. 동시에, 이 잠에서 깨어난 힘이 어떤 존재들의 주의를 끌게 될지,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고요한 지하 동굴은 그렇게, 한 미약한 존재의 거대한 서막을 품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