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해는 이제 도시의 일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새로운 지형이 되었다. 무너진 고층 빌딩의 뼈대는 거대한 짐승의 늑골처럼 앙상하게 솟아 있었고, 그 사이를 흐르던 강물은 오염되어 끈적한 녹색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이곳은 더 이상 ‘명계’라 불리는 곳이 아니었다. 명계는 차라리 축복받은 안식처였다. 이곳은 그저 지옥이었다. 살아있는 자도, 죽은 자도 온전히 있을 수 없는.
강산은 낡은 방독면 안으로 깊은 숨을 들이켰다. 쇠와 먼지, 썩어가는 고기의 냄새가 필터를 통해 희미하게 걸러졌지만, 그 역겨움은 여전히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그의 눈은 방독면 유리 너머로 희뿌연 경계를 뚫고 전방을 응시했다. 무너진 지하철 입구 옆, 부서진 보도블록 사이로 억척스럽게 뿌리내린 잡초들이 무성했다. 껍데기들의 시야는 흐릿했지만, 소리와 움직임에는 민감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 속에서, 그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저기다, 산아.”
낮게 깔린 지혜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들려왔다. 그녀는 주택가 잔해 속, 부서진 창문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매처럼 날카로웠다. 강산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은 허물어진 담벼락 뒤편에 숨겨진 좁은 골목이었다. 그곳만이 서부 보급창으로 통하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위험한 길이었다. 대정 제국이 황급히 폐쇄하고 버려두었지만, 여전히 중요한 물품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혜는 추리했다. 물품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제국이 숨기고 싶어 하는 ‘진실’의 조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동한다. 육동, 엄호.” 강산은 짧게 명령했다.
육동은 그의 뒤편에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는 낡았지만 잘 정비된 소총이 들려 있었다. 강철처럼 단단한 몸집만큼이나 그는 굳건한 평민들의 버팀목이었다. 그의 눈은 주위를 끊임없이 살폈다. 껍데기들의 흐느끼는 소리는 멀리서 들려왔지만, 그 울림은 이 죽은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듯했다.
강산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운동화 밑창이 잔해 위의 유리 파편을 밟지 않도록,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을 건드리지 않도록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였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지뢰밭을 걷는 것 같았다. 언제 어디서 껍데기들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제국군의 순찰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목표로 삼은 보급창은 과거 제국의 서부 전선에 물자를 대던 핵심 기지였다. 역병이 창궐한 후, 제국은 수도 ‘황도’ 주변에 거대한 방벽을 세우고 그 안으로 몸을 숨겼다. 변방의 도시들은 버려졌다. 썩어가는 시체와 함께. 평민들은 제국의 방벽 밖에서 역병과 싸워야 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스스로 뭉쳤고, 이제는 제국이라는 거대한 적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작전은 그 첫걸음이었다.
좁은 골목에 들어서자,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탓에 습기와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다. 골목 끝에 낡은 철문이 보였다. 녹슬고 뒤틀린 문이었다. 제국이 서둘러 폐쇄했지만, 완벽하게 봉인하지는 못한 듯 틈새가 보였다.
“이봐, 저거 좀 봐.” 지혜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긴장이 서렸다.
강산은 지혜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철문 바로 옆, 부서진 벽돌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이 있었다. 낡은 천 조각. 하지만 그 천 조각의 색깔은 짙은 감색이었다. 대정 제국 친위대 군복에 사용되는 색이었다.
“친위대…?” 육동의 낮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여길 드나들었다는 건가?”
강산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국의 친위대는 황도 주변의 방어선 안에서만 움직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들이 이 버려진 도시에, 그것도 보급창에 드나들었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단순한 보급창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조심해. 안쪽에 함정이 있을 수도 있어.” 강산은 속삭였다.
그들은 철문 앞에 섰다. 육동이 낡은 쇠지레를 이용해 문틈을 벌리려 애썼다. 삐걱거리는 쇠붙이 소리가 고요한 골목에 날카롭게 울렸다. 그때였다.
“쉿!” 지혜가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멀리서 희미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껍데기의 흐느낌과는 다른, 기계적인 굉음.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순찰대다… 제국군 순찰대!” 육동이 다급하게 외쳤다.
강산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숨을 곳은 마땅치 않았다. 골목은 좁고, 잔해는 고르지 못했다. 이미 늦었다. 엔진 소리는 귀청을 찢을 듯 가까워졌다. 골목 입구에서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번쩍였다. 육중한 장갑차 한 대가 잔해를 밀어내며 나타났다. 장갑차 상단에는 기관총이 거치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친위대 병사 한 명이 서 있었다.
“젠장!” 강산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들은 완벽하게 노출되었다. 친위대 병사의 눈이 섬광처럼 그들을 향했다. 병사는 즉시 기관총을 강산 일행에게 겨눴다.
“꼼짝 마라! 손들어!” 스피커를 통해 기계적인 음성이 울려 퍼졌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강산은 육동과 지혜에게 눈짓을 보냈다. 동시에, 그의 시선은 철문 안쪽, 보급창의 어둠 속으로 향했다. 그때, 철문 안쪽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삐걱거리는 소리, 끌리는 소리… 그리고 희미한, 사람의 목소리.
“저 안에서… 뭔가 있어.” 지혜가 중얼거렸다.
친위대 병사는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렸다.
“항명하는 자는 즉결 처형한다!”
기관총의 포구가 불을 뿜으려는 찰나, 강산은 결단을 내렸다.
“육동! 문 열어! 지혜, 엄호!”
육동은 주저 없이 쇠지레를 이용해 철문을 부쉈다. 삐걱거리는 굉음과 함께 낡은 철문이 안쪽으로 스르륵 열렸다. 어둠 속에서 썩어가는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훅 끼쳐 나왔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장갑차에서 발사된 총알이 철문을 스치며 불꽃을 튀겼다. 강산은 망설일 틈도 없이 열린 문 안으로 몸을 던졌다. 육동과 지혜도 뒤를 따랐다. 그들이 몸을 숨기자마자, 장갑차의 기관총이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맹렬히 갈겼다.
안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강산은 손전등을 꺼내 비췄다. 낡은 창고 내부가 드러났다. 선반에는 먼지 쌓인 상자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강산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창고 바닥 중앙, 사방이 철망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공간이 있었다. 마치 동물을 가두는 우리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우리 안에는…
“세상에…” 지혜의 입에서 절규에 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우리 안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모두 남루한 옷차림의 평민들이었다. 굶주림과 공포에 질린 얼굴들. 그들의 팔목과 발목에는 무거운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이미 의식을 잃은 듯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었다. 그 병에는 섬뜩한 붉은색 글자로 ‘시험체’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 철망 우리의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 쓰러지듯 일어나 벽에 기댔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의 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은 광기로 가득 차 있었고, 피부는 녹색 반점으로 뒤덮여 있었다. 껍데기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괴물들…” 강산은 이를 악물었다. “제국 이 개자식들이… 평민들을 껍데기로 만들고 있었어!”
그의 분노는 뜨거웠지만, 냉철한 이성이 경고했다. 이들은 단순한 보급창을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제국의 가장 추악하고 잔인한 비밀을 마주한 것이었다.
그때, 등 뒤의 철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창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친위대 병사들이 총을 겨눈 채 진입하고 있었다.
“찾았다! 감히 제국의 비밀을 엿보려 하다니!”
강산은 허리춤의 단검을 움켜쥐었다. 이제 도망칠 곳은 없었다. 어둠 속에 갇힌 평민들의 절규와 함께, 그의 눈빛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제국을… 부숴버려야 해.” 그의 입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맹세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우리 안의 평민들을 희생시키며, 광기로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또 다른 껍데기가 되어가는 사람을 향했다. 그들의 눈은 강산에게 묻고 있었다.
우리는 이 지옥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나요?
강산은 알고 있었다. 제국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누구도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바깥에서는 총성이 찢어지는 듯 울렸고, 창고 안에서는 껍데기로 변해가는 인간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울려 퍼졌다.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진정한 전쟁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