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벽 너머의 삐걱임
밤의 장막이 서울의 고층 아파트들을 검게 덮을 때, 스물아홉 살 민준은 익숙한 피로와 함께 현관문을 열었다. 낡았지만 나름 깔끔하게 정돈된 그의 원룸은 언제나처럼 차가운 침묵으로 그를 맞았다. 켜켜이 쌓인 먼지가 희미하게 반짝이는 현관 거울 속에서, 푸석한 얼굴과 그림자 드리운 눈을 한 남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민준은 대충 신발을 벗어 던지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퇴근 후의 일상은 늘 이랬다. 샤워, 저녁, 그리고 무의미한 인터넷 서핑으로 이어지는 고독한 밤.
거실 불을 켜자, 텅 빈 공간에 주황색 온기가 퍼졌다. 문득, 거실 한편에 놓인 작은 액자가 기울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일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슬렸다.
“젠장, 청소라도 해야 하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액자를 바로 세웠다. 피곤해서 그런가. 요즘 들어 모든 것이 귀찮고, 모든 사소한 일들이 크게 다가왔다.
따뜻한 물줄기가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는 동안에도, 그의 신경은 내내 곤두서 있었다. 분명히 잠근 화장실 문이 바람에 삐걱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물이 튀는 소리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마치 누군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피곤해서 환청이 들리나.’
민준은 애써 떨쳐내려 했지만, 왠지 모르게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화장실 문을 활짝 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문은 제대로 잠겨 있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나오려는데, 문득 욕실 거울 속 자신의 뒤편으로 희미한 그림자가 스치는 것을 보았다. 너무 빠르게 지나쳐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밤늦게 시켜 먹은 배달 음식은 평소와 달리 입맛에 맞지 않았다. 식탁에 앉아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건성으로 숟가락을 놀리는데, 갑자기 부엌 싱크대에서 ‘딸그락’ 하는 소리가 났다. 민준은 고개를 들었다. 싱크대 위, 컵을 보관하는 건조대에 놓인 유리컵 하나가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뭐야?”
누가 만진 것도 아닌데. 진동의 흔적은 없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소음도 아니었다. 그저 유리컵이 혼자서, 아주 살짝 흔들렸을 뿐이었다.
민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로 다가갔다. 컵을 집어 들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했다.
“젠장, 스트레스가 너무 심한가.”
그는 자신을 합리화했다. 윗집에서 발망치를 찧었거나, 건물 자체가 오래되어 진동이 울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시선이 느껴졌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침대에 누워 휴대폰으로 웹툰을 보던 민준은, 점차 집중력을 잃었다.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보일러는 분명히 틀어놓았는데, 이불 밖으로 드러난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때였다.
‘똑… 똑… 똑…’
벽장 속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 민준은 숨을 죽였다. 마치 손톱으로 나무를 긁는 듯한, 작지만 명확한 소리였다. 처음엔 마우스 클릭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곧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리는 벽장 안에서, 그의 침대 바로 옆 벽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누구야?”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몸이 굳었다. 텅 빈 방에 그 질문만이 맴돌았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빠르고 강하게, ‘따다닥, 따다다닥’ 하고 벽장을 두드리는 소리로 변해갔다.
민준은 벌떡 일어났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벽장을 비췄다. 낡은 나무 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하지만 소리는 분명히 그 안에서 들렸다. 마치 벽장 속에 누군가 갇혀서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는 듯한 소리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성은 이건 말이 안 된다고 외쳤지만, 몸은 이미 공포에 젖어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벽장 문고리를 잡으려 했다. 그때, 벽장 문이 안쪽에서부터 ‘쿵!’ 하고 거칠게 울렸다. 마치 거대한 주먹으로 내리친 것처럼.
민준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휴대폰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화면은 깨졌고, 플래시 불빛은 꺼졌다. 순식간에 방은 암흑에 잠겼다.
어둠 속에서, 벽장 문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삐걱이는 소리가 그의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틈새로 보이는 것은 오직 어둠뿐이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차갑고 축축한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것을 민준은 온몸으로 느꼈다.
그의 등 뒤로, 방문이 ‘딸깍’ 하고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사지를 옥죄는 공포 속에서, 그는 간절히 빌었다. 제발, 제발 아무것도 아니기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어둠 속, 벽장 문 뒤편에서, 무언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민준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를 향해 손을 뻗는 것 같았다.
벽장 안쪽에서, 섬뜩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고, 긁히는 듯한, 찢어지는 듯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끔찍한 고통 속에서, 벽을 긁으며 민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 민… 준…”
그것은 분명, 민준의 이름이었다. 굵고 탁한,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공포에 질린 민준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그의 아파트는, 더 이상 안전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이곳은, 이제 그의 가장 깊은 악몽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악몽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