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재가 되어버린 하늘 아래, 잿빛 먼지가 춤추는 황무지에서 지아는 오늘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녹슨 철골과 깨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이빨처럼 박힌 도시의 잔해는 언제나 날카로운 침묵 속에 도사린 위험을 뿜어냈다. 지아의 손에는 낡고 무거운 강철 몽둥이가 쥐여 있었다. 허리춤에는 다 쓴 탄피를 잘라 만든 칼집에 녹슨 단검이 꽂혀 있었다. 그녀는 ‘잿빛 보루’의 가장 뛰어난 수색꾼 중 한 명이었다.

그날도 지아는 홀로 폐허 속을 헤매고 있었다. 굶주림은 늘 끈질긴 그림자처럼 그녀를 따라다녔고, 희미한 빛이 스며드는 지하 주차장 입구를 발견했을 때, 그녀의 심장은 미약하게나마 희망으로 뛰었다. 어쩌면 오래된 통조림이나, 쓸 만한 부품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축축하고 역겨운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소리가 울림 없이 사라지는 어둠 속으로 지아가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빛 한 점 없는 지하 깊숙한 곳에서, 갑자기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소리가 들렸다. 낮고 끈적이며, 동시에 날카로운 기계음 같은 울림. 지아가 자세를 낮추는 순간,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 세 개가 튀어나왔다.

“젠장, 어둠 사냥꾼!”

그것들은 재앙 이후 생겨난 변이체였다. 검은 비늘로 뒤덮인 맹수 같은 형체에, 뼈처럼 앙상한 사지가 뻗어 나와 있었다. 핏발 선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섬뜩하게 빛났다. 지아는 망설임 없이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놈들은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녀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뜨거운 피가 울컥 솟았다.

한 마리가 목덜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지아가 피할 새도 없이 무기력하게 주저앉는 순간, 마치 어둠 자체가 움직이는 듯한 검은 그림자가 번개처럼 그들 사이를 갈랐다.

*쉬이이익-*

어둠 사냥꾼의 등 뒤에서 튀어나온 것은, 지아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였다. 인간과 흡사한 형체였지만, 키는 훨씬 크고 팔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피부는 새벽하늘처럼 깊은 검푸른색이었고,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섬뜩하면서도 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의 손가락은 길고 날카로운 검은 발톱으로 끝나 있었다. 등 뒤에는 마치 날개처럼 보이는, 검은 그림자 같은 막이 접혀 있었다.

놈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였다. 그림자처럼 유연하게 어둠 사냥꾼의 공격을 피하고, 뼈처럼 단단한 팔뚝으로 놈들의 몸을 후려쳤다. 쿵,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어둠 사냥꾼들이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놈은 순식간에 두 마리를 제압하고 마지막 한 마리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짧고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어둠 사냥꾼은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정적이 흘렀다.

지아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고통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녀의 눈은 오직 그 미지의 존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금빛 눈동자가 천천히 자신을 향했다.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마치 깊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시선.

“너… 너는… 뭐야?” 지아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떨렸다.

그 존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아를 응시할 뿐이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놈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낮은, 숲속의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혹은 오래된 돌이 부서지는 소리 같기도 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이.”

그것은 짧고 단순한 음절이었지만, 지아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카이.

지아는 어깨 부상으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카이는 아무 말 없이 지아에게 다가왔다. 지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지만, 갈 곳이 없었다. 카이는 지아의 어깨 상처에 시선을 고정하더니,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폐허 바닥에 돋아난 이름 모를 이끼를 조심스럽게 뜯어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으깨어 지아의 상처에 발랐다. 차갑고도 기이한 느낌. 하지만 놀랍게도 출혈이 멎고 통증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날 밤, 지아는 카이가 마련해 준 동굴 속에서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카이는 지아에게 열매 몇 개를 건넸다. 어둡고 푸른색의 열매는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맛이 났다. 지아는 카이를 경계하면서도, 그의 손길에서 적의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깊은 호기심과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몇 주가 흘렀다. 지아는 어깨 부상이 완치될 때까지 카이와 함께 지냈다. 잿빛 보루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카이는 지하 폐허의 복잡한 길을 마치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사냥하고,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았다. 그의 금빛 눈은 밤에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지아는 카이에게 인간의 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카이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단어를 습득했다.

“불.” 지아가 작게 피워놓은 모닥불을 가리켰다.
“불.” 카이가 어눌하게 따라 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독특했지만, 전보다 훨씬 또렷했다.
“물.”
“물.”

그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이해하는 듯했다. 지아가 웃으면 그도 희미하게 웃음 지었고, 지아가 슬퍼하면 그의 금빛 눈동자에도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지아가 ‘인간’이라는 종족의 일원으로서 짊어진 고독과 불안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듯했다.

지아 또한 카이에게 이끌렸다. 보루의 사람들은 ‘그림자 일족’이라 불리는 카이의 종족을 두려워하고 혐오했다. 그들은 인간을 잡아먹고, 인간의 터전을 파괴하는 악마와도 같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아가 본 카이는 달랐다. 그는 조용하고, 사려 깊었으며, 묘하게 보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느 날, 카이가 작은 조약돌을 손에 쥐고 지아에게 내밀었다. 조약돌은 표면이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었고, 빛을 받으면 무지개색으로 반짝였다.

“예쁘지?” 지아가 조약돌을 받아들며 말했다.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뻐.”
“이거… 나 주는 거야?”
카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지아를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 속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그 깊은 눈빛은 인간의 것보다 더 순수하고 솔직한 감정을 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 순간, 지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카이에게 빠져버렸다는 것을. 종족을 뛰어넘어, 두려움을 넘어선 감정이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잿빛 보루에서 지아를 찾아 나선 수색대원들이 폐허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카이의 서식처 근처까지 다가왔다.

“지아! 지아! 대답해!” 동료들의 목소리가 폐허에 울려 퍼졌다.

카이의 금빛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지아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 안에 담긴 온기는 뜨거웠다.

“가야 해.” 카이가 겨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묻어 있었다.
“아니, 나 너 혼자 못 둬.”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널 찾으면… 죽이려고 할 거야.”

그때였다. “저기다! 저기 그림자 일족이 있어!”

수색대원들의 외침이 들렸다. 총성이 울렸다. 그들은 카이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했다. 카이는 지아를 자신의 뒤로 밀쳐내고, 벽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이미 몇 발의 총알이 그의 팔과 다리에 박힌 후였다. 푸른 피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카이!” 지아가 절규했다.

카이는 지아의 손을 잡고 폐허의 더 깊은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은 평소보다 훨씬 느렸다. 피를 흘리며 헉헉거리는 카이를 보며, 지아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녀 때문에 카이가 위험에 처한 것이다.

결국 그들은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수색대원들이 그들을 포위했다. 보루의 대장인 철우가 앞장서서 그들을 노려봤다.

“지아! 대체 저 괴물과 함께 뭘 하는 거냐! 제정신이냐!” 철우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배신감이 서려 있었다. “어서 이리 와! 저놈은 괴물이야!”

지아는 카이의 앞에 섰다. 그녀의 낡은 몽둥이가 땅에 지지대처럼 박혔다.

“아니.” 지아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그는 괴물이 아니야. 그는… 카이야. 나를 구해줬어.”

철우가 코웃음 쳤다. “괴물에게 홀린 게 분명해! 어서 비켜, 지아! 저 괴물을 처리해야 한다!”

총구가 카이를 향했다. 카이는 지아의 뒤에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깊고 슬펐다.

“지아… 살아.” 카이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순간, 지아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이 있었다. 잿빛 보루의 차가운 규칙,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 그리고 폐허 속에서 만난 카이의 따뜻한 손길. 그 어느 쪽도 놓칠 수 없었다.

지아는 주저 없이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동료들을 향해 외쳤다.

“아무도… 아무도 카이에게 손대지 마!”

철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지아를 바라봤다. “지아… 너 미쳤군!”

지아는 카이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놓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카이에게 말했다.

“우리… 우리만의 길을 찾자. 이 폐허 속에서… 우리 둘이 함께 살 수 있는 곳을.”

카이의 금빛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났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지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들의 시선은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이 무너지고, 모든 규범이 사라진 폐허 속에서, 두 개의 다른 종족이 서로에게서 유일한 안식처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수색대원들의 당황한 총성이 다시 울렸다. 지아는 카이와 함께, 총알이 빗발치는 폐허의 심연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들의 미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서로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둠이 모든 것을 삼키려 할 때, 두 개의 다른 심장이 함께 뛰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금지된 사랑으로 빚어진, 그러나 가장 순수한 형태의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