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등성이를 가로지르는 바람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부서진 유리 파편과 긁힌 금속이 뒹구는 폐허 속에서, 달빛마저 희미하게 숨을 죽인 듯했다. 채유리는 그 모든 파괴의 중심에,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밤하늘처럼 차가웠고, 검게 물든 마법복은 어둠 속에서도 섬뜩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 웅크린 그림자 아래에서 강하은이 불안하게 몸을 떨었다. 한때는 반짝이는 별빛처럼 빛나던 ‘새벽의 인도자’였다. 지금은, 폐기된 인형처럼 바닥에 나뒹굴 뿐이었다. 마법의 힘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고, 피로 얼룩진 얼굴엔 공포만이 가득했다.
“겨우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구나, 하은아.”
유리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서늘했다. 마치 몇 년 동안 켜켜이 쌓인 증오가 응축되어 흘러나오는 듯했다. 하은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지만,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유, 유리… 네가 어떻게… 살아있을 리가…”
하은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유리를 올려다보는 눈빛에는 죄책감 대신 경악과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내가 왜 살아있으면 안 되는 건데? 네가 죽이려고 했으니까?” 유리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섬뜩하게 올라갔다. “그날, 나를 버리고 도망쳤던 그때처럼 말이야?”
그 말에 하은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아, 아니… 그건 오해야…! 난 그저…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고?” 유리는 한 발짝, 또 한 발짝 하은에게 다가섰다. 그녀의 발걸음마다 파편이 ‘바스스’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그 소리는 하은의 심장을 후벼 파는 비수와도 같았다. “네가 희망이라고 외치며 그들을 속여 넘길 때마다, 나는 너의 그 위선적인 미소를 수도 없이 되새겼어. 네가 지키려던 게 고작 너 자신뿐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너를 원망했어. 네가 왜 그랬는지 알고 싶었어.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유리의 손끝에서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불길한 빛이 피어올랐다. 과거의 ‘별빛 수호자’의 힘과는 확연히 달랐다. 생명을 지키던 빛이 아닌,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파괴의 불꽃이었다.
하은은 뒤로 기어가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제발! 유리! 우린 친구였잖아! 기억나지 않아? 같이 별을 보며 꿈을 꾸던 날들…!”
“친구?” 유리는 그 단어를 읊조리며 실소를 터뜨렸다. “너는 친구라는 단어의 의미를 더럽혔어. 네가 배신하던 순간, 그 모든 기억은 재가 되어 사라졌어. 이제 내게 남은 건, 너를 똑같이 절망의 끝으로 몰아넣고 싶다는 순수한 열망뿐이야.”
하은은 절규했다. “아니! 나는… 나는 그저 모두를 구하고 싶었을 뿐이야!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궤변은 집어치워.” 유리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빛의 파동이 하은의 얼굴을 강타했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하은의 몸이 벽에 세게 부딪혔다. 입가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크억…!”
하은은 온몸의 뼈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유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하은의 앞에 멈춰 서서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래, 넌 늘 ‘더 큰 선’을 운운하며 네 죄를 정당화했지. 하지만 네가 만들어낸 지옥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밤을 울부짖었는지, 너는 상상조차 못 할 거야.”
유리의 검게 물든 마법 지팡이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지팡이 끝에서 응축된 어둠의 기운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폐허를 감싸던 희미한 달빛조차 그 기운에 눌려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괜찮아. 내가 그 고통을 너에게 돌려줄 테니까.”
하은의 눈에 공포가 극에 달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 애썼지만, 이미 다리가 풀려 움직일 수 없었다. 유리의 얼굴에는 과거의 연약함이나 슬픔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차갑고 무자비한 복수의 의지만이 가득했다.
“잠깐! 유리! 내가… 내가 말해줄 게 있어! 그날의 진실을 전부 말해줄게! 제발…!”
하은의 절규에도 유리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지팡이를 내리찍을 준비를 했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 수년간 쌓인 한이 서려 있었다.
“진실?” 유리가 냉소적으로 되물었다. “네가 감히 내게 진실을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아니, 하은아. 이제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뿐이야.”
어둠의 마력이 지팡이 끝에 집중되어 거대한 구체를 형성했다. 주변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검은 구체는 하은의 눈동자에 섬뜩하게 비쳤다.
하은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비명을 질렀다. “아니! 안 돼! 유리!”
유리는 그 비명을 들었지만, 듣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게 바로, 네가 만든 세상이야. 새벽의 인도자.”
유리의 지팡이가 맹렬한 기세로 바닥을 향해 내리찍혔다.
‘콰아아아앙!!!’
어둠의 구체가 하은을 향해 맹렬하게 쇄도했다. 폐허 전체가 진동하며, 거대한 폭발음이 밤하늘을 갈랐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파괴의 소리 속에서, 유리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러나 유리의 눈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 듯 허공을 응시했다. 무너진 잔해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무언가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먼지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하은의 목에 걸려 있던 펜던트였다. 한때는 둘이 함께 맞췄던, 별 모양의 펜던트.
유리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하은아.” 그녀의 목소리는 파괴된 폐허 속에서도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이건 고작 시작일 뿐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