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유랑자의 노래
차가웠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스며드는 냉기가 뼈마디를 긁었다. 해가 떠올랐는지, 아니면 그저 구름이 옅어져 하늘이 잠시 잿빛 농도를 달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세상은 항상 그랬다. 희뿌연 먼지와 재가 끊임없이 내려앉는 칙칙한 풍경. 강하준은 익숙하게 망토 깃을 더 바싹 여몄다.
그의 시선은 한없이 메마른 땅을 훑었다. 갈라지고 뒤틀린 대지 위로 앙상한 잔해들이 비석처럼 박혀 있었다. 한때 거대한 도시의 심장이었을 육중한 철골 구조물들은 이제 녹슬고 주저앉아, 거대한 괴물의 뼈대 같았다. 그 아래를 지나는 그의 발걸음은 흙먼지를 일으키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이 재에 덮여 축축한 잿가루만이 사박이는 소리를 낼 뿐이었다.
“젠장, 오늘도 빈손인가.”
갈라진 입술 새로 굳은 독백이 터져 나왔다. 어제 간신히 찾아낸 마른 열매 몇 알이 전부였다. 뱃속에서는 이따금 경고성 울림이 터져 나왔고, 목은 사막처럼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었다. 금은 보석 따위는 썩어 문드러질 뿐, 생명을 이어갈 수 없었다.
하준은 나지막이 읊조리며 폐허 더미 사이로 더 깊이 들어섰다. 오래전, ‘대붕괴’라 불리는 재앙이 세상을 집어삼켰을 때, 모든 것이 무너졌다. 찬란했던 문명은 한낱 먼지로 변했고, 땅은 독기로 오염되었으며, 짐승들은 흉측한 돌연변이로 뒤틀렸다. 살아남은 이들은 극소수였고, 그들조차 살아남기 위해 매일 지옥 같은 삶을 견뎌야 했다.
그의 목적지는 멀리 보이는 거대한 그림자였다. 한때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을 초고층 건물의 잔해. ‘강철의 심장’이라 불렸던 그곳은 이제 거대한 죽음의 탑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소문은 돌았다. 간혹 그 안에서, 대붕괴 이전의 온전한 물품들이 발견되기도 한다는 소문. 물론, 그 소문을 쫓아 들어간 이들 중 살아 돌아온 자는 거의 없었다.
하준은 허리춤에 찬 낡은 사냥칼을 만져보았다. 손때 묻은 칼자루는 그의 유일한 벗이자 생명줄이었다. 칼날은 날카롭게 갈려 있었지만, 과연 저 안에서 마주칠지 모를 ‘그림자 추적자’나 ‘철피(鐵皮) 늑대’에게 얼마나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이곳의 짐승들은 강철 같은 가죽과 맹독을 품고 있었다.
그는 폐허의 그림자를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찢어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위태롭게 솟아 있었고, 그 사이로 칼바람이 휘몰아쳤다. 바람은 찢겨진 천 조각들을 흔들고, 녹슨 금속들이 서로 부딪히며 기분 나쁜 마찰음을 냈다. 마치 이 폐허 자체가 살아 숨 쉬는 괴물처럼 느껴졌다.
문득, 하준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공기 중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했다. 재 섞인 바람에 실려 오는 희미한 냄새. 흙먼지와 금속이 뒤섞인 듯한 역한 비린내. 그것은 돌연변이 짐승의 냄새였다. 그는 즉시 몸을 낮춰 으스러진 벽 뒤로 숨었다.
심장이 쿵, 쿵, 하고 크게 울렸다. 손에 땀이 배어 칼자루가 미끄러울 지경이었다. 경험상, 이 냄새는 ‘철피 늑대’의 것과 비슷했다. 강철 같은 피부와 짐승보다 영리한 잔인함을 가진 포식자. 한 마리만으로도 능숙한 사냥꾼 여럿을 제압할 수 있는 무서운 존재였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하준은 숨을 죽였다. 낡은 철골 구조물 위로, 그림자 같은 형체가 어른거렸다. 육중한 몸집, 비정상적으로 길고 단단해 보이는 사지, 그리고 뼈처럼 앙상하게 드러난 척추를 따라 돋아난 거대한 칼날 같은 뿔. 틀림없는 철피 늑대였다. 놈은 잿빛 세상에 완벽하게 녹아든 색깔로, 거친 숨을 내쉬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놈은 서서히 이동하며, 하준이 숨어있는 벽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대로 들키면 끝이었다. 정면으로 맞서 싸운다고 해도 승산은 희박했다. 철피 늑대의 눈은 잿빛 폐허 속에서도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놈의 거친 숨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하준은 칼자루를 꽉 쥐었다. 만약 들킨다면, 마지막까지 발버둥 쳐야 했다. 그의 눈은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불안정한 구조물, 떨어져 나간 콘크리트 덩어리들.
바로 그때, 늑대가 멈춰 섰다. 놈은 코를 킁킁거리며 허공을 맡았다. 하준의 굳어버린 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놈의 예리한 시선이 그가 숨어있는 벽을 향했다.
“크르릉…”
낮은 으르렁거림이 울렸다. 놈은 한순간 주춤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하준은 숨을 멈추고 놈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놈이 사라진 후에도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놈이 자신을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다. 놈은 다른 무언가를 감지하고 그쪽으로 향한 것이 분명했다.
안도의 한숨이 길게 터져 나왔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하준은 벽에 기대어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목숨을 건 줄타기. 이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린 하준은 폐허의 심장, ‘강철의 심장’이라 불리는 거대한 탑의 잔해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철피 늑대가 다른 곳으로 향한 것이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놈이 사라진 방향과는 반대쪽으로 돌아서, 그는 무너진 건물 사이의 좁은 틈새를 통해 탑의 가장자리로 접근했다.
내부는 예상대로 어둠과 먼지로 가득했다. 찢어진 철골들이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부서진 환기구에서는 바람 소리가 텅 빈 공간을 울렸다. 하준은 오래된 철제 선반들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이미 대부분의 물건은 약탈당했거나, 오랜 세월 속에 부식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한참을 헤매던 그의 시선이 구석에 쌓인 파이프 더미에 멈췄다. 녹슨 파이프들 사이에, 먼지에 덮여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상자가 있었다. 그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희망은 언제나 이토록 작고 보잘것없는 형태로 찾아왔다.
하준은 조심스럽게 파이프를 치우고 상자를 꺼냈다. 낡은 금속 상자 위에는 오랜 문양이 새겨져 있었지만, 이미 퇴색되어 알아볼 수 없었다. 뚜껑을 열자, 희미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곰팡이 냄새 사이로 느껴지는 미약한 단내.
안에는 오래된 영양 바 몇 개와, 작고 단단하게 밀봉된 물통 하나가 들어 있었다. 영양 바는 비록 겉포장이 바랬지만, 내용물은 단단하게 보존되어 있는 듯했다. 물통은 차가웠다. 마치 대붕괴 이전의 시절을 간직한 듯한 시원한 감촉이었다.
하준은 영양 바 하나를 집어 들었다. 포장을 뜯자, 흙과 재가 뒤섞인 세상에서는 보기 힘든, 희미한 초록색 내용물이 드러났다.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 물었다. 퍽퍽했지만, 생명 유지에 필요한 영양소가 응축된 맛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소중한 물통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쿨럭.
작은 병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텅 빈 폐허에 울렸다. 그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차갑고 깨끗한 물이 메마른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살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비참함이 잊히는 듯했다.
배가 채워지고 목마름이 가시자, 주변의 위협들이 다시금 선명해졌다. 이곳은 위험한 곳이었다. 더 이상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는 남은 영양 바와 물통을 다시 상자에 넣고, 조심스럽게 챙겼다.
폐허 밖으로 다시 나섰을 때, 잿빛 하늘은 더욱 깊어진 어둠을 드리우고 있었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세상의 밤은 낮보다 훨씬 위험했다. 그림자 속에서 꿈틀거리는 더 많은 괴물들, 예측 불가능한 기후 변화. 그는 멀리 보이는 또 다른 폐허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최소한의 잠자리라도 찾아야 했다.
하준은 터덜터덜 걸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거대한 탑을 돌아보았다. 오늘도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리고 내일도, 또 그다음 날도, 그는 이 끝없는 잿빛 유랑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지평선 너머 어딘가에, 아직 푸른 풀이 돋아나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안식처’가 존재한다는 희미한 희망을 품고서.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은 거대한 폐허 속에서 한 점 먼지에 불과했지만, 그의 눈빛은 쉬이 꺼지지 않는 작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어떻게든. 그것이 이 잿빛 세상에서 그가 가진 유일한 사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