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아치형 문과 무미건조한 안내판이 즐비한 아르카나의 수도, 에테르나의 거리는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강준혁은 언제나 그 북적임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퀘스트 마커를 따라 움직이는 이들과, 길드 채팅창에 오가는 농담들, 새로운 레이드 공략법에 대한 열띤 토론들. 그는 그런 것들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 지도의 빈칸이었다.
오늘도 그는 에테르나 서쪽, 푸른 안개 숲 깊숙한 곳을 헤매고 있었다. 고작 레벨 30대 몬스터들이 어슬렁거리는 저레벨 사냥터. 최고 레벨 유저들이 우글거리는 최전방 던전이나 새로 추가된 하늘섬 같은 곳과는 비교도 안 되는 한적한 곳이었다. 파티를 맺자는 귓속말도, 길드 가입 권유 메시지도 날아오지 않았다. 완벽한 고독. 준혁은 이 고독을 사랑했다.
“젠장, 여기도 아무것도 없네.”
낮게 중얼거리며 덩굴에 뒤덮인 오래된 석상을 밀어냈다. 이 숲에는 전설이 있었다. 세상의 시작부터 존재했던 고대 문명의 유적이 잠들어 있다는. 대부분의 유저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저 초보자들을 위한 흔한 배경 스토리 정도로 치부했다. 하지만 준혁은 달랐다. 게임 시스템이 버젓이 ‘발견되지 않은 지역’이라는 문구를 띄우지 않는 이상, 그 어떤 낡은 전설이라도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햇빛이 듬성듬성 스며드는 숲길을 따라 걷다 보니, 유난히 짙은 초록빛을 띠는 담쟁이덩굴이 뒤덮인 절벽이 나타났다. 그 절벽 아래에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작은 계곡이 있었고, 이름 모를 물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평화롭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원한 물가에 쪼그려 앉아 손을 담갔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이 현실보다 더 생생했다.
문득, 계곡 건너편 절벽에 시선이 닿았다. 울창한 덩굴과 이끼에 가려져 희미하게 보이는 균열. 그저 흔한 암벽 틈새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준혁의 본능이 속삭였다. ‘저긴 뭔가 달라.’
그는 망설임 없이 계곡을 가로질러 갔다. 물은 무릎께까지 차올랐지만, 차갑고 신선했다. 거친 암벽을 손으로 짚고 덩굴을 헤치고 나아가자, 균열의 모습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인위적으로 깎인 듯한 돌의 단면. 희미하게 새겨진 문양. 오래된 돌문이었다. 절벽과 하나가 된 듯한 교묘한 위장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런 곳에… 진짜가 있을 줄이야.”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손으로 밀어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변을 살폈다. 덩굴을 걷어내자, 돌문 양옆으로 희미한 홈이 보였다. 마치 어떤 물건을 끼워 넣는 자리처럼.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덩굴과 이끼만 무성할 뿐. 준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돌문 전체를 훑었다. 그의 시선이 문 위쪽에 닿았다.
거기에는 손바닥만 한 돌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다른 부분과는 다르게 매끈하게 마모된 표면. 그 돌기에는 희미한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고대의 시험. 지혜를 증명하라.]
“지혜의 증명이라…”
준혁은 나직하게 읊조렸다. 흔한 퍼즐 문구였다. 하지만 이 잊혀진 장소에서 발견된 것이기에 의미가 달랐다. 그는 주변의 나무들을 살펴보았다. 어떤 나무는 뿌리가 기형적으로 돌을 감싸고 있었고, 어떤 나무는 잎사귀가 기묘한 색을 띠었다. 그러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계곡 아래, 물속에 잠겨 있는 둥근 돌.
물속에서 건져낸 돌은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였다. 매끈하게 닳아 있었고, 표면에는 육각형의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돌문의 홈과 크기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듯했다. 그는 돌을 들고 다시 문으로 향했다. 오른쪽 홈에 돌을 끼워 넣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돌이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두 개가 필요한 건가?”
왼쪽 홈도 비어 있었다. 분명 어딘가에 또 다른 돌이 있을 터였다. 준혁은 다시 주변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의 시선은 다시 절벽 위쪽으로 향했다. 덩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곳, 마치 누군가 던져 넣은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또 하나의 둥근 돌.
돌을 주워 들기 위해 절벽을 기어 올라갔다. 흙과 이끼가 미끄러웠지만,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디뎠다. 마침내 손이 닿는 곳까지 올라가 돌을 낚아챘다. 내려오면서 몇 번 미끄러질 뻔했지만, 다행히 균형을 잃지 않았다.
두 번째 돌 역시 첫 번째 돌과 같은 육각형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왼쪽 홈에 돌을 끼워 넣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쉬이이익-‘
돌문 사이에서 미세한 틈이 생기더니, 묵직한 마찰음과 함께 문이 안쪽으로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수백 년간 닫혀 있던 문이 마침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랐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차갑고 눅눅한 기운이 밀려왔다.
준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앞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게임 내에서 어떤 정보도, 어떤 퀘스트도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공간. 잊혀진 고대 문명의 유적.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 순간을 위해 그는 아르카나를 플레이했다.
한 걸음.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주머니에서 간이 손전등 아이템을 꺼내 빛을 비추자, 그의 시야에 낡은 석벽과 천장에 그려진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양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벽면을 따라 빽빽하게 새겨진 그림들은 사람의 형상 같기도 했고, 짐승 같기도 했다. 그들의 눈은 모두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더 깊은 곳.
통로의 끝.
저 안에는 과연 무엇이 잠들어 있을까.
준혁은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사로잡혀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둠이 그를 삼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