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스 코프의 거대한 그림자가 도시의 황혼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낡은 금속과 부식된 콘크리트가 뒤섞인 아랫도시의 미로 같은 통로를, 강은혁은 그림자처럼 미끄러져 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소리 하나 없이 정확했고, 움직임은 매끄러웠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기계적 완벽함을 띠고 있었다. 왼쪽 팔뚝과 허벅지에 이식된 강화합금 의체들이 낮은 전음(電音)을 내며 그의 움직임에 맞춰 미세하게 진동했다.
“겨우 여기까지인가, 서지혁.”
그의 뇌리에 맴도는 이름은 얼어붙은 칼날처럼 차가웠다. 은혁의 시야 필터가 어둠 속을 꿰뚫고 건물 내부의 열 신호를 분석했다. 47층. 그가 찾는 데이터 코어가 있는 곳이었다. 제니스 코프의 최첨단 보안 시스템은 아랫도시의 스캐빈저들에겐 불침번과 같았지만, 은혁에게는 그저 조금 더 복잡한 퍼즐에 불과했다.
세 개의 레이저 센서가 교차하는 복도를 지났다. 팔뚝의 나노 블레이드가 쉬익 소리를 내며 벽면에 달라붙었다. 그는 거미처럼 벽을 타고 올라가 좁은 환풍구를 열었다. 먼지 냄새와 함께 묵직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과거, 지혁과 함께 밤새워 개발했던 ‘프로젝트 오르페우스’의 잔해가 이곳에 남아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 잔해는 지혁의 배신에 대한 증거가 될 터였다.
* * *
“우린 세상을 바꿀 거야, 은혁아. 이 낡은 시스템을 부수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 거야.”
어깨동무를 하며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굳건한 약속처럼 들렸다. 그의 눈빛은 열정으로 이글거렸고, 두 사람은 서로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지혁은 계획을 세웠고, 은혁은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들의 천재성은 시너지를 일으켰고, ‘오르페우스’는 단순한 코딩을 넘어선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생명체는 태어나자마자 뒤틀린 괴물이 되었다.
어느 날, 지혁은 싸늘한 표정으로 은혁의 연구실에 나타났다. 뒤에는 제니스 코프의 용병들이 서 있었다.
“미안하다, 은혁아.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지혁의 손에 들린 신경교란기가 섬광을 터뜨렸다. 은혁의 시야가 흐려지고 몸이 무너졌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이 수년간 공들여 만든 ‘오르페우스’ 코어 데이터가 지혁의 손으로 넘어가는 화면이었다. 그리고 지혁의 입가에 드리운 비릿한 미소. 그는 배신했고, 은혁의 모든 것을 짓밟았다.
* * *
환풍구를 빠져나와 47층의 서버룸 안으로 착지했다. 육중한 서버 랙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낮은 윙윙거리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은혁은 망설임 없이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의 강화된 눈은 숨겨진 인터페이스 포트를 정확히 찾아냈다. 팔뚝의 데이터 케이블이 튀어나와 포트에 연결되었다.
지잉-
순식간에 시스템을 장악했다. 복잡한 암호화는 소용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가상 키보드 위를 춤추듯 움직였다. 메인 서버의 방어벽이 하나둘씩 무너져 내렸다. ‘오르페우스’의 핵심 데이터를 찾았다. 하지만 지혁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은혁이 데이터를 다운로드하려 하자, 예상치 못한 경고음이 울렸다.
**”경고. 무단 침입 감지. 즉시 퇴출 시스템 가동.”**
동시에 서버룸 전체가 붉은색 비상등으로 번쩍였다. 복도 저편에서 육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제니스 코프의 특수 보안 부대였다.
“흥, 역시 너답군, 지혁.”
은혁은 비릿하게 웃었다. 이럴 줄 알았다. 지혁은 늘 한 수 앞을 내다보는 듯했지만, 은혁은 이미 그 한 수를 읽고 있었다. 데이터 다운로드 진행률이 70%를 넘어섰다. 시간은 충분했다.
강화 슈트를 입은 보안 요원 두 명이 서버룸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플라즈마 라이플에서 푸른 섬광이 번뜩였다.
“움직이지 마라! 침입자!”
요원 중 한 명이 소리치며 방아쇠를 당겼다. 푸른 에너지탄이 은혁이 서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콰앙!
은혁은 이미 움직인 후였다. 그의 몸은 공중에서 회전하며 요원의 얼굴을 강타했다. 강화된 팔꿈치가 헬멧을 으스러뜨렸다. 척추가 비틀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다른 요원이 라이플 개머리판으로 은혁의 옆구리를 찍으려 했지만, 은혁은 그 공격을 피하며 몸을 숙였다. 그의 발이 요원의 무릎 관절을 정확히 꿰뚫었다. 요원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데이터 다운로드 완료.”**
시스템 음성이 차분하게 울렸다. 은혁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빛났다.
“이제 너의 계획이 내 손에 들어왔군, 지혁.”
복도에서는 더 많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었다. 은혁은 다운로드된 데이터 칩을 뽑아 자신의 팔뚝 의체 속 깊은 곳에 삽입했다. 그는 서버룸의 거대한 메인 전력 코어를 올려다보았다. 작은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렸다.
“작별 선물이다.”
그의 손에서 작은 폭발물이 튀어나와 전력 코어에 착 달라붙었다. 타이머가 깜빡였다. 5초. 4초.
은혁은 쓰러진 요원들의 플라즈마 라이플 중 하나를 집어 들고 서버룸의 두꺼운 방화벽을 향해 조준했다. 최대 출력으로 격발하자 플라즈마가 방화벽을 녹이며 구멍을 뚫었다. 바깥은 어두운 도시의 스카이라인이었다.
3초. 2초. 1초.
강력한 폭발음이 건물을 뒤흔들었다. 콰아앙!
은혁은 방화벽에 뚫린 구멍으로 몸을 던졌다. 뻥 뚫린 서버룸에서 푸른 불꽃과 함께 비상 알람이 더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수백 미터 아래로 추락하면서도, 손에 쥔 라이플을 뒤집어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복수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