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 서막: 백색 성채의 붉은 밤**
칠흑 같은 어둠이 백색 성채의 심장을 감싸고 있었다. 높다란 상아빛 탑들은 그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오리온은 서재의 묵직한 마루 위를 초조하게 서성였다. 몇 주째, 기묘한 보고들이 이어졌다. 변경 지대의 감시탑이 통째로 사라지고, 수십 명의 정예 병사들이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성채 깊숙한 곳까지 침범할 엄두를 내지 못하리라. 이 백색 성채는 감히 신조차 뚫을 수 없다고 자부하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쓸데없는 걱정일 뿐이다.”
오리온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유리잔에 담긴 짙은 적포도주가 그의 손에서 흔들렸다. 붉은 액체가 어둠 속에서 피처럼 일렁였다.
콰아앙!
갑작스러운 굉음이 서재의 두꺼운 문을 때렸다. 오리온은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붉은 파편들이 대리석 바닥 위로 흩어졌다.
“무슨 일이냐!”
오리온은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외쳤다. 고작 문 하나가 이런 소리를 낼 리 없었다. 이어진 것은 침묵. 섬뜩할 정도로 완벽한 침묵이었다. 복도에서 들려와야 할 경비병들의 발소리도,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도 일절 없었다.
끼이이익…!
거대한 서재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어둠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듯했다. 오리온은 손에 든 검을 뽑아 들었다. 칼날이 흔들리는 촛불 빛을 받아 섬뜩하게 번뜩였다. 문 너머는 암흑.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냐… 감히 성채에 발을 들인 자가!”
그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무언가 굴러들어 왔다. 쿵, 쿵, 쿵. 마루를 따라 굴러온 그것은 오리온의 발치에 멈춰 섰다. 촛불이 희미하게 비추는 그 순간, 오리온의 눈은 공포로 경련했다.
그것은 머리였다. 자신의 가장 충실한 기사단장, ‘블레이크’의 머리. 눈은 크게 뜨인 채, 입가는 기이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마에는 검은 그림자가 깊게 박혀 있었다.
“블레이크…! 이런… 미친…!”
오리온은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피가 식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대체 누가, 어떻게, 이 굳건한 성채의 심장부까지 뚫고 들어와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그때,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친 것은… 너였지, 오리온.”
목소리는 익숙한 듯 낯설었다. 칼날처럼 날카롭고, 얼음처럼 차가웠다. 오리온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 눈을 부릅떴다. 복도의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검은 망토에 가려진 몸, 깊은 후드 아래 그림진 얼굴.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빛나는 붉은 두 눈은, 오리온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카… 칼…?”
오리온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죽었다고, 아니,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존재. 놈은 분명 붉은 협곡의 심연으로 떨어져, 살점이 찢기고 뼈가 부서져 마물의 먹이가 되었어야 했다.
“네가… 어떻게… 살아있는 것이냐!”
칼은 아무 말 없이 오리온을 응시했다. 그의 망토 아래로, 묵직한 강철 부츠가 한 걸음, 한 걸음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움직임에는 어떤 망설임도, 인간적인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잘 벼려진 살육 병기 같았다.
“어떻게 살아있냐고? 네가 기어이 나를… 나락의 끝으로 밀어 넣었으니까. 그 깊은 어둠 속에서, 나는 너의 이름을 수없이 되뇌며 이 악물고 기어 올라왔다.”
칼의 목소리가 서재 안에 낮게 울렸다. 촛불의 불꽃마저 그 목소리에 움츠러드는 듯했다.
“블레이크는… 겨우 시작일 뿐이야. 네가 나를 배신하고, 내 모든 것을 앗아갈 때… 나는 맹세했지. 너의 모든 것을, 네가 아끼는 모든 것을, 네가 가진 모든 영광을… 하나하나 부숴버리겠다고.”
오리온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에 비친 칼은, 더 이상 자신이 알던 순진하고 정의롭던 기사가 아니었다.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 그 자체였다.
“네놈이 감히…! 여기까지 혼자 왔다고 생각하느냐? 성채는 수천의 병력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금 당장…!”
오리온이 소리치며 허리춤의 신호용 수정구를 움켜쥐려 했다. 하지만 칼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쉬이이익! 검은 망토가 바람처럼 휘날렸다. 오리온은 자신의 오른팔에 무언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그의 손에 들려있던 신호용 수정구가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오리온은 비명을 지르며 오른팔을 부여잡았다. 손목 아래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칼의 손에는 칠흑 같은 단검이 들려 있었다. 그 단검의 날카로운 끝에는 오리온의 피가 맺혀 있었다.
“소리쳐봐라, 오리온. 네가 아무리 소리쳐도, 너를 도우러 올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칼의 목소리가 다시금 서재를 채웠다. 오리온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망연자실한 눈으로.
“방금 너를 지키던 기사들을 봤지? 그들의 울음소리는 이미 깊은 밤의 바람에 실려 사라진 지 오래다. 네가 잠든 동안, 나는 이 성채의 모든 숨구멍을 막아버렸다. 네 심장이 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칼의 말은 단순한 허풍이 아니었다. 오리온은 그제야 깨달았다. 블레이크의 머리, 아무도 오지 않는 복도, 자신의 수정구를 박살낸 칼의 섬뜩한 정확성. 이 모든 것은 칼이 이 성채를 완벽하게 장악했음을 의미했다.
“왜… 왜 아직도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이냐?”
오리온이 피 흘리는 팔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눈에는 공포와 함께 알 수 없는 희망이 스쳤다.
칼은 피 맺힌 단검을 천천히 돌리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고작 죽음 따위로, 네가 내게 입힌 고통을 갚을 수 있겠는가? 아니. 나는 네놈의 숨통을 한 번에 끊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내게 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느끼게 해줄 것이다.”
칼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의 손에 들린 단검이 오리온을 향해 다시금 느릿하게 들려졌다.
“오늘 밤은… 네가 가진 것 중 가장 하찮은 것 하나를 잃는 것으로 시작될 것이다. 이 거대한 백색 성채의 심장부에서, 너는 이제부터 아무것도 지킬 수 없을 테니.”
그의 말과 함께, 서재 창밖에서 붉은 불길이 솟구쳤다. 오리온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성채의 가장 높은 망루, 상아빛 탑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이었다. 그의 위엄과 힘을 상징하는, 백색 성채의 가장 높은 곳.
오리온의 입에서 울음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그 불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니… 안 돼…! 저곳은…!”
칼은 싸늘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죽음의 천사가 속삭이는 저주 같았다.
“그래. 안 되는 일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는… 매일 밤, 모든 것을 잃어가는 악몽 속에서 잠들게 될 테니까.”
칼은 천천히 단검을 치켜들었다. 붉은 불길이 그의 붉은 눈동자에 춤을 추었다. 오리온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뒤는 차가운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 이제, 그는 칼의 손아귀에 갇힌 먹잇감일 뿐이었다.
이것은 복수의 서막. 백색 성채의 밤은, 이제 붉은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