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불시착, 혹은 지독한 인연**
회색빛 도시의 잔해 위로 붉은 노을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저무는 해가 콘크리트 빌딩의 부서진 유리창에 반사되어 섬뜩한 불꽃처럼 일렁였다. 으레 그랬듯, 태양이 지면 세상은 더욱 위험해진다.
“후우… 오늘은 영 시원찮네.”
미나는 낡은 백팩을 고쳐 메며 중얼거렸다. 손에 든 갈고리로 굳게 닫힌 상점의 셔터를 몇 번 더 두드렸지만, 소용없었다. 녹슨 쇠가 삐걱거리는 소리만 요란할 뿐이었다. 한때 사람들로 북적이던 이 거리는 이제 무너진 간판과 잡초만이 무성했다. 미나의 시선은 늘 빈틈없이 움직였다. 바닥에 떨어진 못 하나, 간판 뒤에 숨겨진 틈새, 그리고 저 멀리 폐허가 된 아파트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불빛까지. 모든 것이 정보이자 생존의 실마리였다.
그녀는 어둠이 완전히 깔리기 전, 안전한 아지트로 돌아가야 했다. 아침에 나설 때만 해도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데, 역시나 오늘 수확은 보잘것없었다. 통조림 한 캔과 눅눅한 크래커 몇 조각, 그리고 이젠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낡은 라디오뿐이었다.
“뭐, 없는 것보단 낫겠지만.”
미나는 체념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발길을 돌려 익숙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길을 조심스레 걷는 순간, 저 멀리서 섬광이 번쩍였다. 미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무너진 벽 뒤로 숨었다.
뭐지? 번개인가? 아니, 하늘은 맑았다.
콰아앙!
귀청을 찢는 듯한 폭발음이 폐허 가득한 거리를 뒤흔들었다. 진동이 땅을 타고 미나의 발밑까지 전해졌다.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미나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뭔가 떨어지고 있었다. 불꽃을 뿜으며 빠르게 추락하는 물체. 비행선 같은 건가? 아니, 저렇게 작은 비행선은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이내 도시 외곽의 거대한 스포츠 경기장 쪽으로 떨어졌다. 마지막 굉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구름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젠장… 또 무슨 일이야.”
미나는 찝찝한 예감에 휩싸였다. 보통 이런 식의 ‘이벤트’는 좋은 결과를 가져온 적이 없었다. 호기심은 사치였지만, 동시에 생존의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었다. 운이 좋으면 뭔가 쓸만한 자원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갈등했다. 안전한 아지트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추락 지점으로 향할 것인가.
결국 미나는 후자를 택했다. 이놈의 놈의 호기심이 문제였다. 그녀는 등 뒤의 백팩을 단단히 고쳐 매고, 허리춤의 만능칼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최대한 몸을 낮추고, 폐허 사이를 가로질러 추락 지점을 향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경기장 외곽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외벽은 무너져 내렸고, 잔해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폭발 당시 생긴 열기 때문인지, 연기가 희뿌옇게 피어올랐다. 미나는 한참을 기다려 연기가 걷히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으읍, 으으읍… 살려줘요…!”
폭발의 흔적 한가운데, 거대한 잔해 덩어리에 깔려 허우적거리는 사람이었다. 잔해 밑에 몸이 낀 것인지, 한쪽 다리를 빼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의 주변은 폭발로 인해 검게 그을려 있었지만, 그가 입고 있는 옷만은 기이할 정도로 말끔했다. 새하얀 점프수트에 얼룩 하나 없었다. 마스크도 없이 맨 얼굴이었고, 심지어 안경까지 멀쩡했다. 이 척박한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깨끗한 모습이었다. 마치 다른 세상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미나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혹시 함정일 수도 있다. 이 세상은 사람을 믿을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도 필사적이었다. 공포에 질린 눈빛과 떨리는 목소리는 연기라고 보기 어려웠다.
“저, 저기요…! 들려요? 저 좀 도와줘요…!”
남자는 미나를 발견하고는 더욱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또렷하게 보이는 이목구비는 꽤 반듯했다. 한눈에 봐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미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잔해 더미 가까이 다가갔다.
“움직이지 마요. 다칠 수도 있어요.”
“아, 네, 네! 움직이지 않을게요! 제발… 빨리 빼내 주세요… 아파 죽겠어요!”
미나는 남자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잔해가 무겁긴 하지만, 다리를 완전히 부러뜨릴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봐 지렛대로 쓸 만한 것을 찾았다. 낡은 철근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이거 들 수 있겠어요? 내가 밀면 당신이 다리를 빼야 해요.”
“네! 할 수 있어요! 뭐든지 할게요!”
그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지만, 미나의 말에 즉각 반응했다. 미나는 철근을 잔해 밑으로 집어넣고 온 힘을 다해 들어 올렸다. 끙,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팔뚝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지금!”
“으읍!”
남자는 신음하며 다리를 빼냈다. 잔해가 다시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남자는 비틀거리며 일어섰지만, 이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흐읍, 흐읍… 살았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놀라움과 감사함으로 가득했다.
“세상에… 전 이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당신이 나타나다니… 마치 천사 같아요!”
미나는 그의 과장된 표현에 헛웃음을 지었다.
“천사라뇨. 내 갈 길 가던 사람 붙잡아 놓고.”
“아니,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저는 현우라고 해요. 박현우!”
그는 다급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손이 미나에게 뻗어졌다. 악수를 청하는 듯했다. 미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의 손을 바라봤다. 이 먼지 가득한 세상에 손을 뻗어 악수라니. 그는 정말이지 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미나는 그의 손을 무시하고 뒤돌아섰다.
“됐어요. 이제 당신 갈 길 가요.”
“네? 갈 길이라뇨? 저는 갈 길이 없는데요?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제가 왜 여기에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저는 그냥… 갑자기 눈을 떠보니 여긴데… 비행선이 고장 나서… 으악!”
현우는 말을 더듬거리며 미나를 따라오려다, 제대로 걷지 못하고 다시 비틀거렸다. 자세히 보니 그의 점프수트 왼쪽 무릎 부분이 찢어져 있었고, 그 밑으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방금 잔해에 깔렸던 다리인 듯했다.
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말 민폐도 가지가지네.”
“죄, 죄송해요… 아, 아픈 건 아닌데… 어쩐지 다리가 말을 안 듣네요. 제가 원래 좀 칠칠맞아서…”
“칠칠맞은 건 알겠고. 그 몰골로 혼자 돌아다니면 살아남지 못해요. 밤 되면 더 위험해져요.”
미나는 현우를 힐끗 바라봤다. 그가 이대로 여기에 버려진다면, 분명히 얼마 못 가 이 황폐한 세상의 먹이가 될 터였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그리고 그 찝찝함은 곧 짜증으로 변했다.
“일단 어디든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해요. 내가 당신 아지트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그 뒤로는 알아서 해요.”
“정말요? 정말 고마워요! 역시 천사 같아요!”
현우는 또다시 해맑게 웃으며 미나에게 달려들려 했고, 미나는 그의 코앞에서 손을 들어 저지했다.
“다가오지 마요. 그리고 천사 타령 그만 좀.”
“네, 넵! 미나 씨!”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요?”
“아, 아까 자기 이름이 미나라고 하신 줄 알았어요! 아까 뭐라고 하셨죠? 잘 못 들었는데…”
미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현우를 바라봤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는 대체… 어떤 세상에서 온 걸까.
“…됐어요. 그냥 따라와요. 잡담할 시간 없으니까.”
미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현우에게 낡은 백팩의 한쪽 어깨끈을 잡으라고 했다. 그의 다리가 불편하니 의지할 곳이 필요할 터였다. 현우는 순순히 어깨끈을 잡았다. 그의 손이 닿자마자, 백팩 안쪽에서 작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나는 살짝 놀랐지만, 티 내지 않았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요. 밤에는 이 폐허가 무덤으로 변해요. 소리 내지 말고, 빛도 내지 말고, 그림자처럼 움직여야 해요. 알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미나 대장님!”
‘대장님이라니….’
미나는 속으로 읊조렸다. 이 남자는 정말이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불안감과 함께 묘한 책임감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황폐한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는 것만도 벅찬데, 엉뚱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이 남자까지 신경 써야 하다니. 미나는 오늘 밤이 유난히 길어질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지독한 인연은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붉은 노을이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이 세상을 삼켰다. 미나와 현우, 두 이질적인 존재는 폐허의 그림자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들의 앞에는 어떤 생존기가 펼쳐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