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황혼이 찢어진 도시의 지평선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지후는 부서진 아스팔트 위를 걷고 있었다. 닳아 해진 부츠는 먼지와 유리 조각을 씹으며 삐걱거렸다. 세상이 무너진 지 오래, 이제는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가 그의 유일한 지도였다. 잿빛 빌딩 숲은 기형적인 마법의 폭주로 일그러져 있었고, 이따금 들려오는 금속이 휘어지는 소리만이 그의 동행이었다.
지후는 오래전부터 떠돌던 소문을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이 응축되어 있던 곳, 대붕괴의 혼돈 속에서도 홀로 온전하다는 전설 속의 장소. 바로 아르카나 학원이었다. 엘리트 마법사들의 요람이자, 마법 문명의 심장이었다는 그곳. 많은 이들이 환상이라 치부했지만, 지후는 단 한 번도 그 이야기를 놓지 않았다. 그곳에 어떤 희망이든, 혹은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며칠을 더 걷고, 지도를 알 수 없는 폐허를 헤맨 끝에, 그는 마침내 거대한 성벽의 윤곽을 발견했다. 덩굴에 뒤덮이고 금이 간 육중한 석문 위로 ‘아르카나’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전설은 사실이었다. 학원은 정말로 존재했다.
문을 밀자 묵직한 마찰음이 황량한 대지에 울려 퍼졌다. 안으로 들어서자, 외부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잘 정돈된 정원은 잡초가 무성했지만, 건물의 뼈대는 놀랍도록 온전했다. 웅장한 대리석 기둥은 여전히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돔형 천장은 깨진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희미한 빛을 흘려보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혹은 누군가 정성껏 보존한 듯한 모습이었다.
“아무도 없나….”
지후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텅 빈 공간 속에서 메아리쳤다가 사라졌다.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희미하게 떠도는 마나의 기운만이 이곳이 한때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며 거대한 홀을 가로질렀다. 거미줄이 드리워진 복도를 지나, 먼지가 쌓인 교실과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마법 교과서들은 책장 가득 꽂혀 있었고, 실험 도구들은 깨진 채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생존자의 흔적은 없었다. 이곳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불길할 정도로.
도서관 가장 깊숙한 곳, 지후는 낡은 책장 뒤에 숨겨진 비밀 통로를 발견했다. 희미하게 마법이 봉인되어 있는 것을 감지했다. 일반적인 보호 마법과는 달랐다.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혹은 가두기 위한 듯한 기묘한 봉인이었다. 지후는 자신이 가진 얼마 안 되는 마나를 끌어모아 조심스럽게 봉인을 해제했다. 마법진이 섬광처럼 번쩍이며 사라지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숨겨진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어둡고 축축한 공기가 그의 얼굴을 때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그를 유혹하는 듯했다.
“지하….”
그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모든 소문, 모든 전설, 그리고 이 학원의 불길한 완벽함이 이 지하와 연결되어 있을 터였다. 폐쇄된 공간에서 풍겨오는 쇠 비린내와 흙냄새, 그리고 미약하게 감지되는 역한 마나의 잔향은 그의 본능적인 경고등을 울렸다.
돌계단을 따라 한 걸음씩 내려갈수록, 주위는 더욱 어두워지고 공기는 차가워졌다. 귓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한 완벽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한참을 내려가자, 차가운 벽면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문양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를 묘사한 듯 보였지만, 동시에 잔혹한 실험의 흔적 같기도 했다. 복도는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벽에는 드문드문 마력석이 박혀 희미한 녹색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빛은 차라리 어둠을 더 강조하는 듯했다.
그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몇몇 방들은 굳게 닫혀 있었고, 어떤 방은 문이 부서진 채 안을 드러내고 있었다. 깨진 실험 기구들과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겨 있던 것으로 보이는 병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벽에는 긁힌 자국과 알 수 없는 혈흔 같은 얼룩도 보였다. 학원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아니, 차라리 그 명성의 이면을 보여주는 듯한 광경이었다.
마침내, 그는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거대한 홀에 다다랐다. 홀의 중앙에는 지름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체가 떠 있었다. 투명하면서도 불투명한, 마치 살아있는 유리로 만들어진 듯한 구체였다. 구체 안쪽에서는 희미한 푸른빛이 맥동하고 있었고, 그 안에는… 형체들이 보였다.
인간의 형체.
수십, 아니 수백에 달하는 인간의 형체들이 구체 안에 떠 있었다. 모두 벗은 몸으로, 눈을 감은 채,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마치 깊은 잠에 빠져든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피부는 잿빛으로 변색되어 있었고, 몸에는 가느다란 마법의 덩굴 같은 것이 얽혀 구체의 표면과 이어져 있었다. 덩굴에서는 생명의 기운이 흐르는 듯, 희미한 빛이 깜빡였다.
지후는 숨을 멈췄다. 역겨움이 치밀었다. 저것은 단순한 시체가 아니었다. 저들은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불꽃에 의해, 끔찍한 방식으로.
구체의 가장자리에 떠 있는 한 얼굴에서, 지후의 시선이 멈췄다. 그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고대 마법학의 대가이자 아르카나 학원의 설립자 중 한 명으로 전설처럼 구전되던, ‘현자’ 에르반. 그의 초상화는 학원 곳곳에 걸려 있었고, 그의 이론은 마법의 기초와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 에르반은 구체 안에 갇혀, 영원한 평온을 가장한 공포 속에서 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고통도, 환희도 없는, 그저 무(無)의 상태였다.
“이게… 금기였군.”
지후의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르카나 학원은 대붕괴에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붕괴를 예측하고, 혹은 그 원인이 되어, 스스로를 이런 방식으로 보존한 것이었다. 영원한 삶을 얻는 대가로, 인간성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거대한 생체 에너지 저장고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학원 지하에 숨겨진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을 가장한 죽음, 즉 영원한 고정이었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생존’을 택한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끔찍한 타협을 선택한 것이다.
그때, 구체에서 희미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마치 무형의 손길이 그를 부르는 듯한 알 수 없는 충동이 밀려왔다. 속삭임도, 소리도 없었지만, 그곳으로 오라는, 평온을 찾으라는 강력한 유혹이었다. 어둠과 절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영원한 안식과 고통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달콤한 속삭임과도 같았다.
하지만 지후는 몸을 떨었다. 저것은 안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소멸이자, 영혼의 포식이었다. 저 구체는 단순한 보존 장치가 아니라, 마법 에너지, 어쩌면 살아있는 생명의 정수를 끊임없이 빨아들이는 거대한 존재였다. 학원 전체가, 아니, 이 폐허가 된 세상의 모든 마나가 이 지하의 금기를 지탱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그의 존재 자체가 위험에 처한 듯했다. 이 금기는 단순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를 인지한 자를 끌어당기는 듯했다.
지후는 등을 돌려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공포가 그의 뒤를 쫓아오는 듯했다. 쇠 비린내가 더욱 강렬하게 그의 코를 찔렀다. 발소리가 지하 복도에 거칠게 울려 퍼졌다. 그는 멈추지 않고, 어둠을 헤치고, 봉인된 문을 지나, 마침내 학원 밖으로 뛰쳐나왔다.
차가운 새벽 바람이 그의 땀으로 축축한 얼굴을 때렸다. 그는 폐허가 된 도시를 향해, 어둠이 걷히는 지평선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아르카나 학원은 이제 더 이상 희망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들이 결코 알지 못해야 할, 영원히 묻혀 있어야 할 끔찍한 금기의 무덤이었다. 그리고 지후는 그 금기의 그림자를 등에 지고, 다시금 혼돈의 세상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의 두 눈에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공포와 함께, 새로운 사명이 새겨져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