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슬립 (시간여행)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망할, 또 시작이네.”

김현우는 낡은 고시원 창밖으로 쏟아지는 소나기를 노려봤다. 끈적하고 습한 여름의 빗줄기는 차라리 증오에 가까웠다. 창문 너머로는 퇴근 시간의 지하철역 인파가 개미떼처럼 우글거렸다. 저마다 지친 어깨를 늘어뜨린 채, 비바람을 뚫고 좁은 입구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은 흡사 거대한 기계의 부품 같았다. 현우는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늘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스무 살에 도시로 올라와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고, 전공은 그저 ‘적당히’ 선택한 역사학이었다. 거창한 꿈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먹고사는 문제에 쫓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과거’의 인류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흥미가 생겼을 뿐이다. 특히 역사의 격변기, 민초들이 들고일어나 거대한 권력에 맞섰던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과거 어느 시대와 다를 바 없이 견고하고, 무자비하며, 지루했다.

삑- 삑-

초인종 소리에 현우는 어깨를 움츠렸다. 방값을 재촉하는 소리일 게 뻔했다. 한 달 치 월세는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지만, 주인아줌마는 늘 저렇게 미리 불안감을 심어주곤 했다. 이 빌어먹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는 자의 설움은 구질구질하고 추잡했다. 현우는 한숨을 쉬며 책상 위 고서를 집어 들었다. 제목은 『제국 흥망사 – 대륙력 1789년의 혁명』. 낡은 종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는 게 없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차피 가진 것 없는 자들은 늘 당하기 마련이고, 거대한 시스템에 균열을 내기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혁명? 개혁? 그딴 거창한 말들은 기득권의 배를 불리거나, 아니면 그저 새로운 지배계층을 탄생시킬 뿐이었다.

그때였다.

창밖을 가득 채우고 있던 회색빛 하늘이 갑자기 섬뜩한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먹구름 사이로 거대한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빛의 기둥이 수직으로 지상에 꽂혔다. 현우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뭐… 뭐야?”

도시의 소음이 일순간 정지했다. 삑삑거리던 경적 소리도, 웅웅거리던 지하철 소리도, 빗소리마저 멎었다. 세상이 거대한 숨을 들이쉬는 듯한 정적. 그리고 그 정적을 찢고 들어오는, 귀청을 때리는 듯한 찢어지는 소리. 마치 유리잔 수천 개가 동시에 깨지는 것 같았다.

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보랏빛 섬광이 고시원 창문을 산산조각 냈다. 파편이 튀는 동시에, 거대한 흡입력이 현우의 몸을 덮쳤다. 눈앞의 모든 것이 뒤틀리고 늘어났다. 고시원의 벽, 낡은 책상, 손에 쥔 고서까지, 모든 것이 색색의 물감처럼 번져나갔다. 그의 몸은 마치 강풍에 날리는 종잇조각처럼 허공으로 솟구쳤다.

“으아아악!”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의식의 끈이 끊어지기 직전, 그는 보랏빛 소용돌이 속에서 무언가를 강렬하게 느꼈다. 억압받는 자들의 절규. 그리고 그 절규 속에서 피어나는,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

***

김현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코끝을 찌르는 흙먼지와 비릿한 피 냄새, 그리고 매캐한 나무 타는 냄새가 뒤섞여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축축하고 차가운 땅바닥이 몸을 짓눌렀다.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진 듯한 통증에 신음이 절로 나왔다.

“여… 여기가 어디지?”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봤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가 알던 세계와는 완전히 달랐다. 빽빽한 고층 빌딩 대신 듬성듬성한 오두막들이 보였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대신 마른 흙바닥과 갈라진 돌길이 이어졌다. 저 멀리, 언덕 너머로는 희미하게 고성이 보였다. 석회암으로 지어진 육중한 성벽이 거만하게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도 달랐다. 늘 입던 후드티와 청바지 대신, 낯선 감촉의 거친 삼베 옷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헤진 조끼와 낡은 가죽 샌들까지, 마치 시대극 배우의 의상을 입은 듯했다. 손에 쥐고 있던 고서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게… 꿈인가?”

뺨을 꼬집었다. 얼얼한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꿈이 아니었다. 그는 혼란 속에서 머리를 흔들었다. 분명 고시원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보랏빛 섬광이 터졌고…

그때, 멀리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비명과 말발굽 소리, 그리고 거친 고함소리. 현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풀숲으로 기어들어 갔다.

곧이어 흙먼지를 일으키며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그들의 모습에 현우는 숨을 멈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철갑으로 무장한 병사들. 등에 메고 있는 방패에는 붉은 사자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허리춤에는 기다란 칼이 매달려 있었고, 손에는 창과 곤봉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있었다. 말발굽이 지면을 거칠게 때리며 굉음을 냈다.

병사들은 한 마을 앞에 멈춰 섰다. 낡은 초가집들 사이로 도망치려는 주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병사들은 사정없이 채찍을 휘둘렀고, 피 묻은 가죽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이 빌어먹을 벌레들아! 세금을 바칠 때가 언제인데, 아직도 뭉그적거리는가!”

병사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말을 타고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투구는 다른 병사들보다 화려했고, 망토는 붉은색이었다. 허리춤의 칼자루에는 보석이 박혀 번쩍였다.

“올해 수확은 흉년이었습니다, 나리! 제발 한 번만…!”

한 노인이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그의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했고, 비루먹은 개처럼 굽실거렸다. 하지만 병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끄럽다! 황제의 은총을 거스르는가? 그 잘난 밭이 흉년이면, 네놈들 딸이라도 팔아 바치면 될 것을!”

그 말을 듣자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몇몇 젊은이들의 눈에는 분노의 불꽃이 이글거렸다. 그러나 이내 그들의 어깨는 축 늘어졌다. 거대한 제국군 앞에서 평민들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병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을에 들이닥쳤다. 가축들을 끌고 가고, 곡식 자루를 빼앗았다. 저항하려는 자들은 곤봉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비명과 울음소리가 뒤섞여 처절한 합창을 이뤘다.

현우는 풀숲에 엎드린 채 그 모든 광경을 지켜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분노, 역겨움, 그리고 알 수 없는 슬픔이 뒤섞여 그의 가슴을 옥죄었다. 스무 살 내내, 불합리한 현실에 대해 분노했지만, 그의 분노는 늘 간접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컴퓨터 화면 속 기사나 뉴스 영상, 책 속의 글자로만 접하던 불의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생생하고, 날것 그대로의 폭력이었다. 가난한 자들이 짓밟히고, 약자들이 착취당하는 참혹한 현실. 그의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젠장… 이건… 이건 너무하잖아!”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눈앞의 병사들은 분명 그가 고서에서 읽었던 ‘카이저 제국’의 군대와 너무나 흡사했다. 붉은 사자 문양, 철갑, 황제… 모든 것이 그가 읽었던 대륙력 시대의 제국과 맞아떨어졌다. 설마, 설마 내가 그 시대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시간 이동? 타임슬립?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너무나 선명했다.

“젠장… 왜 하필 나야…?”

그때, 한 병사가 어린 소녀를 붙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는 모습이 현우의 눈에 들어왔다. 소녀의 어머니가 흐느끼며 매달렸지만, 병사는 칼자루로 여인의 머리를 내리쳤다. 여인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소녀는 공포에 질려 울부짖었다.

그 광경을 본 순간, 현우의 머릿속에서 뭔가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의 분노는 더 이상 추상적이지 않았다. 심장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멈춰! 이 개자식들아!”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풀숲에서 벌떡 일어났다.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현우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눈빛은 살벌하고 냉랭했다.

“저 놈은 또 뭐야? 어디서 굴러온 벌레인가!”

붉은 망토의 우두머리가 현우를 향해 날카롭게 말했다. 현우는 순간 몸이 굳었지만, 소녀의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이성을 되찾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과거의 지식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제국에 맞섰던 수많은 이름 없는 영웅들. 그들의 용기와 좌절, 그리고 결국 피어난 희망.

‘나는 돌아갈 수 없을 거야. 그럼… 그럼 내가 뭘 할 수 있지?’

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비록 힘없는 평범한 대학생이었지만, 적어도 그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미래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살아남는 것만이 목적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과거의 역사를 배우며, 민초들의 삶을 지켜보며 품었던 질문을 이제야 마주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그 시대에 있었다면… 난 무엇을 했을까?’

그리고 지금, 그 질문에 답할 때가 온 것이다.

현우의 눈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분노와 함께, 한 줄기 결의가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솟아났다.
“이런 식으로는 안 돼. 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