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한 붉은 황야는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잿빛 구름이 낮게 깔려 언제나 그랬듯 먹구름에 가려져 있었고, 그마저도 붉은 흙먼지와 뒤섞여 탁한 색을 띠었다. 이곳 ‘적멸의 땅’에서는 그 흔한 풀 한 포기, 작은 생명체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앙상하게 비틀린 고목들이 유령처럼 서 있을 뿐, 모든 것이 죽어 있었다.
류진은 마른 목을 한번 삼켰다. 며칠째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등에는 낡은 가죽 배낭 하나와 옆구리엔 녹슨 철검이 전부였다. 한때는 온 세상을 뒤덮었던 풍부한 영기(靈氣)는 이제는 희미한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작 땅속 깊은 곳에 겨우 스며들어 있을 영기의 잔재를 찾아 헤매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젠장… 이대로 가다간 말라죽겠군.”
그의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붉은 모래는 그의 신발을 온통 뒤덮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폐허가 된 세상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원래대로라면 이곳은 한때 ‘청하 문파’의 영지로, 푸른 대나무 숲과 맑은 계곡물이 흐르던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이름조차 무색한 적멸의 땅이 되어버렸을 뿐.
저 멀리, 붉은 안개가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곳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희망일까, 아니면 또 다른 절망의 시작일까. 류진은 순간 망설였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단전(丹田)에 깊이 잠들어 있는 마지막 남은 진기(眞氣)를 끌어모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울리며 온몸에 희미한 온기가 돌았다. 그것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선, 이 세계의 마지막 발버둥과도 같은 것이었다.
두 시간 남짓 걸었을까. 마침내 그 거대한 그림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거대한 암석산이었다. 하지만 그 형태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자연적인 산이 아니라 거대한 건물들이 무너져 쌓인 폐허의 잔해였다. 과거 청하 문파의 본산이 있었던 자리였다.
류진은 조심스럽게 폐허 더미로 다가섰다. 부서진 기와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고, 영롱한 빛을 내던 비취색 기둥들은 깨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한때 이 모든 것을 지탱했던 견고한 주춧돌들은 마치 거인에게 짓밟힌 듯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먼지와 함께 희미한 죽은 영기, 그리고 어딘가 불쾌한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는 가장 온전해 보이는 건물 잔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그 안에 아직 쓸만한 물건이나, 운이 좋다면 마실 물이라도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잔해의 입구는 거대한 석판으로 막혀 있었지만, 한쪽 귀퉁이가 부서져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틈이 나 있었다. 류진은 조용히 몸을 숙여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손끝에 약한 진기를 모아 희미한 빛을 만들자, 주위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과거 문파의 서고였던 모양이었다. 흙먼지가 두껍게 쌓인 책장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수많은 고서들이 바닥에 뒹굴거나 반쯤 타버린 채 방치되어 있었다.
“서고라니… 쓸모없는 것들뿐이겠군.”
그는 투덜거렸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빛내며 주변을 살폈다. 책이야 그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폐허 속에서 어떤 보물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은 언제나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그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쌓인 파편 더미에 닿았다. 검은색 천에 싸인 무언가가 보였다.
류진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긴장이 온몸을 옥죄었다. 이런 폐허에서는 예상치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는 주위를 경계하며 천에 싸인 물건을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스스슥.*
천이 스르르 벗겨지자, 그 안에서 드러난 것은 놀랍게도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단지 하나였다.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 재질은 영롱한 옥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단지의 뚜껑 틈새에서 희미하게 영기의 기운이 새어 나왔다.
“이건… 영기를 보존하는 단지인가?”
류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 황폐한 세계에서 영기가 온전하게 보존된 물건을 발견하다니! 그는 조심스럽게 단지를 들어 올렸다. 뚜껑을 열기 위해 힘을 주자, 단단히 밀봉되어 있던 뚜껑이 ‘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순간, 짙은 녹색의 영기가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영기 속에서 뭔가가 함께 솟구쳐 올랐다.
*크아아악!*
그것은 녹색의 작은 그림자였다. 용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몸은 뱀처럼 길고 비늘은 옥색으로 빛났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류진의 얼굴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영기 보존 단지 속에 잠들어 있던 정령, 혹은 요수(妖獸)의 새끼였다. 영기가 고갈된 세계에서 이렇게 온전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를 만나다니!
류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며 철검을 뽑아 들었다. 녹슨 철검은 영기를 두르자 푸른빛을 희미하게 띠었다.
“젠장! 이런 곳에 요수가 있을 줄이야!”
그 작은 요수는 눈을 번뜩이며 다시 류진에게 돌진했다. 몸놀림이 빠르고 민첩했다. 류진은 검을 휘둘러 요수의 공격을 쳐냈다. 요수의 몸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검이 부딪히는 순간 ‘캉!’ 하는 금속음이 울렸다.
“겨우 이 정도에 무너질 내가 아니다!”
류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몸속에 남아있던 진기를 끌어올려 검날에 집중시켰다. 철검은 더욱 강렬한 푸른빛을 띠며 날카로운 영기 파동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굶주린 맹수처럼 변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요수들과 싸워왔고, 그 모든 싸움에서 승리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하압!”
류진은 기합과 함께 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요수는 재빨리 피하려 했지만, 류진의 검은 이미 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요수의 몸에 검날이 스치자 ‘촤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비늘이 튀어 올랐다. 요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요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상처에서 푸른 피가 흐르는데도 불구하고 더욱 맹렬하게 류진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의 입에서 독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독인가!?’
류진은 급히 숨을 멈추고 몸을 틀어 독기를 피했다. 그는 다시 한번 검을 고쳐 잡았다. 이번에는 정면 승부가 아니었다. 류진은 폐허 지형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빠르게 움직여 무너진 책장 뒤로 숨었다. 요수는 류진이 사라진 곳을 향해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어리석은 짐승 같으니!”
류진은 책장 뒤에서 튀어나와 요수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요수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류진은 검을 빼내며 요수의 약점을 노렸다. 녀석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이걸로 끝이다!”
그는 마지막 남은 진기를 모아 검에 불어넣었다. 검은 영롱한 푸른색으로 빛나며 섬광처럼 요수의 머리를 향해 내리찍혔다.
*콰직!*
요수는 짧은 비명과 함께 땅에 고꾸라졌다. 푸른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왔다. 류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요수를 바라봤다. 승리했지만, 그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젠장… 이걸로 겨우 한숨 돌렸군.”
그는 쓰러진 요수에게서 시선을 돌려 영기 단지를 다시 바라봤다. 여전히 희미한 영기가 단지 안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요수가 단지에 잠들어 있던 존재였음을 감안하면, 이 단지는 단순한 영기 보존 단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요수를 봉인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단지 안을 들여다봤다. 단지 바닥에는 푸른색의 맑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액체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내는 작은 구슬 하나가 박혀 있었다. 영기의 근원 같기도 하고, 영약 같기도 한 그것은 이 황폐한 세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귀한 보물처럼 보였다.
류진은 망설임 없이 단지를 기울였다. 푸른 액체가 그의 입으로 흘러들어왔다.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 그의 목을 타고 흘러내리자, 메마른 몸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생기가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단숨에 갈증이 해소되고, 솟아나는 영기가 그의 단전을 채워나갔다. 그의 지친 몸은 순식간에 활력을 되찾는 듯했다.
“이런 귀한 물건이…!”
그는 영기 단지 바닥에 박혀있던 푸른 구슬을 꺼냈다. 손안에 쥐자 따뜻하고 강렬한 영기가 느껴졌다. 이것 하나만 있다면, 며칠 밤낮을 수련할 수 있을 터였다.
류진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폐허 속에서 만난 치명적인 위협과 함께 찾아온 예상치 못한 보물. 이것은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 황폐한 세상이 그에게 아직 살아갈 이유를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조용히 구슬을 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폐허의 깊은 곳을 바라봤다. 저 어둠 속 어딘가에, 이 모든 것을 뒤바꿀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의 생존기는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